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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누가복음 17:19~31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시면서 들려주시는 교훈과 비유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사색하며 생각할 거리가 많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비유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아시는 실제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집니다.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금생과 내생의 삶에 대한 이 이야기 속에서 다음 몇 가지의 예수님의 내세에 대한 지식과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인간들의 지상 생활의 부조리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단순하고 대조적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렇게 부자인 것은 아마도 그가 부유하고 문벌 좋은 가문에 태어난 까닭인 것 같습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함부로 허랑방탕하기 쉽지 않고 오히려 인색하기 쉬우니까요. 이 부자는 거의 작은 영토의 왕처럼 대단한 부를 소유한 귀족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나사로는 불행한 삶의 대표자처럼 보입니다. 온 몸이 더 피부병으로 상하여 헌 데 투성이고 그는 가족에게서 버림당한 채 동냥을 얻기 위하여 이곳 저곳 떠도는 신세입니다. 그 큰 부자의 얘기를 듣고 그 집 대문간에 데려다 달라고 사람들에게 청했는지, 사람들이 그 집 문에 버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벌어지는 그 집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을 기대를 가졌으나 아무도 주지 않고 도리어 그 집 개들이 나와서 그 사람의 헐어버린 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개들이 나사로를 그 헌데를 핥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를 돌보지 않았다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나사로를 돌봐주었더라면 개들이 그 헌데를 계속 핥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말씀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부조리함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이러한 부조리함은 자주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에 태어나서 기근 속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려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아이들을 티브이 공익광고에서 종종 보게 되는데, 그 때마다 마음이 눌리게 됩니다. 그 광고를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기도 할 정도로 인생의 밑바닥을 살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신명기 15:11 말씀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공평이 항상 있고 부자와 대단한 권세가도 있겠지만 지극히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도 반드시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공평함과 인생의 부조리함을 왜 하나님께서 세상에 펼쳐지도록 하실까요? 그것은 사람을 시험하려 함이라 생각됩니다. 부요한 자, 권세 있는 자, 지식 있는 자, 지혜 있는 자 등이 자기의 그 가진 것들을 가지고 자만하며 자랑하며 자기만을 위하여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에게 주어진 남다른 바 가진 것들을 인생의 불행과 실패와 고통과 가난 속에 헤매는 이들을 보면서 돕고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가를 달아보시기 위함입니다.
이 부자는 그러한 것을 전혀 인식하고 못하고 살았다가 나중에 죽어서도 자기가 잘못 살았다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는 사실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심판에 의하여 판가름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누가복음 13:47 이하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고 평가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 자는 많이 요구하고 평가 기준도 그만큼 높습니다. 하지만 적게 받은 자는 적은 기준, 낮은 기준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받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했는가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그 점에서 부자라고 해서 유리한 것이 결코 아니요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유리한 것 아닙니다. 지식이 남달리 많다고 해서 유리한 것 아니요 재능이 남다르다고 해서 지상의 인생을 잘 살았다고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잘 살았다는 평가는 그가 가진 바 되었던 부와 권력과 건강과 지식과 재능과 시간들을 얼마나 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였는가를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장차 받을 심판 기준을 가지고 자기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보다 남달리 탁월한 것들을 주셨다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가족과 이웃과 회사와 이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는가를 달아봅시다. 할렐루야.
또한 이 이야기는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하게 해줍니다.
22절에 보면, 거지가 먼저 죽습니다. 그 거지는 배고픔과 무관심과 사람들의 타박 속에서 외롭게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부자의 하인 한 사람이 아침에 대문에 나왔다가 한쪽 편에서 밤사이 죽은 거지 나사로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말하니 부자는 기분 나쁘다고 빨리 시체 치우라고 말하여 몇몇 하인들이 서둘러 뒷산의 기슭을 파서 그 날 오전에 파묻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골칫거리 하나 해결한 것으로 한 사람의 죽음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잔치하며 왕처럼 살던 그 부자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지만, 결국 그 부자도 얼마 후에 똑 같이 죽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그 몸이 죽음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흙덩이일 뿐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왕이나 재벌의 총수라도 다 그 몸은 흙덩이일 뿐입니다. 지혜자도, 무지한 자도, 권력자도 평민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을 반듯이 맞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약해지고 부서지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외없이 다 죽음의 밥이 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염두에 두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품고 사는 자만이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깊이 아는 지혜자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 속에는 죽은 다음의 세계 곧 내세가 실재하며 내세가 인생의 많은 비중을 차지함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야기 중에 부자와 나사로의 지상 생활의 이야기는 3절의 분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내세의 이야기와 죽은 부자의 영혼과 아브라함으로 표상된 하나님과의 이야기는 다 합쳐서 10절의 분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세의 이야기가 월등하게 분량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죽은 뒤의 내세의 삶이 비중이 많음을 생각하도록 해줍니다. 우리 인생이 칠십, 팔십, 구십일지라도 내세의 삶은 그보다 훨씬 많고 장구한 생애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세의 삶은 흐릿한 안개 속의 사물처럼 희뿌연 세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듯이, 내세의 삶은 매우 생생하며 현장성이 있고 사람의 영혼의 의식도 분명하며, 그 사람의 영혼의 감정도, 의지와 바람도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내세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참으로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내세의 삶이 실재하며 매우 생생하며 우리 인생의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세상이 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며 이 짧은 지상의 삶을 지혜롭게 살며 내세의 영원하고 복된 삶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 속에는 죽은 자가 반드시 심판을 받는 것과 그 심판이 즉시 집행됨을 말해줍니다.
그 거지 나사로는 죽자마자 그 영혼이 천사들에 의하여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반면에 부자도 죽자마자 험상궂은 악령에게 붙잡혀서 지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완전히 상반된 두 장소로 갈려 들어간 것은 그들에게 죽는 즉시 심판이 이루어진 것을 전제로 합니다. 히브리서 9:27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신 직후에 일어날 거대한 종말 심판은 모든 자들의 무덤에서 몸이 부활의 몸까지 입고 엄중하게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뤄지는 궁극적인 심판이지만 사람이 죽은 즉시 올라갈 때에도 그 영혼이 즉시로 심판을 받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심판에 의하여 거지 나사로는 낙원 곧 천국으로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 곧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죽은 직후에 어디 중간 지점에서 한참을 대기하거나 떠돌거나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죽은 직후에 그 영혼이 곧장 선한 천사에 의하여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거나 악한 천사 곧 하나님께서 허락 속에 일하는 악령이 그 영혼을 붙들어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중대한 시점입니다. 그 후에는 회개할 기회가 더 이상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죽음은 위대한 결산의 날입니다. 그 날을 기점으로 곧장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 결정적인 날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죽음 너머의 세상을 위하여 준비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 속에는 지상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반전들이 죽은 직후 많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보는 사람들마다 혀를 끌끌 차면서 불쌍히 여기거나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그 부자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장례식은 극히 대조적이었을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 부자집 하인들 몇 사람이 대강 땅을 파고 묻어주고 그 앞에서 참 안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울어주지 않고 그 죽은 당일에 그는 잊혀져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자가 죽었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장례식장에 들끓으며 많은 화환도 보내고 며칠을 두고 장례를 치렀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는 지상에서 이렇게 호화롭게 살았으니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삶을 살았으니 천국 갔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오늘 본문 말씀의 이야기에서는 그 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죽은 나사로는 낙원에서 평안히 쉬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있으며 믿음의 조상과 함께 교제하며 행복하게 삽니다. 그 반면에 부자는 죽어서 음부 곧 지옥에 떨어져서 물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하는 비참한 갈증을 겪으면서 고통 속에서 신음합니다.
이처럼 내세의 모습은 지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의외성이 참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지옥에 가 있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악인이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게 될 경우도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다들 구원받고 천국 백성이 될 것이라고 백성들이 믿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위선과 부패와 세속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시면서 그들이 자기만 지옥 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반면에서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께 몰려왔는데, 그들이 회개하여 천국 갈 것으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매달린 십자가의 한 편 강도는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던 과거가 있었지만 주님은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며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청할 때 그 날 밤에 낙원에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주님은 분명히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의외성이 참으로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전지성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는 분이기에 사람의 외모에 속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종교의 외적인 경건의 탈을 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그 내면의 은밀한 욕심과 자기 자만과 남을 판단하며 자기를 의롭게 보는 교만이 있다면 주님은 그런 사람의 달콤한 말에 속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2:16 말씀에 이르기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4:5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7:9~10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외적인 행실들뿐 아니라 내면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다 익히 알고 계시므로 하나님을 감히 속일 자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주 기도하기를 자기의 내면을 하나님께서 살피사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은혜를 구하곤 했습니다. 시편 19:12~14 말씀에 이르기를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항상 정직하게 보여드리고 가식없이 진실하게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자, 참회하기를 힘쓰는 자가 됩시다. 그리할 때에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주님의 자비를 얻을 것이며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심령에 성령이 인도하시어 영원한 길로 인도함을 줄곧 받는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더 가르쳐주는 주님의 교훈은 회개의 수단, 구원의 수단이 특별한 이적과 기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부자가 낙원에서 풍성함과 넉넉함과 안식을 누리는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내어 물 한 방울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주기를 청하였으나 거절되자 그는 자기의 지상에 있는 다섯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지옥에 오지 말라고 전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 표상된 하나님은 그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지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 곧 성경이 있기 때문에 그 성경의 교훈을 들으면 족하다고 가르쳐줍니다. 부자가 항변하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살아가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자기 형제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라고 강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하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특별한 이적, 믿음의 기적, 어떤 황홀한 강권적인 역사만을 기다리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나직하게 현재의 순간에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길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주의 종을 통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강론, 혹은 우리 마음의 양심의 소리, 혹은 가까운 가족들과 이웃들의 소리, 이웃의 하소연, 걸인의 구걸의 가련한 요청의 소리, 때로는 매스컴에서 전해져 온 고난 중에 있는 자의 슬픈 하소연, 눈물, 우리 마음 속의 감동 등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 기적과 이적보다 더 자주 하나님이 쓰시는 회개의 수단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 내세의 삶은 곧 지금 오늘의 우리가 자그맣게 조용히 우리 마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세의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오늘의 현재의 우리의 삶의 기회를 얼마나 선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시간, 건강, 지위, 재능, 시간, 재물 등을 내 자신만을 위하여 움켜쥐고 아끼지 말고, 기꺼이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하여 역량껏 마음의 감동을 따라 사용하십시오. 그것들이 우리가 반드시 맞이할 그 죽음의 그 날에 우리를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