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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볼리 빌라 아드리아나. 황제 아드리아노가 원정 다니며 인상 깊게 본 장소들을 이곳에 재현했다. 사진은 이집트 카노페의 세라피스 신전. |
그리스도가 최초의 크리스천이 아니고 마르틴 루터가 최초의 루터란(Lutheran)이 아니란 말이 있다. 좀 다르지만 많이 비슷한 맥락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최초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었다. 로마가 세워져 소위 로마인(Romani)이란 분류가 생기기 전 이탈리아 반도에는 이미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켈트인은 알프스 이북과 같은 고올(Gaul)족이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중원에는 이탈리아 특유의 다양한 인도·유럽계 종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교적 알려진 에트루스키(Etruschi, 영어로 에트루스칸)나 라티니(Latini) 말고도 사비니(Sabini), 팔리스키(Falisci), 볼스키(Volsci), 에르니치(Ernici), 피체니(Piceni), 산니티(Sanniti) 등등이 그들이다.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얘기다. 이들 다양한 종족의 생활 터전이 대개 오늘의 라치오주(Regione di Lazio, 수도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 일대였다. 라치오(라틴어로 라티움·Latium)라는 명칭 자체가 라틴족(Latini)의 땅이란 의미다. 나중에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세계어로 발전하는 라틴어는 많은 이탈리아어 계통의 부족어 중 하나이던 이들 라티니의 말이 체계화된 것이다. 이들 다양한 종족은 대개 BC 700년에서 500년경까지 그들이 살던 지역에 나름의 자취를 남긴 뒤 그 역사적 존재를 마감한다. 속속 로마에 흡수되어 BC 3세기 중반 팔리스키의 로마 복속을 끝으로 모두 로마인이 되는 것이다.
로마에 영향을 준 에트루스키
이 중에 에트루스키의 경우는 특별하다. 고대 로마보다 500년이나 앞서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탈리아 반도의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다. 라치오의 해안지역과 토스카나 일대, 그리고 움브리아와 로마냐 일부(볼로냐, 라벤나 등)까지 아우르는 영역이다. 통칭 에트루리아(Etruria)로 불린다.
이들은 나름의 표기수단(알파벳)부터 건축양식, 생활문화, 사회조직, 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문명이라 부를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고 뒤이은 고대 로마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당연히 로마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에트루스키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축성술, 금속제련술, 하수처리시설 등에서 연락(宴樂)문화, 프레스코 그림, 점복술(占卜術)에 이르기까지 하나 둘이 아니다. 수도교(aqueduct)나 개선문에 필수인 아치(arco)도 에트루스키가 처음 만들었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을 영접하는 개선행진 자체가 이들의 고안(考案)이다. 고대 로마 초기 왕정시절의 역대 왕 7명 중에 에트루스키가 세 명이었다. 어찌 보면 고대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계승 문명이랄 수 있을 정도다.
로마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그 외항(外港)격인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시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트라야노 황제 때 오픈한 로마의 2천 년 관문인데다 그 이름 자체가 ‘고읍’이란 뜻이어서 숨은 볼거리들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애용구(愛用句) ‘스탕달 신드롬’의 스탕달(Stendhal·1783~1842)이 만년에 프랑스 영사로 주재하며 대표작 《파르마의 수도원》을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시장의 설명은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 반반이었다. 치비타베키아가 본래 기능적 측면(로마의 보급창구) 위주로 발전해 별다른 역사적 유산이 없던데다가, 2차 세계대전 끝 무렵 바로 그 ‘기능’ 때문에 연합국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되어 남아난 것이 없이 되었다는 얘기다. 대신에 에트루스키의 본거지 중 하나인 타르퀴니아(Tarquinia)가 지척이어서 고분 단지와 박물관 방문을 주선해 두었다는 것이다. 스탕달도 에트루스키에 대한 관심으로 타르퀴니아를 수시로 방문해 고고학 취미까지 얻었었다고 귀띔해 준다. 이렇게 시작된 에트루스키와의 만남은 유럽고대사와 지중해문명사의 흥미를 배가시켜 주었다.
유럽 古代史의 시작
에트루스키가 이탈리아 땅에 자리 잡은 배경에는 트로이 전쟁(기원전 1193~1183)이 있다. 트로이 전쟁은 여러 면에서 한 시대를 마감짓고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유럽사의 큰 매듭이다. 이 전쟁을 끝으로 당시 유럽 문명의 중심이던 지중해의 판도에 큰 재편(再編)이 있게 되고 유럽사는 고대전사(前史)에서 고대사로 넘어오는 것이다. 한데 뒤섞여 있던 전설과 역사가 대개 이 전쟁을 끝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로 접어드는 것도 대략 이즈음이다. 대륙세력의 상징이던 히타이트가 기울고 페니키아와 그리스가 해양세력으로 일어서며 종족들의 대이동을 선도하는 것이 바로 이 어간이다. 에트루스키도 이즈음 소아시아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머지않아 그리스 사람들은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광역 식민지(Magna Graecia)를 개척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이 모티아(시칠리아섬), 카르타고를 거쳐 이비차, 말라가에까지 해상 교역로를 확대한 것도 같은 무렵이다. 페니키아는 원래 티레와 시돈(Tyre, Sidon·지금의 레바논)이 근거지였다. 그때까지 필로스-미케네-트로이-밀레토스-로도스섬-크레타섬으로 둘러싸인 에게해가 전부이던 세상을 소아시아에서 남부 스페인에 이르는 전 지중해로 확대한 것이다. 지중해의 중심이 크게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탈리아의 연안지역이 비로소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때 이탈리아의 핵심 세력이 에트루스키였다. 로마와 아테네는 아직 있기 전이고, 트로이 전쟁의 전말을 오늘의 우리에게 소상히 일러준 시인 호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