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5. 법정소란 재판거부로 법무장관과 서울대 총장 전격 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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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장관의 경질에는 미문화원 사건을 둘러싼 검찰과 안기부의 갈등이 작용했다. 안기부는 학생들이 사용한 ‘민중’이란 용어에 대해 “특정 계층의 연합 개념으로 이른바 계급투쟁의 전제 개념에 해당되기 때문에 관련자들 모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검찰은 주동자인 함운경에게만 이를 적용해 기소했다는 것이다. 또 김석휘는 국회에서 삼민투가 사용한 민중이라는 용어가 좌경적 계급용어인지 감상적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 계속 검토해야 한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강경한 안기부가 온건한 법무장관을 못마땅해 하던 차에 법정소란이 발생하자 전두환이 안기부를 확실히 밀어준 것이다. 안기부의 공판 대책 보고 법정소란이 법무장관의 경질로까지 비화하자 법원과 안기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안기부의 <농성사건 공판 대책보고>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법원은 민정당 난입농성 사건 공판에 이어 다시 “극렬한 법정 내 소란”이 발생하자 이를 “향후 법정의 존엄성과 질서 유지의 분수령적 계기”라고 판단하고, “대법원장의 진두지휘 하에 법원행정처장, 대법원 비서실장, 서울형사지법원장,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등이 수시 대책회의”를 했다. 법원은 “법정은 법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기본 방침 아래 “어떠한 경우에도 법정의 권위와 질서 유지를 위해, 자체적으로 강경 대처, 원만한 공판을 진행할 방침”을 세우고 “가급적 공판 진행절차, 조치계획 등은 법원 및 재판부에 맡겨달라는 입장”을 취했다. 안기부는 서울형사법원장이 “상부에 1회 공판 중간보고 시 피고인 및 방청객 등 계속 소란 자행 시는 부득이 경찰권 개입요청도 불사하겠다는 소신”을 개진했다고 덧붙였다. 안기부 보고서는 이어 이재훈 재판장에 대해 자세한 신원사항과 함께 ‘법조계 평판’이란 항목으로 “온순단정, 국가관 확고, 방침 결정 시 강력하게 추진하는 성격 소유자”라고 기술했다. 보고서는 “금번 재판에 대한 자세 및 태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미문화원 농성사건 공판이야말로 향후 법원의 권위가 법정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느냐의 시금석 재판으로 인식 △법정경찰권 소송지휘권의 소신 있는 행사로 강력한 법정질서 유지 표명 △1회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 및 방청인의 소요, 소란으로 휴정 후, 형사지법원장, 수석부장판사에게 강력대처 방침을 개진하였으나 오히려 상사들이 금회 공판만은 인내하도록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함 또한 2회 공판기일을 애초 방침과 달리 2주 후로 지정한 것에 이렇게 분석했다. △피고인 변호인단이 피고인과의 충분한 접견 기회가 없어 변론 준비를 못하였다고 주장, 연기 신청을 해옴에 따라 △일단 변호인 등의 일부 주장을 받아들여 향후 강경대처방침 명분을 세우기 위한 조치이나 △앞으로는 애초 방침대로 매주 월요일 공판 진행, 8월 중으로 1심 공판 종결 복안임 재판장의 유례없는 훈계문 이재훈이 1차 공판에서 벌어진 법정소란으로 휴정했을 때 법원장 및 형사수석에게 강력대처 방침을 개진했던 사실을 확인한 안기부는 “재판부의 성향 및 자세는 전혀 문제점 없는 것”으로 평가했다. 실제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재훈은 법정소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방청객을 제한하고, 피고인을 분리심리하며 주 3회씩 공판을 진행해 빠른 시일 내에 재판절차를 끝내기로 하는 등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재훈은 재판 진행과정 중 학생들이 ‘광주학살’을 자주 언급하자 이를 ‘광주사태’라 바꾸도록 훈시했는데, 변호인 중 한명이 앞으로 나와 손짓을 해가며 강력히 항의하자 어디다 삿대질이냐며 퇴정을 명했다. 7회 공판에서는 재판부의 잦은 제지에 피고인들이 항의하다가 12명 중 9명이 퇴정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재훈은 변호인의 반대 신문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사실심리의 종결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변호인들은 재판부가 실질적인 공개재판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2일의 선고법정에서 이재훈은 극히 이례적으로 판결문 이외에 장문의 훈계문을 낭독했다. 훈계문은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는 법언을 깬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 훈계문에 대해 <조선일보>조차 “자기 주관 및 사상을 지나치게 공표함으로써 이 사건을 대하는 재판부의 선입견과 예단을 스스로 드러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평했다. 재판이 끝난 뒤 안기부는 ‘미문화원 담당판사 격려 방안’을 모색했다. 안기부는 재판장과 배석 판사 등 3인의 판사에 대한 격려방안으로 해외여행 또는 격려금 지원 등을 검토했다. 꼭 이 격려방안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재훈 부장판사는 재판 종료 약 1년 뒤인 1986년 12월3일부터 23일까지 제도 시찰을 명목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꾸지람 듣는 법관들 <중앙일보>는 거리시위를 하다 구속 기소된 한 여학생이 “그 어렵다는 고시에 합격하시고 법대 위에 높게 앉아계신 판검사님들은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라며 “하루속히 참회하고 민주화 대열에 동참하라”라고 판사와 검사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광경을 보도했다. 주객이 뒤바뀐 법정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고 한다. 이 학생은 매우 점잖은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재판장에게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어떤 학생들은 분리대를 넘어 법대를 향해 돌진하기까지 했다. 방청객들도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에 동참했다. 부천서 사건 공판 때는 구속 학생의 어머니가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장에게 던졌다가 법정모욕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도 법정소란으로 구속되는 등 법정모욕으로 실형을 선고받거나 감치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만 갔다. 재판부의 재판 기피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