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의 3월
정 태 갑
삼월 하순 대구 사는 친구에게서 봄나들이 겸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동대구역으로 마중 나온 친구는 ‘3.1만세운동길’과 선교사 주택이 있는 언덕으로 나를 안내했다.
‘3.1만세운동길’은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 운동 참가자들이 만세를 부르기 위해 통행했던 길로, 옆에는 만세 운동에 관한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 눈여겨보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내 한 몸의 안위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분들의 삶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언덕 위 서양식 주택 세 채는 대구에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살았던 집인데, 지금은 선교 박물관, 의료 박물관, 교육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이 얼마나 먼 나라인가. 바다 건너 낯선 땅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병원과 학교를 지은 열정에 감탄하며 고풍스러운 집 여기저기를 유심히 살펴본다.
선교사 주택 앞 정원에는 1899년 미국에서 들여온 서양 사과나무의 손자뻘인 자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과나무 삼세 목은 공간적으로 미국과 한국,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상징물 같아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이 곡을 짓고, 노산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 ‘동무 생각’ 노래비는 이 언덕을 단번에 낭만적인 장소로 변화시킨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라는 가사가 새겨진 노래비 앞에 서면,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짝사랑 이야기를 떠올릴 법하다. 노래비에는 노랫말과 함께 이곳이 ‘청라언덕’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를 본 순간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기뻤다. 가끔 대구 도시 철도를 타고 ‘청라언덕역’을 지날 때 ‘역 이름이 참 정겹다. 청라언덕이 어디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기에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름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은혜정원’은 이곳에 살았던 선교사들과 그 가족이 묻힌 곳이다. 도심 속의 묘지, 게다가 외국인 묘지는 나에게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묘비를 보는 중에 일제강점기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뼈를 묻었을 독립운동가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선교사와 독립운동가는 목적은 다르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타국에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올린다.
언덕에 활짝 핀 목련 꽃은 결혼식장 신부처럼 뭇사람의 시선을 끈다. 청라언덕의 목련은 내가 보아온 어떤 목련보다 크고, 희고, 탐스러웠다. 하얀 목련을 보면 봄의 기쁨과 함께 아련함이 피어난다. 언덕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이 목련을 그냥 지나치는 무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듯하다.
친구와 뜻깊은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온 후에도 청라언덕에 대한 좋은 느낌이 오래 이어졌다. ‘청라’도 좋고 ‘언덕’도 좋다. 청라언덕의 ‘청라靑籮’는 ‘푸른靑 담쟁이籮’라는 뜻인데, 미국에서 가져온 담쟁이가 선교사 주택을 뒤덮자 주민들이 청라언덕이라 불렀다 한다. ‘청라’라는 발음이 맑고 경쾌한 데다 담쟁이여서 더욱 친근감이 생긴다. 짧은 머리에 교복 입고 공부하던 시절, 온 교실 벽을 타고 높이 오르던 담쟁이가 생각난다. 담쟁이 푸른 잎은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고, 붉게 물든 잎은 도시 한복판에서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담쟁이가 없었다면 교정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내 기억 속의 언덕은 아늑하고 평화롭다. 어릴 적 살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언덕이 있었는데, 언덕 중간쯤에서 아이들과 나뭇가지 꺾어 놀던 기억이 난다. 언덕 위 성당에서는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에 종이 울렸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했다.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면서 떠올리던 고향 언덕의 종소리가 연상되었다.
성당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사백여 미터 가면, 정면 4칸, 측면 3칸 누각이 있다. 누각 아래는 시내가 흐르고, 그 너머로 들판이 펼쳐지며, 들판이 산과 가까워지는 곳에 철도와 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누각에서 앞을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
언덕은 이런저런 일로 머리가 복잡하거나 딱히 할 일이 없어 무료할 때, 또는 친구나 연인들이 속마음을 나누려 할 때 가기 좋은 장소인 것 같다. 언덕은 고요하고, 언제나 거기에 있고, 어느 때에 가더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청라언덕에 만개한 목련 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언덕, 내 인생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언덕,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언덕을 내년 봄에도 오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