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달과 메밀꽃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한국문학단편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이라는 곳이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이다. 현재 봉평에는 이효석 문학관이 있고, 이효석 생가도 있다. 다만, 이효석의 묘는 현재 파주시 실향민 묘역인 동화경묘공원에 묻혀 있다. 그 이유는 평창에 묻혔다가 도로공사로 인해 옮겨야 했는데 부친이 함흥이라는 이유에서 파주로 이장을 했다.
이효석(1907.2.23~1942.5.25)은 36세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작품으론 <노령근해>, <수탉>, <분녀>, <산>, <메밀꽃 필 무렵> 등이 있다.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유진오와 함께 꼬마수재라고 불리어졌으며 동반자 작가 활동과 구인회 활동도 했다. 동반자 작가는 공산주의 혁명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문학경향을 가진 모임이고, 유진오,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등이 있다. 구인회는 계급주의,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쓰자는 의미에서 9명의 작가들이 조직한 동인회이다.
그 중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단편 작품 중 백미로 손꼽이고 있다.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 달밤의 메밀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순박한 본성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허생원은 곰보에 왼손잡이로 봉평장, 대화장, 충주 제천, 영남 지방 등 강원도 산간마을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다. 허생원은 충주집에서 만난 장돌뱅이 동이와 조선달 함께 대화장을 가고 있다. 허생원에게는 반평생 같이 지내온 짐승 나귀가 있는데 같이 주막에서 잠도 자며 이십 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허생원에겐 나귀가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이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라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쓸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준다.(p.298)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했던가. 저 꼴체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 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p.305)
달밤 아래 나귀에 짐을 싣고 걸어가며 허 생원은 친구 조 선달에게 자신의 첫사랑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조선달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지만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허생원은 가난한 성서방네 딸과 물레방앗간에서 하룻밤 보낸 이야기하며 “첫날 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p.302)라고 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조선달은 “수 좋았지.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나지...(p.302)”라며 맞장구를 쳐준다. 둘도 없는 동료사이다.
-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 발끈 뒤집혀 고작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생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다.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꿔먹은 자리야. 첫날 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p302)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아.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나지...... 그러나 늘그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도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고 식구들을 부르겠어.(p302)
허생원의 이야기를 들은 동이는 자신의 얘기를 꺼낸다. 동이는 아비얼굴도 모르고 자랐고, 의부아버지의 폭력에 열여덟 살 때 집을 나와 장돌뱅이가 되었다는 사연을 듣게 된다. 허생원은 동이 모친의 친정이 봉평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개울물에 빠져 동의의 등에 업히게 된다. 이때 동이의 채찍이 왼손에 있는 것을 보게 되고 허생원은 동이가 자신의 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일 대화장을 보고 제천으로 간다고 동이에게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허생원은 조선달에게 “옛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p.302)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소설은 허생원과 동이엄마는 어떤 사이일지 추측해보게 만든다.
-“그래 모친은 애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오려고 생각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랫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p.305)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어둑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p306)
달이 너무나 밝았던 봉평, 곳마다 모밀밭이어서 산허리가 왼통 꽃이 소금을 뿌린 듯히 숨이 막힐 정도였던 그날, 허생원과 가난한 성서방네 딸은 물레방앗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헤어지는데 과연 동이는 누구 아들일까. 장터에서 만난 젊은 장돌뱅이 동이도 고향이 제천이고 아비얼굴도 모르고 왼손잡이다. 허생원과 둘 사이가 혈육이라는 암시가 드러난다. 달이 너무 밝아 옷을 벗기 위해 들어갔던 물레방아간. 그곳에서 동네 제일 예쁘기로 소문난 성서방네 딸이 울고 있을줄이야. 달빛에 우는 처녀를 달래며 둘은 보름달 같은 사랑을 나눈다.
<메밀꽃 필 무렵> 자식이 있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산 허생원의 하룻밤의 사랑도 그려지지만 소설의 시간적 배경도 겨우 하룻밤의 이야기다. 하룻밤동안 하얀 메밀밭을 지나면서 아들을 찾는 과정, 평생 잊지 못하는 하루를 기억하며 장돌뱅이로 살았던 순박함이 처연하다. 몇 장 안 되는 짧은 소설 속에 깊은 사건과 한 인간의 역사가 그려져 있다. 떠돌이 장돌뱅이의 마지막 삶은 다행이다. 혈육을 찾았고, 평생 잊지 못할 하룻밤의 사랑을 찾았기 때문이다. 허생원의 몸과 마음이 둥실둥실 가벼워졌으리라...만남과 헤어짐, 그리움의 세월은 이렇게 애처럽다. 평생 허생원에겐 첫사랑이었던 그 하룻밤을 잊지 못해 평생을 떠돌다 만난 동이. 그리고 내일을 기약하며 만날 성서방네 처녀. 소설은 한국의 미를 듬뿍 안겨주는 빼어난 수작이다. 필사와 일독을 권한다.
<서평-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