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돌아 흘러오는 물, 지나 가버리는 물
법사: 덕현스님(前길상사 주지)
누군가의 삶은 그 사람이다. 그의 사람됨이요, 그의 전 우주다. 다시 말해, 그의 모든 것이다.
어떤 경위에서든, 혹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누군가의 생애를 떠올려 생각하거나, 누군가가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해 아련한 눈빛이 되어 가슴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갑자기 그에게 녹아든다. 별 노력 없이도 마음을 다 기울여 그에게 몰두하고, 물이나 바람 따라 흐르듯 그의 회상과 현존을 얼떨결에 따라간다. 그가 지나온 시간의 감회가 내 가슴속에서도 하나의 강물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만큼 이 생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 만난다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엄중한 일이다.
너나없이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삶을 누군가와 같이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서로 서서히 동화되어 언젠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가는 길일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언제까지나 자신만의 고독한 정체성을 분명히 견지해야 할지라도. 서로 마음을 열어 닿고 겹치고 그림자를 드리워 더욱 선명하고 다채로운 서로의 색깔을 지니게 되는 일일까?
강원도 산골에도 온화한 봄바람이 돌배나무 가지마다 흰 꽃송이를 터뜨리던 날, 법정스님께서 노년을 홀로 보내셨던 수류산방에 갔었다. 물가에 오래 앉아있으니 바위를 돌아 흘러오는 물이 가신 분과 남아있는 자의 침묵 을 적셔왔다. 그야말로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의 정한靜閑이었다.
‘수류산방水流山房’의 ‘수류’라는 두 글자는 중국 당나라 때 소동파의 제자 황산곡의 시, ‘만리청천萬里靑天 운기우래雲起雨來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에서 빌린 것이라고 한다. ‘만 리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 내리네. 빈 산에 사람 없는데 물 흐르고 꽃은 핀다.’
법정스님! 그분은 어떻게 살았고, 한때 우리가 그분과 함께 같은 땅 위를 살았던 의미는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어떻게 그분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대하고 함께하고, 그리고 작별해야 했었을까? 내가 과연 그분을 모시고 살았다고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처음 스님 가까이에서 지내던 햇중 시절, 산내의 어른스님 한 분이 은사스님을 뵈러 왔다 가면서, 시봉이라고 하는 내가 어설퍼 보였던지 한 마디 하셨다.
“스님 잘 모셔라.”
의례적인 당부말씀 같아서 대수롭지 않게 “네.” 했더니, 그분은 가시다가 선승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나를 돌아보면서 다그쳐물으셨다.
“그래, 어떻게 하는 게 스승을 잘 모시는 것이냐?”
나는 갑자기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질문도 화두처럼 말문을 막히게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바람에 그 물음은 몇 십 년 내내 빠지지 않는 화살처럼 나의 뇌리에 꽂혀있었다. 아마 지금도…….
세월 지나면서 터득한 사실 하나는, 그런 질문은 당장 둘러대어 대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놓치지 않고 묻고 묻는 것이 차라리 좋은 태도이며, 답은 그 질문이 속에서 뚜렷할 때 순간순간 살아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니, 처음 나를 제자로 받아주시기를 청하던 자리에서 은사께서 던지신 질문도 비슷했었다.
“왜 중 되러 왔어?”
그때도 나는 입이 붙어버려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질문은 왜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 하느냐, 왜 나를 스승으로 삼아 불제자로서 새 이름 지어 받기를 바라느냐는 무겁고 무거운 물음, 막 출가하러 온 사람이 결코 감히 입을 댈 수 없는 질문이었다.
때로 사람들은 남은 제자에게 찾아와 이미 타계하신 스승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우리가 깨닫기 전에 어떻게 타인을 알 수 있겠는가? 아무리 오래 모든 것을 함께했다 해도 스승도 타인은 타인이다. 스스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인 스승을 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제자가 스승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근본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제자로서 스승을 시봉하는 도리가 결코 스승이 누구인지를 재어 알아보고,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이러쿵저러쿵 나불대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말짱 허망한 분별일지도 모르므로. 그렇다고, 어리석게 호가호위狐假虎威하거나 반대로,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추앙하거나 스승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데도 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모시고 살며 진실 되게 배우고, 스승의 그늘에서 자기를 키우기보다는 차라리 버려 스승의 모든 것을 그 빈 그릇에 담아, 결국 스승과 같아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이 어떤 분인가는 어쩌면 이차적인 문제이다. 아무리 유명한 분이고 대단한 명망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내가 혹 잘못 알았을 수도 있고, 밖에 잘못 알려졌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스승과 같아진 다음에야 스승이 어떤 분인지를 비로소 제대로 알 것이며, 판단은 그때 가서 해야 한다. 그때 스승이 완전하지 않거나 성에 차지 않는다면 제자는 스승을 버릴 수도 있다. 기본을 갖춘 훌륭한 제자라면 불완전한 스승을 버리고 떠난 그 구도의 길에서 궁극에 참으로 얻어야 할 것을 얻게 되며, 도리어 돌아와 애초의 스승을 제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라도, 내가 스승을 어떤 마음으로 모시고 살았는가는 스스로조차 속일 수 없는 엄연한 진실이며 각자에게 참으로 소중하다. 그것은 내 삶의 일부이며 마침내 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어떤 스승이든 바르게 잘 모시고 살다보면 마침내는 구도의 길에서 완전한 스승을 만나게 되고 그 결과, 이전의 어리석고 한심한 자기를 탈피하여 ‘무아’에 이르게 되며, 끝내는 자타의 미망이 사라진 모두의 하나 됨이야말로 진정한 나임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절에 들어와서 사는 동안 새로 익힌 몇 가지 말들은 밖에서와 발음 또는 그 쓰임새나 함의가 달랐다. 그 중의 하나가 누구를 ‘모시고 산다.’는 표현이다. 스님들은 스승이나 어른스님만 모시고 산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도반이나 손아랫사람도 모시고 살고, 재가자도 같이 지내게 되면 모시고 살며, 대중 전체를 모시고 산다고 말한다. 모시고 사는 게 시봉侍奉이다.
구도의 길에서 제자가 먼저일까, 스승이 먼저일까? 이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알쏭달쏭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제자가 먼저다. 단언컨대 바른 제자의 마음이 먼저 일어나 스승을 찾고, 그때 비로소 법계의 감응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나타나 제자를 교화하는 것이다. 어버이보다 자식이 먼저이고, 형이나 누나보다는 동생이 먼저다. 자식을 낳아야 어버이가 되고 동생이 생겨야 비로소 형이나 누나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호적이 가족관계를 증명하듯이 승적이나 호칭이 사제관계를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도를 배우는 길에서만큼은 목숨을 걸 만큼 질직해야 한다. 제자가 먼저 배움이 담길 진실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기를, 그리고 끝내는 법계의 뭇 생명을 무지의 목마른 고통으로부터 건지려 한다면.
혼돈의 시대, 스승 없는 시대를 통탄하기에 앞서, 우리 하나하나가 제발 바른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곁에 오신 스승을 정말 잘 모시고 실답게 배워야 한다. 이는 사람다운 사람의 일이다. 이상세계란 모두가 서로를 온전한 스승으로 잘 모시고 사는 세상일지 모른다.
대답해 보라. 법정스님이 정말 그대의 스승인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법정 스님) 스승 제자사이건 또는 연인사이건 또는 부부사이건 한집에서 한도량에 살더라도 뜻이 같지 않으면 그건 십만 팔천 리에요. 뜻이 같아야 한 가족을 이루고 한 가정을 이루고 또 한 도량을 이룹니다. 불타 석가모니와 우리 사이는 시간으로 이천오백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 놓여있습니다. 또 인도와 우리나라는 거리가 수만리 떨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일상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살아있는 교훈은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이천오백 년 전 어떤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대중에게 한 설법이라 하더라도 그 교훈이 살아있다면 지금 바로 현장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죽은 교훈은 <과거완료형>이에요. 이미 과거로 끝난 겁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교훈은 늘 그때 그 모습으로 현재진행하고 있습니다.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곧 법을 본다.” 이 가르침을 깊이깊이 새겨두기 바랍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나는 늘 함께 한다.” 그래서 이 날이 단순한 부처님 오신 날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순간순간 부처님이 우리 앞에 오시는 날이 되어야 우리가 진정한 불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신 날로 그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우리 앞에 늘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깨어있다면, 평소 부처님 가르침, 경전을 그대로 수지독송하고 있다면, 그런 교훈이 몸과 마음에 배어있다면, 부처님과 우리 자신은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 여러분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9년 5월 5일 [출처] 법정 스님/부처님 오신 날 법문 中 발췌 |
<덕현스님의 수행공동체 법화림 소개) - 주소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덕호로 335-14 - 사이트 : (beophwadoryang@daum.net) : 법문 동영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