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윤원형 정난정 묘지 답사
파평윤씨(坡平尹氏)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墓域)을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산4-20번지
*3호선 대화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15번을 타면 17번째 버스정류장이 당하리다.
정거장 눈앞에 해병대 컨테이너가 있고 곧 굴다리가 있다. 굴다리 건너지 말고 좌측으로 가면서 개울을 따라 가면 또 굴다리가 나온다. 우측 길로 계속가면 파평윤씨 교하향사가 나온다.
*3호선 독립문역이나 홍제역 부근에 교하읍 당하리가는 567번 버스가 있다. 약 2시간 걸린다.
파평윤씨(坡平尹氏) 묘역(墓域)은 경기도 기념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 묘역을 찾기 전에는 윤원형과 정난정에 포커스(focus)를 두었다. 그러나 이 묘역을 현지 답사하면 새로운 유적지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은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교하종중(交河宗中)의 선산(先山)으로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의 묘역 96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한 종중의 묘역이 연대별로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묘역의 역사적 자취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이곳 묘역에 있는 각종 석물(石物)이나 묘비(墓碑)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 시대별 특징과 역사적 미술적 복식(服飾)적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선시대 한 종중의 분묘 특징이 한곳에 집중되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묘역이 너무 넓어 96기의 묘를 하루에 다 답사 할 수 없어 윤원형의 아버지 윤지임을 중심으로 답사한 내용이 이래와 같다.
이곳은 파평윤씨 15世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 내외의 묘와 그 아들 16世 사분(士昐) 사균(士昀) 사흔(士昕) 3형제의 묘와 19世 윤지임(尹之任) 내외의 묘와 20世인 그의 아들 5형제 원개(元凱) 원량(元亮) 원필(元弼) 원노(元老) 원형(元衡) 과 정난정(鄭蘭貞)의 묘다.
그 외 파평윤씨의 묘들이 있다.
*파평윤씨 15世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은 조선 제7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친정아버지다.
*윤지임(尹之任)은 조선시대 제11대 왕 중종의 두 번째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 의 친정아버지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1491~1515)는 세자(후의 仁宗)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일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일족인 윤임, 윤여필 등을 대윤(大尹)이라 부르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의 일족인 윤지임, 윤원형, 윤원로 등을 소윤이라 칭하였다.
결국은 윤원형이 8촌간인 윤임등 대윤(大尹)을 역모 죄로 모함하여 사사(賜死)하게 하고 정치적으로 소윤(小尹)이 승리한 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윤지임(尹之任)은 연안김씨와의 사이에 원개(元凱) 원량(元亮) 원필(元弼) 원노(元老) 원형(元衡)등 5형제와 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두었다.
딸인 문정왕후(文定王后) 덕분으로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으로 봉군되어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되었지만 인품이 졸렬(拙劣)하여 농번기에 매사냥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처첩(妻妾)을 빼앗는 등 행동에 절제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윤원형(尹元衡)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동생의 신분으로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을 계기로 대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되고 강음에 귀양 가서 죽었다.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이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이며 윤원형 일파가 대윤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이다.
벽서 내용은 〈과천 양재역(良才驛) 벽 위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했다.
현재 당하리 파평윤씨 교하향사를 관리하는 33세 후손에 의하면 윤원형의 후손들이 김포에 살고 있는데 윤원형이 죄인으로 자살한 것이 부끄러워 벌초나 제사를 지내러 오지 않는다고 한다. 드라마 “여인천하” 이후로 방문객이 늘어나 방문객의 발길에 의하여 길이 나고 벌초를 하고 묘앞에 술잔을 부어 올린다고 한다.
*정난정(鄭蘭貞?~1565)은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의 첩으로. 을사사화에 관여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부(富)를 축적(蓄積)하였다.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낸 후 독살하고 적처(嫡妻)가되어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받았으나 문정왕후가 죽은 뒤 사림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정난정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권력을 탐했던 조신(朝臣)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한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다고 한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이 사림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자 함께 갔으나 김씨 독살사건이 탄로 나자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그 후 본래 기생의 신분으로 환원되었다.
현재 사당을 관리하는 33대 후손의 말에 의하면 “여인천하” 드라마 이후로 정난정묘에 제사를 지내면 일이 잘 성사된다는 말이 돌아 방문객이 심심찮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필자가 답사하는 오늘도 제사 지낸 흔적이 있었다.
지난 2002년에는 이곳 파평윤씨 묘역 부근에서 430년된 출산한 아이와 같이 모자(母子)의 미라(mirra)라가 발굴되어 고려대학교에서 학술 연구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40분정도 걸리는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파평윤씨 5세조(世祖)인 고려시대의 명신(名臣) 명장(名將)인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장군 묘도 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