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호>
종이컵의 온도/ 김을현
오오래전
우연히 마주한 음악회에서
한바탕 시노래를 마친
이생진 시인에게
커피믹스 한 잔 뽑아드리자
호로록 호로록 마시고 나서
종이컵을 다시 주시는데
마치 온 마음을 주시는 듯
두 손으로 다시 주신 종이컵
내 책상을 데우는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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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종
눈물바람
쓸어내고
웃는
봄날을
풍금소리
걸음 따라
데려 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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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박행자
이제는 더 이상 졸라맬 허리도 없다.
평생 흙 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한
고단한 삶 속에서도
밤이면 흐릿한 호롱불빛 아래
한 땀 한 땀 사랑을 깁던 어머니
시린 손끝 부비며
끓인 밀죽도
자식 놈 먼저라
주린 배 다시 한번 졸라매고
쉬어 넘던 고개
모진 가난 끌어안다
등이 굽어버린
팔순(八旬)의 나이
이제는 오랜 세월에 무디어져
그 아픔조차 느낄 수 없는 지금
이제는 더 이상 졸라맬 허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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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땅바닥에 쫙 깔려있다/ 송영자
환호성이다
모과꽃 수줍은 듯 입술만 방긋
조팝꽃 흔들리듯 눈웃음 짓는다
벚꽃밭이 꽃비를 부른다
찾아온 사람들마다
봄나물 캐는 이야기를 짊어지고
노랑나비가 날아와서
강마을 풀밭에 내려앉으니
꽃들의 천국이다
봄이 땅바닥에 짝 깔려있다
아직도 배롱나무는 봄을 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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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쑥/ 윤수자
늘 그러했듯이
이 봄에도
이 봄만이
내 혼자의 것입니다
모두
진달래 찾아 떠나고
꽃진 자리 나 홀로 머리 곧추세우고
서 있습니다
향기로야 나만 할까요
이파리로야 나만 할까요
개쑥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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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가을 폭포(瀑布)/ 박홍원
폭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갈갈이 찢긴 아우성
풀어헤친 은실타래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와
사람들의 꿈빛깔이 어우러졌다.
본디 마음이 합하고 갈라지고
거기 때로 낙엽들이 끼어든다손
아랑곳없이 벼랑을 뛰어내리는 폭포는
성성한 백발 휘날리는
춘추마저 잊어버린 그냥 신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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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망울(비밀)/ 최재경
아직은
할 말이 없어라
툭 터지면
다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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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김형순
산에 산에 광목을 풀어놓았나
하얀 홑이불을 넣어 놓은 듯
봄 산에 겨울이 들었다
거짓말처럼 다시 겨울이다
너의 거짓말도 하얀색일까
하얗게 산을 덮는다
눈이 녹으면 싹이 올라오듯
거짓말이 녹으면
진실이 푸르게 돋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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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지 못한 마음/ 김혜숙
라일락 고운 꽃잎
물결로 흐르던 늦봄
임 소식 기다리다
밤하늘도 잠이 들고
바람에 꽃향기 떨어지니
그대인가 창을 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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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워치/ 노창수
요즘은 다소 큰 욕망이다
스마트워치를 사고 싶은
빠진다 홀릭 블랙 안드로이드 아이폰과 호환 블루투스 겸용 스마트
애플 시계 연결 가능 샤오미 핼로우 갤럭시 워치 등 3만 원부터 50
만 원까지 가격대 하빗 M9006-K로 할까 리뷰를 찬찬 읽다 옮긴다
29,212원 카드 혜택가 예비 줄도 택배 CJ 3일 후 도착 배송비 3천 원
별도 카테고리엔 엑세서리도 웨어러블 디바이스 하 많고도 많다 심
한 가슴앓이처럼 구부리고 핸드폰 안을 들여다본다 티브이에선 인
공위성 쓰레기가 넘친다는 한 로봇 연구자의 강의 스마트 워치 또
한 쓰레기가 될 건 뻔한 과거 버전이 지난 핸드폰이 서랍에 17종이
고 명화 복사판 릴 테잎이 시리즈로 카세트 가요나 영어 회화 테잎
이 60여 개 클래식 CD가 200여 개 박물관은 아니고 살다 보니 그래
엿과 바꾸어 먹을 수도 없다 코흘리개의 시절 마루 밑에 헌 고무신
짝만도 못한
놀랍다 바람에 날 듯한
나와 당신 곧 없어질
오만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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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손형섭
가을빛이 내려오는
수덕사 골짜기를
일엽 스님 뵈오려
찾아가 보았더니
일엽은
계시지 않고
단풍잎만 보여 준다
누구 하나 못 잊어 했던
청춘을 내던지고
홀연히 가신 뒤의
적막뿐인 법당 안에
당신의
목탁 소리만
가슴 속을 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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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과 나/ 이재설
나 보고 싶은 것만 보아주느라
애쓰는 안경에게 가끔은
너 보고 싶은 것만 보라고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들고
이리저리 두루두루 빙빙
세상을 돌려주고 나면
네 맑은 눈으로 보는 세상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는 알려 하지 않네
가끔은 너도 나를 눈감아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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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임경자
길을 걷다 보면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들이 있다.
나무
가로등
아파트
신호등
무릎 꿇지 않고서도
기도하는 저들
오늘 하루도 무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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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에 가면서/ 주전이
해안선 짙은 안개 걷힌 발자국 끌며
남녘 하늘 끝자락을 당겨본다.
옷섶을 파고든 삽상한 바람 한 줄기가
온몸을 던지던 유년 때 나무껍질 사이 지나
산새 한 마리 조각구름 되어 피어오르고
만덕산 송이송이 눈물 꽃 정열이
산길 가에 동백꽃 등불로 걸려
너는 너무 당당한 짧은 생애인데
강바람아 불어라 꽃물아 흘러라
선홍의 슬픔을 씻는 빗방울아
젊은 피가 돈다. 꽃잎 떨군 자리마다
푸석한 가슴에 비늘이 돋는다.
짧고 안타까운 석양 머리
말갛게 피 흘리며
서산은 어둡게 뭉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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