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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과 변함없이 사랑함
천 영 대
성경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4,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에베소서 6:24)」
주님께서 사랑하심
주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와 같은 자가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먼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그를 믿고 영접한 자들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여 주셔서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하심으로 그를 본받고 따르게 하신다. 베드로전서 2장 20, 21절에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삶을 살므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삶을 살므로 사람들로 그를 믿고 본을 받게 하셨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요한일서 4장 8∼10절에서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들을 위해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또 그러한 삶을 사셨던 주님의 역사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6∼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다. 주님의 사랑은 타락한 인간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데,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혹 있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비난받고, 정죄 받는 죄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증거하셨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으로 그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증거함과 아울러 그 사랑을 본 받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입으로만 사랑하지 않고 사랑의 삶의 본을 보여 주시고 그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요한복음 13장 34, 35절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랑하는 삶을 사셨다. 그리하고서는 주님께서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주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그가 먼저 사랑하사 본을 보여 주심으로 자신이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귀중한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사랑하시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일시적으로만 사랑하고 끝내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마태복음 5장 43∼48절에서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했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수도 사랑하고, 그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한 것처럼 행함으로 그와 같은 자가 되라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함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고 사랑하사 그의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주셨는 데,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또한 그를 사랑하고 위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서 7장 4, 5절에서는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의 역사로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는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함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 곧 주 예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셨다. 더 이상 죄의 정욕을 따라 사망의 열매를 맺지 않고 주 예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셨다. 로마서 14장 6∼8절에서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해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다고 했다. 또,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3∼15절에서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사 놀라운 일을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이러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 타락한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은 육신적이며,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것으로서 주님을 대적하며, 범죄하는 삶이며, 또한 멸망의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시는 주님께서는 더 이상 이러한 삶을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 복된 삶을 살게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위해 사는 것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죽으시고 부활하사 생명 주는 영이 되신(고전15:45),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건하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주님을 사랑하는 삶,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살 수 없다. 로마서 5장 5절에서는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또한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타락한 육신으로는 결코 주님도, 형제들도 사랑할 수 없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으로 역사하시는 그 영의 역사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고, 또 그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우리 또한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37, 38절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고 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사 그의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셨고, 지금도 그 영으로 사랑을 부어 주시고 있고, 또 사랑으로 강권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했다. 그 어떠한 것들 보다 주님을 제일 사랑하는 자만 주님께 합당하다고 했다. 주님 외에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르지 않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좇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멸망의 길이다. 요한일서 4장 19∼21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보이는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러한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에 대한 실행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는 주님, 사랑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뤄질 수 있다.
처음(썩지 않는) 사랑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은 처음 사랑, 곧 최고의 사랑, 제일 좋은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장 4, 5절에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했다. 에베소 교회에는 여러 가지 칭찬들을 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책망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했다. 여기서 처음 사랑은 제일 좋은 사랑을 말한다. 이 내용에 있는 ‘처음 사랑’이라는 것에서 ‘처음’은 누가복음 15장 22절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는 말씀에서 ‘제일 좋은 옷’의 ‘제일’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장 4절의 처음 사랑은 제일 좋은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놀랍고도 제일 좋은 사랑을 버린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책망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까지의 내용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편지는 성경 갈라디아서 다음에 있는 여섯 장으로 된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로 말할 수 있고, 두 번째 편지는 요한계시록 2장 1∼7절의 내용을 말할 수 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사도들이 활동 했던 주후 64년경에 말해졌지만 두 번째 편지로 말해지는 요한계시록 2장 1∼7절의 내용은 주후 90년경으로 말해진다. 첫 번째 편지로 말해지는 에베소서 6장 23, 24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했다. 먼저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 것을 말하고, 다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을 말한다. 이 내용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서 ‘변함없이’에 대해 ‘썩지 않는(incorruptibility 혹은 incorruption)’이라고 번역된 성경도 있다. 썩는 것은 변하는 것으로, 썩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변화하지 않는, 썩지 않는 사랑을 말했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처음 사랑 혹은 제일 좋은 사랑을 말했다. 두 편지를 대조해 보면 약 삼십년 동안에 에베소에 있는 교회가 하락된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에베소에 있는 교회가 변치 않는 사랑, 썩지 아니하는 사랑, 처음 사랑, 제일 좋은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다. 이것은 주님의 증거와 누림을 잃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 몸을 세우기 위해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할 것을 강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랑, 처음 사랑 혹은 제일 좋은 사랑은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서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이라고 했다. 이 절에서는 우리 주님에 대해 만세의 왕이며 썩지 아니하는 분이라고 했다. 만세의 왕이기 때문에 썩지 아니하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썩지 아니하는 분은 만세의 왕이시며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오는 것 또한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3, 4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셨는데 그 기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했다. 이렇게 썩지 아니하고 영원하신 주님께서는 그를 믿고 거듭난 자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5장 52∼55절에서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때에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살아 있는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죽고 썩게 될 것이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아니하는 몸을 입게 될 때에는 사망을 향해서도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던 자들이 그 때에는 사망을 향해서도 감히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죽는 것이나, 썩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창)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이렇게 새로운 몸을 입을 때는 죽는 것이나, 썩는 것이 없다고 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했다. 옛 창조물은 죽고, 썩지만, 새 창조물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영원하다고 했다. 곧, 주님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다. 우리 주님 또한 썩지 아니하는 분이시며,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딤전 1:17). 이렇게 보이는 옛 창조물은 잠깐 이지만, 보이지 않는 새 창조물은 영원하다고 했다. 로마서 8장 19∼25절에서는 “피(창)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창)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창)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했다. 옛 창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굴복케 하는 분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들은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믿는 자들도 몸의 구속, 곧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변화될 것을 바라고 있다고 했다. 믿는 자들이 현재 입고 있는 몸은 죽고 썩을 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아니하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몸, 신령한 몸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했기 때문에 참고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디모데후서 1장 9,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고 했다. 이렇게 영원하시고,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보이지도 아니하는 주님께서 새로운 창조로서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전 것, 옛 창조물은 끝내고 새로운 창조물이 나타나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옛 창조물만 알고 그것들을 추구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죽고, 변화되고 썩을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생명 주는 영이 되신 주님께서는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아니하는 새로운, 놀라운 것들을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해 두셨다. 할렐루야! 우리는 소망 가운데서 참으며 이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데, 그것은 육신적인 사랑이 아니고 제일 좋은 사랑, 처음 사랑, 썩지 않고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를 위해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고, 또 성령으로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신다. 우리는 옛 창조에 속한 것들, 죽고, 썩는 육신적인 것들, 세상적인 것들을 중히 여기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썩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는 주님과 그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창조물을 중히 여기고 관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