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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자네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금자
이번에는 순전히 서울구경하고 하루 즐겁게 놀자고 서울에 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목적은 가재골 교회동네에 사는 어르신이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병문안이 두번째 목적이구요.
이제는 버스타고 지하철타고 잘 찾아 다니는데도 홍대 근처에 사는
정옥언니는 길을 잃을까봐 아침부터 카톡에 전화에 문자에 열번은 더 했습니다.
안양에서 교수님도 만나고 범양님도 만나고 서울로 향했더니
조금 늦었습니다.
열심히 전화로 어디까지 왔나 물어 보는 정옥언니~
제 특이한 전화기는 어딜가나 눈길의 대상입니다.
대한민국의 유행과 젊은이의 거리의 상징인 홍대앞 사거리에서도
제가 전화를 꺼내서 받으니 눈길을 많이 받습니다.
전에는 숨겨 놓고 받았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습니다.
어딜가나 제 전화기는 다른이들에게 호기심도 주고,
즐거움도 줍니다.
남들이 잘 안가지는 형의 첨단스마트폰인데
수화기는 아날로그식 공중전화기의 수화기처럼 생겼으니
눈길을 끌만도 합니다.
그래도 요즘에 파란색으로 바꾸고 나서는 조금 덜합니다.
홍대언니와 함께 나오신 신도림에 사는 언니도 도시에서 나고 지금까지 사셨는데
이런 전화기는 처음 본다고 많이 신기해 하셨지요.
아마도 순박하게 생긴 시골아지메를 연상 했다가 갑자기 이런 요상한 전화기를
가지고 전화를 하면서 딱 만났으니 예상외로 많이 신기해 하셨지요.
그냥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썼으면 그러려니 했을 겁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친구와 카톡을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노신사분께서 엄청 궁금한 얼굴로 제 전화기를 훔쳐 보셨습니다.
제 별명이 친절한 금자씨가 아닙니까,
원래 시골에서도 외딴동네에 가면 동네어르신들이 지나가는 우리를 보면
궁금해하는 얼굴로 저이들이 왜 우리동네에 왔다 가는고?
누구네 집에 왔다 가는고?
뭐하러 왔다 가는고?
하는 얼굴로 따뜻한 양지쪽에 모여 계시면서 딱 그 노신사분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신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면 제가 차에서 내려서 저 안쪽 누구네댁에 사진을 찍으러 왔다든지
누구 심부름을 왔다던지 하고 시시콜콜 이야기를 해 드리면 좋아 하십니다.
왜 그것을 아는고하면 예전에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궁금해 하시는 걸
보았거든요.
그래서 그 노신사분 옆으로 가서 알려 드렸습니다.
전화는 요렇게 하고 인터넷은 이렇게 하고 카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실시간으로 이렇게 채팅처럼 하고.....
왜 이렇게 요상한 전화기를 쓰는지도 말씀드리고
우리집은 저 강원도 산골에 사는데 어떻고 저떻고
했더니 노신사분은 궁금한 것을 다 물어 보십니다.
가격은 얼마나 하고 한달에 얼마를 내고 전기가 없어도 인터넷을 어찌쓰는지
배터리충전은 어찌하는지 충전하면 얼마나 쓰는지....
다 말씀 드렸더니 정말로 고마워하시며 제 손을 덥썩 잡아 주셨지요.
그것이 너무나 궁금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디 물어 볼 때가 없으셔서 늘 궁금함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알게 해주니 너무나 고맙다고 하셨지요.
기왕 보여 드린김에 지난번에 다녀 온 호롱불켜는
오지마을도 보여 드리며 지금도 이렇게 사는 분들이 있다고
하였더니 정말로 신기해 하셨습니다.
저녁을 무엇을 먹겠냐고 물어서 산골에서 잘 못 먹는 것을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한 메뉴는 해물탕~
정말 맛있게 잘 먹었지요.
저녁을 먹고 북적이는 홍대앞을 구경했습니다.
저녁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른데도 이곳에 유명한 도우넛전문점이 있다고해서
데리고 가 주었습니다.
영화 보면서 먹으라고 맛있는 것으로 몇개 사 주었는데 영화 볼 때까지 못 기다리고
그 배부른 가운데서도 다 먹어 버리고 오는 날 다시 갔다는 겁니다.
퇴근한 친구은옥이 내외가 홍대앞으로 와서 합류했습니다.
은옥이네가 영화티켓을 끊어 주었어요~
기념사진 안 찍을 수 없겠지요.
저 뒤에 잔뜩 모여서 카메라를 대기 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뭔 가수를 보겠다고
저 난리입니다.
은옥이 이런데서 사진 찍는것 싫어라 하는데
워낙 사진에 죽고 사는 친구를 잘 아니 함께 사진 찍어 줍니다.
함께 본 영화는 -맨 온 렛지- 라는 스릴러 영화를 보았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는 오랫만에 흥겹게 본 스릴러영화 입니다.
친구와 함께 혹은 부부가 함께 영화를 보든 무엇을 하던
함께 하면 나눌 이야기가 많습니다.
자정이 넘도록 세 부부가 모여서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요.
이야기 다 끝나는 것 못 보고 저는 꿈나라로 직행합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정옥언니가 명동구경을 시켜 준다고 데리고 갔습니다.
서울에 오면 한가지정도는 서울에 유명한 곳을 구경하는데 이번에는
드디어 명동을 와 보게 되었네요.
남편은 만날 한번쯤은 명동에도 살아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꿈이 평생에 이루어 질지 모르겠어요.
아무튼지 생전 처음 온 명동에 와서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높고 높은 빌딩숲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요.
우리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어 대니까
일본사람인줄 알고 무엇을 주면서
일본말을 합니다.
한국사람이 뭐 그렇게 카메라 가지고
신기한 얼굴을 해 가지고 구경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처녀 때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는 정옥언니가
골목골목 설명을 해 주며 잘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이제는 어디가서 명동이야기를 해도 끼일수가 있겠어요.
저는 제가 해 보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아니면
잘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간곳은 명동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명동성당으로 갔어요~
문앞에서 구걸하는 어르신을 뵈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바디메오가 생각 났습니다.
저 분도 눈을 뜨고 뛰고 걷는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요.
과연 듣던데로 웅장하고도 아름답습니다.
건물이 주는 이런 경외감도 있더군요.
그것이 100년도 전에 지어 졌다고 하니 더욱 귀하게 보입니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선 우리가 개미처럼 작게 보입니다.
여기는 뒷면이에요.
이곳은 옆면이구요.
주일미사에 이 문이 열리는 걸까요.
동판으로 새겨진 부조들이 한참을 들여다 보게 해 줍니다.
1887년에 시작을 했다고 하니
120년이 지난 건물인데 얼마전에 지은것처럼
깨끗하면서도 세월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기중기나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렇게
높은 건물들을 돔 식으로 지을 수 있었을까요.
올려진 벽돌 하나하나,
조화로움 하나하나를 잘 살펴봄으로 제 마음에 경외의 마음을 표현해 봅니다.
안에 들어가니 더욱 더 성스럽습니다.
사진으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어떤 것들......
그 중에는 스테인드 글래스가 있습니다.
그 신비하고 고귀한 빛의 표현을 어찌 사진으로 담을 수가 있겠어요.
색도 너무나 곱습니다.
또각거리는 내 구두소리 때문에 저는 일찍 나왔는데 남편은 한참이나 있다가 나왔습니다.
사진정리를 하면서 보니 남편은 이 성당을 청소하시는 분의 사진을
열장쯤 찍어 왔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을 때 그렇게 신중을 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꾹 하고 찍고 시시콜콜한 것을 찍는 반면에 남편은 꼭 필요한 것 한 두장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사진은 왜 그렇게 많이 찍어 왔을까 궁금합니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님의 조형물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성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곳에서 결혼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 어디쯤인지 몰라서 인터넷으로 찾아 보는 중인데
어디인지 감을 못 잡겠습니다.
남편과 저도 기념사진 찍습니다.
정말 멋진 곳입니다.
성당을 나오면서 보니
여러가지 육포를 파는 가게가 보입니다.
맛 보고 좀 사가지고 왔습니다.
명동구경 잘 했습니다.
그 다음에 언니가 데려가 준곳은 전차가 전시되어 있는 곳입니다.
한 때는 이 전차가 서울한복판에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제 나이만 되어도 잘 모르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남편은 서울에서 살적에 엄마손을 잡고 이 전차를 탔던 기억이 난다고 하는군요.
늦어서 도시락도 못 가지고 간 아들에게 도시락을 건내주려는 엄마의 조형물이
정겹습니다.
글나라에서 읽은 적이 있는 -엄마 마중-이라는 동화에 보면
전차를 타고 오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가가 나옵니다.
한복을 입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리는 다섯살짜리 꼬마아기는 기관사에게
우리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어 보곤하지요.
그 글로 볼 때에 전차는 땡땡땡 소리를 내면서 달려 왔고
그것을 타려는 사람이 세우면 어디에서나 섰던 것 같습니다.
기관사가 타려는 사람과 이야기도 자유롭게 나누었던 것으로 보아서
높이도 길과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산골에 살았는데 어떻게 이 전차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
전차를 대하니 더욱 신기하고도 놀랍습니다.
우리집은 강원도 산골중에 산골에 살았습니다.
제가 결혼을 1984년에 했는데 그 당시에도 전기가 안 들어오고
몇년이나 있다가 들어와서 엄마를 위해 탈수기를 사놓고
전해 드리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엄마는 서울에서 시집을 오셔서 서울에 대해서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서울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지요.
겨울밤에는 강냉이 알갱이를 따면서 이야기를 들려 주시고
여름밤에는 마당에다 쑥으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별들을 보면서 영화이야기 서울이야기들을 해 주셔서
무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 주셨지요.
엄마가 그 당시에 들려 주셨던 이야기 중에 단연 제 호기심을 자극하고
꼭 보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 전차이야기였습니다.
전차의 생긴 모습 땡땡땡 소리를 내면서 서울시내를 달려 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신기하고 꼭 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엄마는 전차에 대한 노래를 불러 주셧는데
제가 전차를 탔을만한 분들에게 전차노래를 아느냐고
많이 여쭈어 보았는데 그 노래를 안다고 대답해 준 사람이
지금까지 한명도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차를 만나고 보니 그 전차노래는 분명
엄마가 지어낸 것만은 아닐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차 노래는 이렇습니다.
< 전차가 왔습니다 땡땡땡~
내리거든 타세요 차례차례로
나머지 손님은 다음오세요~>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엄마가 가르쳐 주신 이 노래를 많이도 불렀습니다.
친척들이 모이면 생각나지는 않지만 춤도 개발해서
추면서 불러서 자주 불려나와서 부르고 춤을 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궁금했던 전차를 직접 보게 되니 그 곁을 떠날 맘이 없습니다.
공부해 보고 알아 보아야 속이 시원하겠지요.
전차가 처음 생긴것은 1889년이라고 합니다.
전차를 놓게 된 이유는 고종황제께서 명성왕후의 능행을 위해
놓은 것이라고 해요.
고종황제는 나약했던 국력으로 국모 명성황후를 지키지 못 해
그의 참변을 안타깝게 여겨 청량리 홍능에 모신 명성황후를 자주 찾았는데
한 번 거동하는데 10만원 (당시 쌀 1.만섬의 값)씩 들어 고심하는 중에
전차를 놓고 타고 다니면 경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미국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나마나 인산인해 였겠지요.
마땅히 불릴 말이 없어서 쇠당나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희얀한 신문물을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도 적지안았다고 합니다.
화려하게 꽃단당을 한 황실 전용차와 귀빈차를 비롯,
8 대의꽃전차’가 외교관 및 고관대작을 태우고
서대문을 향해 움직였을 때 구경꾼들은 탄성을 연발했다고합니다
1899년 5월 4일 동대문앞에서 거행된 전차 개통식 광경
구경군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역사자료가 있네요.
이 사진들을 보면서 서민의 입장으로 그 당시에 있었을 일을 상상해 봅니다.
정부의 고관대작들과 귀족들은 한껏 멋을 부리고 시승을 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홀린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 보았을 거에요.
그날에 선로 주변에 군인이 300여명 순경이 250여명이 행여 사고에 대비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전차는 시속 8km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는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빠른 당나귀였을까요.
인력거나 자전거에는 견줄바가 아니었겠지요.
이날 이후 얼마간의 시간을 거쳐 일반인도 탈수가 있었답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땡땡땡 소리를 내면서 어느골목에서나 승객이 손만 들면
태워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운임이 정말 비싸서 어지간한 사람은 탈수가 없었겠지요.
구역에 따라 다르기는 했다지만 1889년에 5전정도 했다고 하는데
1930년대에 부산에서 운행한 전차기록을 보니까 어지간한 노동자
하루임금에 맞먹었다고 하니까 이때는 절대로 보통 사람들은 못 탔을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서울인구가 약 21만명이었는데
하루에 전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2170명에 달했다고 하니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상상이 갑니다.
그렇게 인기 좋았던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에 버스가 다니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없어졌는데 제가 1964년생이니 서울에 살았더라도
타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남편도 저도 전차에 대한 서로다르면서도 깊은 관심과 추억으로 한참을 구경하였지요.
다른나라에서는 지금도 전차를 운행하고 관광용으로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어느한구간 이 전차가 다니고 타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남편과 저는 마치 살아 있는 전차를 대하듯 대화도 해 보았지요.
덕분에 서로 나눌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전차에서 엄마를 잃어 버려서 지금도 생생이 전차를 기억하고 있는 남편
계속 빠이빠이~를 해 줍니다.
가재골 사람들과 만날 시간이 조금 남아서 다른 곳도 구경을 했지요.
다음 서울구경은 어디를 할지 모르지만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르신 문병을 위해 가재골에서는 한집에 한명씩 대표로 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승합차를 빌려서 모시고 올라 오셨지요.
함께 문병을 한 서울에 사시는 분이 우리모두에게 점심을 사 주시기 위해
병원 건너편 골목으로 우리를 데려 가셧습니다.
이 분은 가재골에 별장을 가지고 계시는데 여름에 주말로만 오십니다.
유명한 김치찜을 내셨는데 서울 같지 않은 기와집이 즐비한 골목길로 들어 가서
있는 집이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미리 예약을 하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김치찜은 보기보다 맛있었지요.
모듬으로 더 내주신 밥그릇의 역사가 정말로 오래 되어 보입니다.
이런 양은솥은 잘 닦아야 하는데 서울한복판에서 이런 그릇을 보니
반갑습니다.
이댁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하였다는데 예전에는
식탁에 벨이 없으니 이렇게 한쪽에다가 종을 울리도록 해 놓았었나 봅니다.
여기까지가 이번에 한 서울구경입니다.
구경한번 잘 했네요~
첫댓글 ㅎㅎ 언니 덕분에 좋은 구경과 공부도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