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릭 하멜을 아는 사람은 있지만 폰 시볼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사람의 공통점은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하멜은 한국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고, 시볼트는 그로부터 180년 후에 한국을 보다 체계적으로 서양에 알린 인물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강진과 인연이 깊다는 것이다. 하멜은 강진에서 7년 동안 억류생활을 했었고, 일본에 거주했던 시볼트는 한국에서 표류(漂流)해 온 강진사람들을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기록한 책을 썼다.
그러나 시볼트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강진과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책 한국관련 내용을 두차례에 걸쳐 소개하고, 강진과 제주뱃길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서남해안 사람들의 일본 표류실태를 한 두차례에 걸쳐 더 연재한다./편집자 주.
1.강진과 하멜과 시볼트 2. 시볼트가 보았던 강진사람들 3. 머나먼 표류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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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시볼트(Fr. von Siebo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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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강진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핸드릭 하멜(H.Hamel) 일행이 1666년 9월 강진을 탈출해 저술한 ‘하멜표류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강진땅과 강진사람은 하멜일행이 한국에서 13년 억류생활을 하면서 마지막 7년간을 마주했던 대상이다.
하멜표류기에 강진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베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같은 감촉들이 서양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됐을 것으로 예상할 만 하다. 서양에 최초로 전달된 한국의 이미지는 강진땅과 강진사람들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을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조금 건너 뛰어보자. 하멜의 ‘하멜표류기’가 1668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발표된 이후 서양에서 ‘미지의 나라’ 한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베일속에 가려진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쇄국정책은 하멜표류기가 발간된 후에도 두세기에 걸친 188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서양인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한 발자욱도 들여 놓지 못했다. 한국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전해듣는 ‘한 다리 걸쳐 듣는’ 정보가 전부였다.
하멜표류기는 한국에 대한 직접적 관찰에 토대를 두었다는 장점이 있는 가운데 한 선원이 작성한 견문기 수준을 넘지 못해 한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는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다가 한국이 서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부터였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고영근 명예교수는 1989년 교수시절 발표한 그의 논문 ‘폰 시볼트(Fr. von Siebold)의 한국기록 연구’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파견원 시볼트란 사람이 7년간의 일본활동을 하면서 저술한 ‘일본’이란 책을 통해 한국이 서양에 총체적으로 소개 됐으며, 시볼트는 당시 전남 강진에서 일본으로 표류한 강진사람들의 말을 듣고 언어, 민속적인 판단 자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바람에 떠밀려가 일본에 표착한 강진사람들이 독일 의학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역사앞에 등장했다.
시볼트는 독일의 의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으며, 네덜란드 국왕 시의(侍醫: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의 추천으로 네덜란드가 교역하고 있었던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 데지마(出島: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작은 인공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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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볼트가 만난 강진의 상인들과 어민들의 모습이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을 만나며 빌레베뉴베 라는 네덜란드인 화공(畵工)을 대동해 그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시볼트는 김치윤이란 사람과 허사첨, 상인, 선장, 선원, 견습선원등 6명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림속의 사람숫자가 정확히 여섯명이다. 다음호에 이들의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게재할 계획이다.<출처: 고영근의 책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335 p.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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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던 나가사키에는 일본의 서남부 각 지역으로 표류해 온 한국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었는데, 시볼트는 평소에 “이들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의 기회를 갖고 있었다. 일본정부가 한국인들과의 접촉을 제한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시볼트는 1828년 3월 17일 ‘그들의 태도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련의 한국인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전남 강진에서 표류해 온 36명의 주민들 이었다.시볼트는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이들 중 네사람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과 접촉한 후 “나는 강진사람들과 접촉 한 덕택에 조선의 문화, 학문 및 예술등에 관하여 한층 더 자세히 조사하고, 이 미지(未知)의 국가에 관해서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그의 저서에 적었다.
시볼트는 강진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말과 일본에서 취합한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의 각 방면에 걸친 내용을 그의 저서 ‘일본’에 삽입한 형태로 1932~1851년 사이에 발간했다.
당시 시볼트가 소개한 한국관련 자료는 서양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고영근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1854년 번역본이 발간됐다. 프랑스에서는 시볼트의 저서를 근거로 1864년에 ‘한국어 문법’이 나오는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서 시볼트의 한국기술이 인용되고 참고됐다.
강진에서 탈출한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발간한지 180여년만에, 일본에 표류한 강진사람들이 한 독일인 학자에게 구술한 말들이 책으로 발간돼 한국을 서양에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은 상당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 하멜일행이 마지막 7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강진사람들 이였으며, 그 후 우리나라를 서양에 구체적이고 학문적으로 소개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도 강진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국문학자인 고영근 교수는 당시 강진사람들이 구술한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시볼트의 저서에 대한 관심을 깊게 표명하고 있다.
기자는 강진을 중심으로 한 옛날 남해안의 표류(漂流)관계 자료를 취재하면서 고영근 교수의 글을 접하게 됐다. 기자는 이를 근거로 지볼트의 자료를 더 찾아보기 위해 최근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조선대학교도서관등을 뒤져 고영근 교수의 논문과 그의 저서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유상희 교수가 1987년에 번역한 ’시볼트의 조선견문기‘란 책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1980년대에 발간된 것들이였으며 그 이후에 진행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그만큼 시볼트에 대한 한국내 관심은 미미한 편이다. 고영근 교수는 “시볼트의 한국기록은 그것이 서양사회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언어학적 업적외에 거의 주목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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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의 표착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한국 표류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이다. 그림속의 사람들은 시볼트가 당시 대화를 나누었던 강진사람들은 아니다. 시볼트는 표류해 온 다른 지역 사람들과 종종 접촉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사키 화가 도이오스케란 사람이 그린 것이다. .<출처: 고영근의 책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335 p.참조,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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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유에 대해 고교수는 “한국기록이 ‘일본’이라는 큰 책속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데다 값비싼 귀중도서로 분류돼 있기 때문일 것”이라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1852발행본과 1931년 발행본은 일제시대부터 귀중본으로 분류돼 특수서고에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고 교수의 논문속에 나타난 몇 가지 기술중에서 단연 기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볼트란 독일학자가 강진사람을 만난 후 갖게 된 한국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는 한국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로 서양에 소개됐다.
시볼트의 호의적 이미지가 중요한 것은 당시까지 한국에 대한 서양사회의 이미지가 좋지 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교수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하멜일행의 고생담이 소개돼 있는 ‘하멜표류기’의 영향을 받아 한국인들이 반기독교적이고 야만성이 있는 민족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고 교수는 논문을 통해 “시볼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국인의 성격이 이전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우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며 “이는 이전의 서양인들의 한국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했다.
전술(前述)한 것처럼, 지볼트는 1828년 3월 17일 일본관리의 도움으로 나가사키에서 표류해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강진사람을 만난다. 나가사키는 일본 정부가 표류 외국인들이 거주하도록 허가한 구역이었다.
한국의 표류인들은 이곳에서 한반도로 부는 동남풍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는 몇 달을 기다리곤 했다. 이곳에서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데지마라는 곳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시볼트가 한국 사람을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시볼트는 원할한 대화를 위해 몇 사람을 골랐던 것으로 보인다. 총 36명의 강진사람 표류민중에 ‘교양이 있고 명망이 높아 보이는 남자 4명(김치윤, 허사첨, 고응양, 곽성장)’과 복장의 차이를 살피기 위해 선원과 견습선원을 더 불러 모두 6명의 강진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
시볼트는 강진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한국의 문자와 풍습등을 듣고 이를 기록하는 한편 함께 데리고 간 화가들에게 강진사람들의 얼굴과 모습, 이들이 구술하는 한국인들의 생활 모습등을 그리게 해 이를 나중에 책을 발간할 때 첨부해 발행한다. 그야말로 한국을 소개하는 종합 안내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강진사람들은 만난 시볼트는 ‘하늘과 물의 반사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려는 듯이 눈썹이 쳐지고 상대방으로부터 눈을 피한 채 움직이지 않은 모습과 서민계급의 거친 골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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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볼트의 화공이 그린 조선인 배다. 강진사람들의 배인지는 확실치 않다. 시볼트는 배가 모두 가볍고 간소하고 길이는 9m부터 15m까지 이며, 철등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배를 만든 것이 주목할만 하다고 했다..<출처: 고영근의 책 '한국어문운동과 근대화' 336 p.참조,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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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볼트는 강진사람들에게 염색된 배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마시는 게너버란 음료수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받은 강진사람들은 무슨 답례품을 줄까 생각하다가 자신들이 난파당시 건져낸 소지품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몇 권의 필사본 책과 두루마리 그림 몇폭, 작은 소반 한개, 몇 개의 항아리와 사발이었다.
강진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취합해 저술을 남긴 시볼트는 한국이 서양인들에게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을 그의 저서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자국의 생산품과 기술, 나라안의 교역만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는 국민에 대해 정부가 평온.무사한 나날을 확보해 주려면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민들이 유럽인들을 받아드리지 않고 있지만 고의든지 우연이든지 바닷가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커녕 되도록 헤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볼트는 한국인은 오랜 옛날부터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고 지적 수준이 오히려 일본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도 중시하고 있다.
또 한국민과 교섭을 하려면 미개인나 유목민족을 대하듯이 무력을 행사하거나 호의를 베푸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권장한다. 대신 한국정부의 정신, 다시말해 왕권중심이라는 통치원리를 탐색하고 한국인들의 풍습과 관습, 언어등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 나라와 주민을 인식하는 방법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시볼트가 이같은 인식을 하기까지 강진사람들과의 만남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게 조금은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계속> |
첫댓글 덕분에 공부많이 했습니다~충무공의 기록에 이런 말씀이~무 호남 무 국가~"호남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어졌을것이다"(호남인의로써 무한한 긍지를 느낌니다)
이런 소중한 자료를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덕분에 몰랐던 사실을 이렇게 배우고 나니 뿌듯해집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어느고을이나 나름대로 역사가 있겠지만 강진의 역사는 고려청자역사등 한국을 대표할만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