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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에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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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태 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
갑오년 5월 7일(음력), 서기로는 1894년 6월 10일(양력). 농민군과 관군은 전주에서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날 청국 군대가 서해안 아산만에 상륙했다. 이틀 후에는 일본 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이에 앞서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걸고 봉기했다. “벼슬아치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시들면 국가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국가의 봉록만 없애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랴.”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군을 불러들여 봉기할 때 3천여 명이었던 농민군은 고창을 지나 백산에 이르니 8천 명이 되었고, 백산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인천에서 청국의 배를 타고 이동하여 군산에 상륙했던 서울의 관군도 황토현에서 격파했다. 농민군은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무안-나주를 거치는 동안 세력이 더욱 불었다.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농민군이 또 승리했다. 관군은 전주성으로 후퇴했고, 농민군이 들이닥치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제 전주성은 농민군이 점령하고, 관군이 공격하는 형국이 되었다. 안팎의 정세를 고려한 전봉준이 화해를 요청하고 관군이 받아들였다. 농민군은 탐관오리 응징 등의 개혁을 요구하고 해산하면서, 53곳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청국은 임오군란 때(1882년) 병사들이 모시려던 대원군을 끌고 가는 등 조선에 대해 패권을 행사했고, 대원군과 맞서던 명성왕후는 청국에 의존했다. 2년 후 청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김옥균 일파가 일으켰던 갑신정변 때(1884년) 일본은 아직 청국에 대적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때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그 때가 왔다. 조선의 조정은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 즉 청국의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이를 구실로 일본도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대궐에 침입하여 친청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을 수립했다. 왕실과 정권의 안전을 위해 강대국의 우열을 저울질하며 강대국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결국은 승자의 요구에 농락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군대는 아산만에 있던 청국 군대를 공격했다. 청국이 패퇴했다. 평양까지 후퇴한 청국 군대는 평양성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압록강 너머까지 쫓겨 갔다. 청일의 지위는 역전되었다. 친일 갑오정권은 갑오경장을 추진했다. 내용이야 오랫동안 논의된 필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모양내기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갑오정권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와 탄압의 양면정책을 본격적 토벌정책으로 전환했다. 농민군 지도자는 이런 안팎의 정세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일본이 개화라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백성들에게 발표하고, 격서도 없이 군대를 도성에 끌어들이고 밤중에 왕궁을 깨부숴 왕을 놀라게 했다. 초야에 있는 사람이라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분함을 견디지 못할 일이다.” “왜와 청나라가 싸우고 한쪽이 이기면 반드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우리는 숫자는 많으나 훈련이 안된 오합지중이어서 승산이 없소. 해산한다는 명분으로 고을로 돌아가 사태의 변화를 살펴보는 게 낫겠소.” “맞소,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많은 호응이 있었지만, 아직 양반이나 선비들이 따르지 않고 있으니 아직 일을 이루기는 어렵소.” “아니오. 이렇게 모인 무리가 일단 헤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소. 이번에 반드시 결단을 내야하오.” 우리의 갑오년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오랜 고심 끝에 싸우자는 쪽으로 결정했다. 농민군들은 진격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보세[갑오세] 가보세[갑오세] / 을미적 을미적 / 병신 되면 못 가리” 갑오년(1984년)에 미적거려 을미년(1985년)이 지나고 병신년(1986년)에 이르면, 일이 회복할 수 없도록 그르치게 될 것이니 갑오년에 승부를 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삼례에서 4천 명이었던 농민군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관군은 3천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600여 명이었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병사로 미제 슈나이더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북진하는 전봉준의 1차 목표는 공주였다. 일본군도 공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본군이 공주를 먼저 점령해버렸다.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은 온 힘을 다해 공격했지만 전투를 할 때마다 절반이 죽어 힘이 빠지고 사기가 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민군 같은 비정규군이 잘 훈련된 정규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무모한 것이었다. 최후의 격전을 벌인 7일간의 우금치 전투가 끝나고 나니, 농민군은 죽거나 달아나 겨우 500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일대에는 수많은 시체가 나뒹굴었다. 일본군은 단순히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앞으로 병탄할 조선에서 미리 저항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과제였다. 농민군은 저항의 불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농민군을 평야인 호남 쪽으로 몰아 토끼몰이 하듯 섬멸작전에 나섰다. 들판의 풀들이 짓밟히고 녹두꽃도 떨어졌다. 120년 전 갑오년의 장면이다. 우리의 갑오년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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