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타원 이경순 종사 36주기와 달타원 이정화 대봉도 30주기 열반기념제가 11일 있었다. 열반기념제는 대구 경북지역의 교화의 초석이 된 두 스승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재가 출가교도들의 뜻에 따라 생장지인 구성교당에서 모셔왔다.
그 동안은 대구 경북에 거주하는 많은 교도들이 함께해 공양은 물론 기념비 등으로 교당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스승의 은덕을 기려왔다. 그러나 이번 기념제는 참으로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케 했다. 구전심수로 법을 받든 재가교도는 변함없는 신성으로 일관한 강북교당 김경오 교도 뿐이었다.
김 교도는 그 동안 추모의 글을 통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신성과 애틋한 추모의 정을 전해 대중을 감동시키곤 했었다. 이날도 추모의 글을 통해 대종사께서 〈대종경〉교단품1장에서 밝힌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의'를 건네는 표본을 보는 듯 아름다운 신성을 새길 수 있었다. 그가 다니던 봉덕교당이 행정상의 문제로 강북으로 이전해 교당을 건축할 때 스승의 은혜를 기리고자 교당의 일부에 대한 건축기금을 담당하고 그 이름을 '항달수련관'이라고 명명했다. 참으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신성으로 일관한 절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일이다.
두 자매는 부친인 이춘풍 선진이 대종사의 제자가 되자 원기6년에 대종사의 뜻에 따라 부안군 보안면 종곡마을로 가서 자랐다. 종곡은 대종사께서 영광에서 변산을 왕래할 때 유숙했던 거점이 된 교단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성적지 중 하나다. 훗날 소태산대종사께서는 항타원 종사를 "무사기(無邪氣)의 정기(正氣)로 뭉친 도인이 우리 회상에 왔다"고 기뻐했다.
항타원 종사는 원기26년에 개성교당에 부임해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쳤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온 개성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종로교당을 설립했다. 종로교당이 근간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서울교화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두 자매는 초량·대구·서성로·봉덕·부산교당 등에서 봉직하며 초기교단 영남권 교화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초기 교단의 선진들의 족적을 살펴보면 너무도 닮아가고 싶은 선진들의 고귀한 역사가 산재해 있다. 추원보본의 정성을 올리는 명절대재를 앞두고 있다. 선진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 거룩한 삶과 정신을 이어받아 원불교100년을 더욱 빛나게 하는 부끄럼 없는 후진들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