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상석이라고 우겨봅니다. 이 돌은 같은 돌인데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한쪽은 멧돼지처럼 거칠고 생명력 넘치는 동물 형상같지만, 다른 쪽은 고개를 숙인 수도승 같고, 때로는 깊은 시간을 등에 진 거북을 닮아 있습니다. 시선이 바뀌면 형상이 달라지고, 형상이 달라지면 마음이 읽어내는 의미 또한 달라지는 듯합니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느 것 하나 뜬금없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은 처음엔 그저 불편한 사고(事故)처럼 느껴지지만, 돌아보면 그 안에 내가 무심히 지나친 선택과 감정, 책임의 단서들이 숨어 있곤 하지요. 우리는 흔히 '이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을까'라고 묻지만, 실은 그 일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던지도 모릅니다. 무수한 인연의 실타래들이 엉켜 하나의 결과로 내 앞에 나타날 뿐이라는 거지요.
모든 현상은 나와 무관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내 의식의 파장이 닿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흘려보낸 무심함, 외면한 태도, 미뤄둔 책임은 결국 형태를 달리해 돌아옵니다. 삶은 때때로 그 얼굴을 숨기지만, 우리가 읽어내려는 순간에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지금, 이 돌 앞에 멈춰 섭니다. 그리고 이 돌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얼굴처럼, 한 사건의 안쪽에서 조용히 나를 마주봅니다.
지난 주 다친 손을 아직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검지의 상처는 단순한 열상 이상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부서진 손톱 주위는 끊임없는 욱신거림과 진물로 나를 괴롭힙니다. 톱날이 거칠게 지나간 탓인지 상처 부위는 이차 감염의 문턱에 서 있고, 항생제를 거르면 어김없이 열이 나고 벌개집니다. 신장 기능이 떨어져 있는 상태라 항생제나 소염제를 조심해서 써야 하지만, 손이라는 부위는 물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약을 먹게 됩니다. 고무골무며 방수 테이프를 동원해도 물은 기어이 틈을 찾아 들어옵니다. 상처는 아물 기미 없이, 고통과 함께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며칠 전 데스크 실장이 말했습니다. “이거, 그 물고기들에 대한 업보 아닌가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이 나를 멈춰 세웠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키우던 트로페우스들이 한밤중에 멈춘 펌프 때문에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물생활이 차츰 지겨워지던 무렵이었고, 이 일을 정리할 구실을 찾던 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뜻을 아시고 일을 거두어 가신 거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아쉬운 척했지만, 사실은 내심 홀가분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건 나의 숨은 뜻이 실현된 것일 뿐입니다. 나의 무심함이, 무의식의 방치가 결국 생명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스스로 직접 고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의도적인 살해보다 무심한 방조가 더 잔인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책임의 연속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고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명복을 비는 행동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 대신 일을 끝내준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 뒤에는 책임을 회피한 죄책감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삼 년 동안 길러온 생명체를 단지 미물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놓아버려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 어쩌면 내 마음속 어디에선가는 그전에 이미 그들을 죽인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 지금 이 손가락의 상처와 더딘 회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요. 실수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부주의로만 보기엔 이 일에는 어딘가 깊은 인과의 기운이 얽혀 있는 듯합니다.
세상에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과보(果報), 업보(業報), 응보(應報)라는 개념은 꼭 종교적 신념만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우주의 원리이며, 과학적 질서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측정하거나 증명하지 못할 뿐, 결과는 언제나 원인을 따라옵니다. 인간의 행위는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만들어냅니다. 그 반응이 꼭 육체의 고통이나 물리적 현상이 아닐지라도, 삶의 어느 지점에선 반드시 ‘되돌아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뉴턴의 운동 법칙도 ‘작용-반작용’의 원리를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양자역학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이 ‘관측자 효과’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내가 품은 생각, 내가 보낸 파동은 결국 다시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오만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는다는 깨달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나의 의식과 행위가 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신비를 넘어 실재로 다가옵니다.
내 손가락의 상처는 단순히 톱날이라는 물질적 원인과 부주의라는 동력적 원인의 결과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생명을 방치한 행위, 곧 윤리적 책임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교의 연기설도 모든 현상이 상호 의존하며 발생한다고 가르칩니다. 나의 무심함은 물고기들의 죽음으로, 그 죽음은 다시 내 손가락의 상처와 덧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존재의 상호연결성 속에서 펼쳐진 필연이라고 믿습니다.
이 상처는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닙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행위의 에너지가 우주적 질서 속에서 되돌아오는 원리입니다. 기독교 역시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징벌의 논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책임의 논리입니다. 신은 나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이끄는 중입니다. 이 상처는 나에게 ‘보라’고, ‘알라’고 속삭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이자, 치유의 시작점입니다.
양자역학은 더 나아가, 우리의 의식이 현실을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관측자 효과’는 단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의도와 태도가 현실을 바꾼다는 통찰로 확장됩니다. 내가 물고기들에게 보낸 무심함의 파동은, 결국 이 상처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이는 우주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나의 행위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시 나를 찾아온 결과입니다.
전생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하나의 프로세스로 본다면, 나라는 존재는 포맷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리셋된 채로 이어집니다. 나의 행위와 기억은 우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며, 그 에너지는 다시 현실의 삶에서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어제의, 혹은 전생의 나의 연속이며, 나는 우주를 매일 새롭게 짓고 있다는 자각과도 같습니다.
이 손가락의 상처와 더딘 회복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작업 도중 부주의하게 다친 것이 아니라, 내가 품고 행한 마음의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그저 ‘왜 낫지 않을까’라는 의문 속에만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 상처는 즉보(卽報)의 형식으로 나에게 ‘보라’고, ‘알라’고 생긴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이 시작되는 순간, 치유도 비로소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이 깨달음은 나를 더 진실한 삶으로 이끕니다. 작은 생각 하나가 물질의 흐름을 바꾸고, 한순간의 무심함이 우주의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 굳이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떠올리지 않아도, 삶의 엄중함은 조용히 상처를 통해 속삭이고 있습니다. 나는 그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이끄는 길을 따라, 조금 더 책임감 있게, 조금 더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 상처는 나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스승입니다.
cf. 이 글은 이틀 전에 초고를 시작한 글입니다. 그런데 우연일까요. 상처가 나아집니다.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고, 진물도 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과 참회의 결과일까요. 어떻든 이제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