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不死)의 문을 여소서” 아야짜나경(청원경 S6.1.1)과 가라와경(존경경 S6.1.2)
아야짜나경 (?y?canasutta?, 청원경, S6.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에 있는 아자빨라라는 니그로다 나무에서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때 세존께서 홀로 고요히 앉아서 명상하는데 마음에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념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예전에 없었던 훌륭한 시들을 떠 올렸다.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숙고해서 주저하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기울이셨다.
그때 범천 싸함빠띠가 세존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 바를 알아차리고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주저하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기울이신다면 참으로 세계는 멸망한다. 참으로 세계는 파멸한다.'
그래서 범천 싸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범천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범천 싸함빠띠는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싸함빠띠] "세존이시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거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뭇삶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쇠퇴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범천 싸함빠띠는 말했다. 말하고 나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싸함빠띠]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낸 오염된 가르침이 마가다 국에 나타났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라. 청정한 분께서 깨달은 진리를 들어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현자여,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자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자께서는 생사에 지배받는 슬픔에 빠진 뭇삶을 보시오.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일어서십시오. 허물없는 캐러밴의 지도자여, 세상을 거니십시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십시오 알아듣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요청을 알고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마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연못에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수중에 잠겨 자라고,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으며,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보고 나서 범천 싸함빠띠에게 시로써 대답하셨다.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그때야 비로소 범천 싸함빠띠는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실 것을 내게 허락하셨다' 그는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그곳에서 사라졌다.
註.
-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여기서는 세속으로부터 점차적인 해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모든 형상의 그침 2)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3) 갈애의 소멸 4) 사라짐 5) 소멸 6) 열반.
여기서 3)의 갈애의 소멸은 존재에의 갈애의 소멸을 뜻하며, 4)의 사라짐이라고 번역한 viraga는 원래 색깔이 바래서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부수어 없어지는 소멸을 뜻하는 niradha와 구별하였음에 주의해야 한다. 붓다고사는 이 모든 과정에 관해 '모든 번뇌의 경향이 사라지고 모든 고통이 소멸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싸함빠띠:
붓다고사에 의하면, 싸함빠띠는 깟싸빠 붓다 시대에 싸하까라는 장자로,그는 첫번째의 선정(初禪)에서 죽어 한 宇宙期(겁, 56억7천만년)를 사는 범천이 되었다고 한다.
-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
한역으로 如來, 應供, 正等覺者라고 한다. tathagata를 가이거의 독일어역 니까야에서는 '진리에 도달한 자'라고 번역했으나 원의에는 충실하지 못하므로 여기서는 한역을 중시하여 '이렇게 오신 님'이라고 하며, 아라한은 '거룩한 님'으로 정등각자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님'으로 통일한다.
(아야짜나경-?y?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가라와경 (G?ravasutta?., 존경경, S6.1.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에 아자빨라라는 니그로다 나무에서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명상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셨다.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 참으로 어떠한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을까?'
그때 세존께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계행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 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삼매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 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삼매를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지혜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 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지혜를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해탈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 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해탈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해탈지견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 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해탈지견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이 어떨까?'
그때 범천 싸함빠띠가 세존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 바를 알아차리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범천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범천 싸함빠띠는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싸함빠띠] "세상에 존경받는 님이시여, 그렇습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시여,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의 거룩하신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이셨던 세존들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의 거룩하신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이 되실 세존들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현재의 거룩하신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인 세존들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합니다." 이와 같이 범천 싸함빠띠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싸함빠띠]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미래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현재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수많은 사람의 슬픔을 없애주네. 모두 올바른 진리를 공경하며 살았고 살고 있으며 또한 살아갈 것이니 이것이 깨달은 님의 가르침이네. 자신에게 유익함을 바라고 위대한 것을 소망하는 자는 깨달은 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올바른 진리를 존중해야 하리."
註.
- 붓다고사에 의하면 이 경에서 기술되는 사건은 완전한 깨달음(sambodhi)을 얻은 후 5주째에 일어난 것이다.
- 계행 삼매 지혜 해탈 해탈지견 : 여기까지 다섯 가지의 수행단계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계행(sila) 삼매(samadhi) 지혜(panna) 해탈(vimutti) 해탈지견(vimutti-nanadassana). 이러한 수행단계의 완전성에 도달하지 않은 한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점에서 다른 수행자들을 훨씬 능가하므로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無師)는 말이다.
- '나는 내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 진리를 공경하고... 의지하는 것이 어떨까?': 리즈 데이비스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 곧 법(法,dhamma)은 불교 발전의 어떤특정한 시기에 神이 되었다고 했는데, 가이거는 바로 위 내용이 법신불 신앙의 시초라고 생각했다.
(가라와경-G?ravasutta?-존경경, 상윳따니까야 S6.1.2, 전재성박사역)
아야짜나경(청원경-S6.1.1).docx 아야짜나경(청원경-S6.1.1).pdf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이루시고 난 후 이 깨달음에 대하여 세상에 전할건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브라흐마(범천) 사함빠티 (Sahampathy)가 니타나 진리를 설해 주기를 간청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경의 이름을 전재성박사는 ‘청원경(?y?canasutta?)’으로 하였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부처님이 깨달은 담마는 부처님이 게송에서 표현하였듯이 세상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를 찾아 보았다.
Kicchena me adhigata? 낏체나 메 아디가땅 haland?ni pak?situ?, 하란다니 빠까시퉁, dhammo susambudho. 담모 수삼부도. gambh?ra? duddasa? a?u?, 감비랑 둣다상 아눙, tamokkhandhena ?vut?ti. 따목칸데나 아위따띠.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세상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찌들여 사는데, 부처님이 발견한 이 진리는 이해하기 힘들것이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다름아닌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서 번역자는 ‘진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때 진리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무엇일까. 그것은 빠알리어 원문에 표현되어 있듯이 담마 (dhamma)를 말한다.
담마의 진정한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불법(佛法)’다. 그런데 빠알리어에서는 이를 ‘담마(Dhamma)’로 표기 한다. 그래서 주류불교(테라와다불교)에서의 띠사라나(삼귀의)를 보면 “담망 사라낭 갓차미(Dhammam saranam gacchami)”라 하여 “가르침에 귀의한다”라고 말한다. 이 때의 담마 역시 진리로 본다.
그렇다면 담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 주해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궁극적 실재 (빠라맛타. parama-attha)
‘궁극적 실재’라고 번역한 빠라맛타(parama-attha)는 빠라맛타 담마(paramattha-dhamma)라고도 하는데,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된다. 그래서 ‘최고의 이치’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승의(勝義)라고 직역했고, 영어권에서는 ultimate realitiy로 번역한다. 이러한 궁극적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 dhamma)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빨리 경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의미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부처님의 가르침(Buddha-dhamma)으로서의 법 불·법·승 삼보(三寶)에 포함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고유명사 취급을 해서 Dhamma로 표기한다.
(2) 존재일반(sabbe-dhamma)으로서의 법 영어권에서는 이를 일반명사 취급하여서 dhamma로 표기한다. 이 법은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와 개념(施設, pa???tti)으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➀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하며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등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을 ‘고유한 성질(自性, sabh?va)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고유의 특성이란, 특정 법이 가지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dosa)이라는 심리현상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법과 성냄이라는 법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탐욕이 가지는 거머쥐는 성질과 성냄이 가지는 밀쳐내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다른 것은 그 고유한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아비담마는 설명한다.
➁ 개념(施設, pa???tti) 빤냣띠(pa???tti)는 아비담마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가설(假說), 방편설(方便說)이란 의미의 시설(施說 )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concept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tti) 개념들이 전달하는 뜻을 말한다. 예를 들면 책상, 의자 등의 용어나 명칭을 뜻한다.
(2) 이름으로서의 개념(名施設,n?ma-pa???tti)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tti)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이나 사상을 뜻한다. 이를 삿다 빤냣띠(sadda-pa??atti)라고도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의 주해모음, 김한상번역 및 역주)
궁극적 실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담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담마는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존재일반’에 대한 것이라 한다. 특히 전자의 경우 담마를 영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를 사용하여 ‘Dhamma’라 한다.
“불사(不死)의 문을 여소서”
이처럼 담마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리라는 것은 모든 불교인들이라면 당연히 받아 들인다.
진리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말할까. 그것은 경에서 사함빠띠가 진리를 설해 주기를 청원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P?turahosi magadhesu pubbe dhammo asuddho samalehi cintito, Av?pureta? amatassa dv?ra? su?antu dhamma? vimalen?nubuddha?. Sele yath? pabbatamuddhani??hito yath?pi passe janata? samantato, U??hehi v?ra vijitasa?g?ma satthav?ha ana?a vicara loke,
빠뚜라호시 마가데수 뿝베 담모 아숫도 사마레히 찐띠또, 아야뿌레땅 아마땃사 드와랑 수난뚜 담망 위말레나누붓당. 셀레 야타 빱바따뭇다닛티토 야타삐 빳세 자나땅 사만따또, 따투뿌망 담마마양 수메다 빠사다마루이하 사만따짝쿠, 소까완띤낭 자나따마뻬따소꼬 아웩카낫수 자티자라비부딴띠. 웃테히 위라 위지따상가마 삿타와하 아나나 위짜라 로께, 데삿수 바가와 담망 안냐따로 바윗산띠띠.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낸 오염된 가르침이 마가다 국에 나타났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라. 청정한 분께서 깨달은 진리를 들어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현자여,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자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자께서는 생사에 지배받는 슬픔에 빠진 뭇삶을 보시오.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일어서십시오. 허물없는 캐러밴의 지도자여, 세상을 거니십시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십시오 알아듣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브라흐마 사함빠띠(Sahampati)의 청원 사진 : http://www.mahidol.ac.th/budsir/E_hist32.htm
부처님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설하셨다. 그것은 사함빠띠의 게송에서 ‘불사의 문’으로 표현되고 있다. 부처님의 담마는 나고 죽는 일 없는 ‘불생불사’에 대한 것이다.
번역상 약간의 오류가
그런데 위 사함빠띠의 청원게송에서 번역상 약간의 오류가 보인다. 게송의 전반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후박나무님)
두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시제에 대한 것이다. 번뇌에 오염된 자들이 마가다국에 나타난 것은 과거의 일이다. 따라서 “니타났으니”가 아니라 “나타났었습니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경어에 대한 것이다. 사함빠띠가 청원을 하는 입장에서 “불사의 문을 열어라” 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사의 문을 여소서”라고 하여 경어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게송의 첫 부분을 다시 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 한다.
이렇게 사함빠띠가 불사의 문에 대하여 설해주기를 간청하자 부처님은 설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은 뭇 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이라 하였다. 이런 자비심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일까.
깨달은 자와 자비심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진아론적’ 법문이다. ‘참나’를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진아론적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번뇌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탐진치로 대표 된다.
그렇다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어떤 마음이 남게 될까. 이에 대하여 수행처에서는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남게 된다고 한다.
이는 탐욕이 물러난 자리에 관용이, 성냄이 없어진 자리에 자애가,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지혜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남김 없이 소멸된 깨달은 자는 자비와 지혜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경에서 범천의 요청을 받고 뭇삶에 대한 자비심, 세상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 두 가지
마침내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위 없는 바른 법을 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부처님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p?rut? tesa? amatassa dv?r? ye 아빠루따 따상 아마땃사 드와라 예 sotavante pamu?cantu saddha?, 소따완떼 빠문짠뚜 삿당, dhamma? pa??ta? manujesu brahmeti. 담망 빠니땅 마누제수 브라흐메띠.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이 게송에 대한 영문은 다음과 같다.
“The door to deathlessness is open.
매우 짧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이고, 또 하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라는 말이다.
후박나무님의 글에서
그렇다면 위 빠알리어 게송에 대하여 다른 역경자들은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후박나무님이 작성한 글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Ap?rut? tesa? amatassa dv?r? ye sotavante pamu?cantu saddha?,
[전재성박사 번역]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각묵스님 번역]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믿음을 내어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최봉수박사 번역]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하왁가 p.53)
빠알리어에 대한 번역문이 모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문제 되는 단어 ‘빠문짠뚜 삿당(pamu?cantu saddha?)’에 대한 것을 보면
-전재성박사 믿음을 버려라.
-각묵스님 믿음을 내어라.
-최봉수박사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로 되어 있다. 전재성 박사는 “믿음을 버려라”라고 하였고, 각묵스님은 “믿음을 내어라”고 하였다. 이는 정반대의 번역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반대의 해석을 보면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의견] pamu?cantu는 pamu?cati(벗어나다.나가다.버리다)의 3인칭 명령형 복수입니다. 이 두 분의 번역이 전혀 반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석]서 에서는 “믿음을 버리라”는 말은 모든 자신의 믿음을 버리라, 제거하라. (Pamu?cantu saddhanti sabbe attano saddha? pamu?cantu vissajjentu,)는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pamu?cantu saddham (邪)信을 버려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들]에서도 각각 버리라,놓아라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후박나무님,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docx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pdf
빠문짠뚜 삿당(pamu?cantu saddha?)의 번역에 있어서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이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는 갓이다. 전재성박사는 “믿음을 버려라”라고 하였고, 각묵스님은 이와반대로 “믿음을 내어라”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이와 같이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pamu?cantu번역에 있어서 숫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다른 문구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재성박사의 번역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pamu?cantu라는 말이 경전에 사용된 용례로 보아서 “(삿된) 믿음을 버려라” 또는 “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설법을 할 테니 기존의 선입견과 믿음을 버리고 열린 마음, 객관적인 마음으로 들을 자세를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누가 상처받는가
다음으로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라는 문구이다. 이는 빠알리어
vihimsasa???(주격,) pagunam na bh?sim Dhammam pan?tam manujesu(남성명사 처소격 복수) brahme(감탄)"ti.
에 대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세 분의 번역자의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재성박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각묵스님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최봉수박사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번역이 각기 다른 이유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 놓았다.
[의견]이 번역은 크게 상처받는 것이 붓다인가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vihimsasa???는 vihims?(해로움)+sa??in(산냐를 가진자)인데 sa??in의 주격 단수가 sa???입니다. 그래서 “해롭다는 생각을 가진 자인 (나는) ” 의 뜻입니다.
여기서 망설여지는 부분은 붓다가 어떻게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는 이미 앞에서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말을 완전하게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상처받는 다는 산냐란 앞에서 붓다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 라고 3번 생각한 적이 있는 “붓다의 산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서도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a)는 성가심(v?hes?)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후박나무님,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의 의견에 따르면 단지 ‘Vihi?sasa??? pagu?a? na bh?si? dhamma? pa??ta? manujesu brahmeti.’만을 놓고 보았을 때 최봉수박사의 번역이 더 정확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도 붓다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정확하다. 하지만 각묵스님의 번역은 붓다가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후박나무님은 이 게송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귀 있는 자들이여!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범천이여, 피로할 것이라는 생각한 나는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인간들 사이에서 설하지 않았었네.”
(후박나무님,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불자라면
불자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오계를 지키고 붓다와 담마와 상가 이렇게 삼보에 귀의하면 불자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마라 하는데, 이는 진리를 말한다. 부처님이 설한 것은 모두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불자들을 큰 혼란에빠뜨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외도들의 견해도 진리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이는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2,600년동안 전승되어 온 초기경전에 모두 실려 있다.
2012-01-05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