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핀다-신서영(은미) / 2022. 9. 제251호 신인상 수상작

[홍윤선]

꽃은 핀다 / 신서영(2022. 9. 서울)

별콩이 하늘을 오르고 있다. 망을 타고 오른 넝쿨 사이, 하얗고 작은 꽃이 정말 별처럼 콩콩 박혀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친정집 뒷산에는 진달래가 핀다. 진달래를 시작으로 집 주변을 비롯해 밭에도 꽃들이 피어난다. 들 곳곳에 냉이꽃, 제비꽃, 민들레꽃이 색색으로 앉아있고 밭에는 가지꽃, 오이꽃, 고추꽃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밭을 갈고 모종을 내기까지 손이 여러 번 간다. 그래서인지 힘든 과정만 생각나고 꽃이 피어있는 모습은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어느 날 밭에 갔다. 마른 꽃 끝에 형광보라색 가지가 키를 늘리고 있었다. 놀라움, 뿌듯함을 넘어서 생명의 신비로움에 전율했다. 한참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내 옆을 지나쳐 꽃을 솎기 시작하셨다. 꽃이 뭉텅이로 피어있으면 열매가 실하지 못하다며 “이렇게 꽃이 여러 개 있으면 제일 괜찮은 꽃만 남기고 나머지는 따.”라고 알려주셨다. 해마다 듣는 얘기라 알고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할 행동으로만 여겼던 내 손끝이 꽃을 떼어내며 잠깐 떨렸다. “그러네. 나도 꿈을 포기하며 아팠었지 너도 잠깐은 아프겠지만 더 크고 실한 열매를 얻기 위한 거니까 그래 괜찮아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어린 시절, 집 주변으로 꽃나무가 있었다. 산수유, 매화나무와 넝쿨장미였다. 작고 노란 꽃이 피었는데, 이름도 모르고 지내다가 커서 그것이 산수유였다는 걸 알았다. 장미꽃잎을 주워 소꿉놀이를 했던 기억도 있다. 마루 한가운데 양쪽으로 열리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장독대가 보이는 뒤뜰이었다. 장독대를 둘러 봉숭아꽃도 피었는데, 할머니는 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놓고 두 손 모아 소원을 비셨고, 우리는 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였다. 꽃들이 풀잎 사이로 묻혀갈 때마다 아버지는 “꽃밭이 아니라 풀숲이다.”하시며 우리들을 불러 풀을 뽑게 하셨다. 모기에게 물리는 것은 괜찮았지만 땅속에서 꿈틀대는 벌레나 지렁이가 나올 때면 몸을 부르르 떨며 대문 밖까지 뛰었다. 그리고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모두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정돈된 뜰에는 주황색 나리꽃과 하얀 백합, 수국이 고왔는데 밤이 되면 달빛 아래 풀벌레 소리를 얹고 바람으로 살랑거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삶은 감자를 먹으며, 꽃잎을 적시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어느 결에 잠들어버린 날도 있었다. 그리운 추억이다.

아버지는 보기와 달리 꽃을 좋아하신다. 말수도 적으시고 무덤덤하신 편인데, 계절마다 꽃이 피면 플라스틱 병을 화병 삼아 텔레비전 옆을 장식하셨다. 진달래, 백합, 장미, 국화로 거실이 환했다. 여전히 꽃을 곁에 두시는 아버지 덕분에 올해도 작약이 그 큰 꽃잎을 활짝 펼쳤다. 나는 이상하게 작약꽃은 무섭다. 귀신이 씌었나 싶고 홀릴듯해 한 발 떨어져 바라보고는 한다. 백합도 꽃송이가 어찌나 크던지 동생을 끌어 “네 얼굴만 하다. 이런 건 증거를 남겨야지.”하며 휴대폰에 사진을 저장했다.

어느 날엔 꽃을 지그시 바라보시는 아버지를 옆에서 관찰했던 적이 있었다. “꽃이 왜 좋아요.”라고 여쭈니 “이쁘잖아!”하신다. 소리 없이 미소 짓던 입 꼬리와 눈빛이 온화했다. 나도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과 상처투성이인 손과 굽은 허리를 꽃처럼 바라보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등을 돌린 적이 있었다.

올봄에도 뒷산에 아까시 꽃이 눈처럼 쏟아졌다. 지금은 밤나무 꽃이 바람에 한껏 술을 흔들며 향을 날린다. 고구마 밭둑 위로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던 벚나무에는 버찌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다시 빨간 꽃이 핀 것만 같다. 밭 둘레로 호박꽃, 엉겅퀴, 개망초꽃이 눈을 호강하게 한다. 부추도 시기를 지나면 꽃대를 올리고 고추는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연신 꽃을 피우며 고추를 키울 것이다. 여기저기 꽃이 피지 않는 곳이 없다.

내 눈에도 꽃은 예쁘다. 특히 들꽃을 좋아하는 나는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고 꽃을 꺾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신혼 때 꽃을 사 온 남편에게 비싸고, 금방 시들고, 쓰레기 일뿐이라며 다시는 사오지 말라고 했었다. 그 후로 남편은 지금껏 꽃을 사오지 않는다.

그러다 근래 “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하는 거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해석을 듣는 순간 나는 나에게 실망했다. 꽃은 피는 순간 절정이다. 꽃다발을 왜 선물한다고 하는지, 왜 안는다고 하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다. 꽃은 결정체, 한 생이 놓고 가는 절정의 순간이며 모든 시간이 담겨있다. 순간을 선물하는 것, 마음을 다해 주고 예의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상에 별이 있다면 그것은 꽃일까, 그래서 꽃으로 마음을 대신하는 걸까,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별도 따다 줄 수 있다는 맹랑한 사기의 말과 진지하게 엮어보았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풀기 위해, 어제를 끌고 와 오늘을 어제처럼 살고, 내일 꽃이 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았었다.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때는 울고, 그러다 더 많이 웃고 있는 나로 살고 있을 훗날을 기대해본다. 내 인생길에도 오늘 꽃이 피지 않았다면 어느 날엔가 꽃이 필 것이다. 이미 꽃이 졌다 해도 다시 피어날 것이다. 산에도 들에도 끝내 절정의 순간을 만들고 마는 꽃은 지천이다.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로 꽃은 피고 지고, 다시 또 핀다.

[홍윤선]

신서영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에서도 자주 뵙기를 기대합니다.^^

[신서영(은미)]

어쩌면 숨은 꽃이었을 저를 이곳까지 이끌어주신 분들께 다시 인사를 전합니다. 이곳 방마다 꽃을 심으시는 수고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신노우(南園)]

작품,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