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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1.土. 흐리고 안개
이틀은 雨, 이틀은 霧.
내가 아직도 졸음으로 보이니?
파리가 앉으면 쭈욱 미끄러질 만큼 기름지고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에다 구수한 된장냄새 옴팍하게 풍겨나는 새로 끓인 아욱국과 고드름처럼 아삭아삭 씹히는 무생채에 냄비에 덜어 뜨겁게 덥혀 빨간 국물 진한 오겹살 김치찌개와 파래가 섞인 여수돌김과 하얀 종재기에 담겨있던 고수양념장이 맨초롬히 식탁에 올라와있었다. 오늘 방문한다는 학장님께서 12시경에 목탁암 법당 앞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그때 점심을 잘 먹기로 하고 아침은 대충 이렇게 먹자고 했다. 그런 뒤에 목탁스님은 헛웃음을 치면서 “목탁암의 규모가 해인사 정도 되는 줄 아시는 모양이지요. 법당 앞에서 12시경에 만나자고 하시는 걸 보면, 허허~” 라고 말씀하셨다. 백발의 노老 학장님께서 막상 보시면 실망하실 줄 모르겠으나 목탁암은 인법당이 있는 본채와 창고와 욕실과 수도꼭지가 달랑 하나 나와 있는 샘이 붙어있는 부속채로 된 토굴土窟에 불과한 암자庵子였다. 말주변이 좋고 친화력이 있는 성북동 거사님은 식사 도중에도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천안과 공주와 정읍을 거쳐 화순까지 오면서 들렸던 사찰과 그곳에서 공양을 하면서 맛보았던 각 사찰마다 특징이 있는 사찰음식에 대해 나름대로 식견을 펼쳐가면서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렇게 맛난 아침공양을 마치고 탁자에 앉은 채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도량마당으로 부르릉~ 들어왔다. 마당 한쪽에 주차를 한 검은 승용차에서 보살님 한 분과 거사님 한 분이 나왔다. 그러자 목탁스님께서 아무래도 오늘 점심공양에 신경이 쓰여서 어제 광주에서 사는 회장보살님께 연락을 드려 반찬을 몇 가지라도 좀 준비해 와달라고 부탁을 했노라고 말씀하셨다.
공양간에 붙어있는 둥근 시계를 보았더니 벌써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우리도 마시던 찻잔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할 일을 찾아 공양간을 나섰다. 두 분 보살님은 공양간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두 분 거사님은 도량을 청소하고 목탁스님은 밭으로 나가 배추와 무와 아욱과 케일을 뜯고 있었다. 나도 목탁스님을 따라 밭으로 나가 스님이 따놓은 배추와 무를 샘으로 날랐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회장보살님과 함께 온 거사님과 마주치자 목탁스님께서 서로 인사소개를 시켜주었다. “여보시우~ 광주거사님, 그러니까 이 양반이 학교 후배될 거요.” 목탁스님은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말했다. “58횝니다.” 그러자 광주거사님이라고 불렸던 그 분이 머리에 쓰고 있던 도리우찌를 벗자 빛나는 대머리가 드러났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통합으로 하면 내가 49회가 되지요, 아마.” 옆에 서있던 목탁스님께서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엥, 두 사람 기수가 왜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지? 이쪽 양반도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는데.” 광주거사님이 손에 들고 있던 헌팅 캡을 다시 머리에 얹으면서 말했다. “내가 올해 일흔인데 학교를 빨리 들어갔거든요.” 내가 다시 고개를 꾸벅하면서 말했다. “선배님을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12시 가까이 되자 점심공양 준비도 거의 다 되고 도량과 창고도 어느 정도 청소와 정리가 끝난 듯 보였다. 공양간에 모두 모여 커피를 한 잔씩 하면서 앉아있는데 스님께 학장님으로부터 문자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고속도로가 너무 막혀 이제 여산휴게소에 와 있다는 연락이었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쳐다보던 스님께서 “그렇다면 여산휴게소에서 광주까지 두어 시간, 그리고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여기까지 오려면 초행길이라 오십여 분은 족히 잡아야할 텐데 대략 오후3시가 넘어야 도착하시겠네요. 그러면 점심공양이 아니라 저녁공양을 하게 되겠구만이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회장보살님이 목탁스님을 슬쩍 쳐다보자 한 번 더 퉁겨주듯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들은 점심공양을 일단 하고봅시다.” 서울과 광주에서 온 보살님 두 분이 손맛을 낸 밥상은 과연 뭐가 달라도 달라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맛났던 쌀밥에 윤기가 더 줄줄 흐르고 된장을 푼 아욱국도 왠지 깊고 아득하며 풍성해보였다. 고소한 콩자반에 달콤 짭조름하게 씹는 맛의 멸치볶음과 파랗고 싱싱한 시금치나물과 무생채도 새벽하늘처럼 빛나 보였고, 광주에서 준비해온 얼큰한 조기찜과 입에 착 앵기는 병어조림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의외로 맛이 있었던 송이버섯무침과 대충 비벼낸 듯한 배추 겉절이도 시원하고 슴박한 맛이 일품이었다. 밥을 먹고 한 그릇을 더 퍼서 먹고 숭늉에 누룽지까지 권하는 대로 먹었더니 배가 부르고 슬며시 잠이 왔다.
공양이 끝나자 식탁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시고 난 뒤 차실로 가서 빌려가려고 모아놓은 30여 권의 책을 종이 백에 담고 목탁스님께서 챙겨주시는 청국장과 말린 나물과 알토란과 장두감과 두 바가지 가량 퍼서 담아놓은 된장과 밭에 가서 뽑아놓은 배추와 무 다발을 차례대로 차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차실에 모여 정식으로 차를 한 잔씩 하자는 목탁스님의 말씀을 따라 차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흐리고 안개가 짙게 끼어있는 날이라 성질이 따뜻한 보이차가 몸에 좋을 거라면서 갈색의 보이차를 맛있게 우려내어 찻잔을 돌렸다. 찻잔이 돌아가면서 세상사는 이야기들과 재미난 이야기들과 어렵고 힘든 이야기들이 갈색의 보이차를 담은 찻잔처럼 세상을 돌고 돌아 고루고루 우리들 주변을 쉼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어느 늦가을 날 짙은 안개 감감 도는 산 깊은 토굴에도 시간은 누군가의 뜻대로 흘러가서 오후2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가 법당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는 타고 남은 초燭와 향촉香燭의 잔향殘香이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장방형 세로로 긴 법당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모셔져있었다. 법단 위 모셔진 부처님 뒤편으로 탱화대신 한자漢字로 써 내린 반야심경般若心經 두 폭 짜리 병풍屛風이 펼쳐져있었는데, 절에 다녀간 사람들 중에서 이 병풍을 욕심내는 분들이 많더라는 이야기를 지난번 스님께서 내게 해주신 적이 있었다. 물론 이 병풍 속의 반야심경을 쓰신 스님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이고 목탁스님과도 수십 년 지기의 도반이어서 “그럼 같은 반야심경으로 글을 하나 더 써달라고 그러시지요.” 라고 말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건너보았더니 그 스님 말씀이 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써 드리겠는데 저 만큼의 글을 다시 써낼 자신이 안 선다고 그러더라고요. 한 사람의 한 손에서 나온 같은 솜씨라도 그때그때 마음가짐이나 연습량, 쓰고자 하는 열정, 또는 주위환경이나 연령대 등등으로 글의 내용이나 질에 차이가 나는 모양이더라고요. 집이도 그렇지 않아요? 어느 날 시 한 편을 잘 썼다고 해서 항상 그만한 수준의 시를 쓰고 싶을 때마다 팡팡 써내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요. “나는 목탁스님의 말에 수긍을 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흥, 그렇겠네요, 스님. 시詩를 예로 들어주시니 금방 이해가 가네요.” 부처님 앞에 앉아서 촛불을 켜고 향을 태운 뒤 잠시 기도를 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눈을 감고 부처님의 이미지를 가슴속에 모시고 그렇게 기도를 한동안 올렸다. 어떤 때는 그렇게 기도를 진심으로 올리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뭔가 마음 가운데 중심이 올바르게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법당에서 나와 공양간으로 건너가는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소쿠리와 채반에 널어두었던 장두감 슬라이스의 푸른 옷이 성북동보살님 손에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곰팡이 냄새가 방안에서 거의 나지 않았다. 사실은 온도와 시간의 상관관계나 부피의 변화에 의한 차원의 진행에 관련해서 여러 가지 체험을 안겨준 푸른곰팡이 냄새를 한 번 더 마시고 싶어서 건넌방에 들어갔던 것인데 곰팡이 냄새는 하나 없고 맑고 깨끗한 공기만 가득 돌아다녀서 못내 아쉬운 마음이 일어났다. 건넌방에 잠시 서 있다가 마루로 나와서 목탁스님과 다른 신도님들께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이번 방문길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해드리지 못한 것을 매우 섭섭하게 생각한다면서 차창車窓 너머로 내손을 꼭 잡으셨다. “나는 언제해도 이별에는 서툴러서 말이요 잉. 아무튼지 날씨도 이런데 조심해서 잘 올라가시오 잉. 선심행 보살님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나는 법당 처마의 줄에 실로 매인 채 줄줄이 걸려있는 푸른 옷의 나체裸體 장두감을 흘낏 쳐다보면서 스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예, 그러지요. 그럼 스님, 언제 또 만나 뵙도록 하지요.” 차는 서서히 전조등이 두 눈처럼 붙은 머리를 안개 낀 계곡 쪽으로 두르고 대낮이지만 양 눈을 멀리 밝힌 채 도량을 빠져나갔다. 아직은 토요일 오후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은 밤이 되어도 혹은 새까만 밤중이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벌써 어둑심한 분위기가 허공중에서 슬며시 묻어나고 있었다.
화순과 광주 외곽순환도로를 거쳐 호남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다행히도 호남고속도로는 차량들이 밀리지 않아 제 속도를 내면서 달려갈 수 있었다. 이서휴게소에서 한 번 쉬었다가 여산휴게소를 막 지나쳐 천안-논산 고속도로로 진입했는데 그때까지 도로상황은 여전히 좋았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잠시 후 오후5시가 넘어서면서부터 사방이 슬슬 어두워오기 시작하는데다 이인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차량들의 속도가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라면 서서히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장거리 운행 시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다보면 대체로 두 시간 가량 운전을 한 뒤 첫 번째 휴식을 갖는데 이쯤 되면 출발할 때의 긴장이 풀어지고 도로상황이나 속도에 대한 부담감도 없어져서 만약 피곤하다거나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슬슬 졸음이 밀려오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간밤에 잠을 푹 자지 못 했던가하고 생각해보았으나 복잡한 상념들이 얼크러져 정확하게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하여튼 졸음이 처음에는 미약하게 그리고 머지않아 창대하게 코앞으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눈앞의 사물이나 저 멀리 자연경관이 아물 아물거리고 머리로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저 밑 모를 깊은 바닥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순간순간 받아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가슴속의 몸 중심부가 가장자리부터 분자상태로 흩어져서 모든 입자粒子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면서 사방으로 진동하는 듯한 진저리나는 쾌감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들이 졸음을 통해 느끼거나 바라보는 현상들은 화면 위에서 빛의 현란한 착시현상을 바라보는 경우와 같은 것이어서 면面 위에서 일어나는 2차원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가 빛에 의해 화면畫面에서 생성되는 2차원적인 모습이라면 잠속에서 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도 화면에 비친 그것처럼 뇌 속에 빛의 잔상이 남아있는 2차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시에서 졸음을 통한 잠으로의 의식 전환이란 입체적 부피가 존재하는 3차원의 세상에서 빛이 면 위에 잔상을 남기는 2차원으로의 진행을 말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우리들은 생시生時와 수면睡眠을 통해 수시로 3차원과 2차원을 왕래하고 있으며 여기에 어떤 종류의 강력한 자극으로 시간이 개입하게 되면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4차원으로의 진행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따뜻한 온도와 습기로 인해 나체 장두감에서 피어난 푸른곰팡이 냄새가 매개媒介가 되어 나는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런 무수한 생각의 편린片鱗들 사이로 나의 흐릿한 시야視野는 차츰 한 면으로, 또 한 선으로, 그리고 한 점으로 모아졌다가 다시 쩌르르한 등골의 반사 신경으로 인해 부피와 색깔이 있는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는 했다. 저만큼 정안휴게소 안내판이 보였다. 나는 졸음과의 치열한 다툼과 차원의 진행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가기위해 정안휴게소로 차를 몰았다. 대기의 어둠과 등불의 밝음 속에서 냄새 맡을 수 있고 소리와 색깔이 존재하는 가로, 세로, 높이의 부피들로 세상은 가득 차있었다. 나는 주차장 한쪽에 주차를 시키고 차에서 내려 그 생생한 부피들 사이를 걸어 돌아다녔다.
(- 이틀은 雨, 이틀은 霧, 내가 아직도 졸음으로 보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