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평화협정은 역사적인 승리였다고 선전하였던 북베트남의 전후 실정은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처절한 8년 전쟁을 치른 1954년 보다는 나았다. 그때는 다시 미국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기약 없는 전쟁의 길 밖에 없었으나 이제는 미군의 개입만 없으면 통일을 할 수 있는 확실한 전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8년간 미국의 북폭으로 영토는 황폐하여졌고 국민은 헐벗고 굶주렸다. 산업 활동도 거의 마비되었다. 민생, 군비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당 정치국원들도 계속 군사적 총 공세를 준비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지압(Giap)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와 트룽 친(Troung Chin)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당장은 온건론이 우세하였으나 당 제1서기 레 두안(Le Duan)은 균형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트룽 친

군인들을 치하하는 레 두안
지압의 집념은 끈질겼다. 1946년부터 1972년까지 26년 동안의 전쟁을 주도하면서 때로는 무모한 대공세까지도 서슴치 않고 밀어붙였던 지압은 이번에도 대공세를 취하기 위한 착실한 준비부터 시작하였다. 부상병을 치료하고 병력과 장비 및 물자를 보충하면서도 대공세를 취하는 필수적인 보급로를 확장하고 개선하는데 진력하였다. 1959년도부터 호치민 통로를 개설하기 시작한 선견지명과 같은 맥락이었다.
우선 보급로를 단축시키기 위해서 DMZ 바로 남방에 있는 동하(Dong Ha) 항을 이용함으로써 북베트남 내의 보급기지로부터 사이공 지역까지 2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에는 75일이 소요되었고 거기에다 미 항공기의 끊임없는 공격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었다. 야간에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유유히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호치민 통로도 로폭 8m의 복차도로로 확장하는 공사가 개시되었다. 도한 전천후 사용이 가능한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진흙과 석회를 혼합하여 노면을 단단하게 포장하는 공사도 착공되었다.
군 병력, 청년대 등 3만여 명의 추가병력이 투입되었고 수천 대의 차량이 동원되었다. 각 지역 보급을 위한 지선도로까지 포함하여 연 2만여 ㎞의 도로였다. 송유관 공사도 시작되었다. 동하로부터 중부 고원지대와 사이공 북방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 록닌(Loc Ninh)까지 장장 5,000㎞의 장거리 구간에 구축하는 공사였다.
이 대공사는 1975년 3월 이전까지 거의 완공되었다. 17~18세 때부터 이 통로개설 작업에 참가했던 병사들이 이제는 30대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1973년 2월 하순부터 정치국원 토 후우(To Huu)와 군 총참모장이며 1975년 공세를 현지에서 총지휘하였던 반 티엔 둥(Van Tien Dung) 대장이 남베트남 내에 있는 주요 부대를 순시하였다. 목적은 치하와 격려, 그리고 현상파악이었다. 남베트남 3, 4군단 지역의 정치, 군사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는 북베트남 노동당 남부 지부(COSVN)에서도 현 국제정세와 베트콩의 전력약화로 3~5년 이내에는 새로운 대공세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토 후우

반 티엔 둥
1973년 6월 닉슨과 브레즈네프의 정상회담이 끝난 후 8월과 9월에 레 두안과 팜반동(Pham Van Dong) 수상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원조를 구걸하였다. 그렇게 따뜻한 환대는 받지 못하였다. 경제원조의 사용을 감독하겠다고 나왔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래도 향후 2년간 15억 달러의 원조는 북베트남에 절대 필요하였다.
1973년 10월에 제21차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아직은 휴전을 성사시키고 유사시 남베트남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 닉슨 미 대통령이 건재하였고 중, 소의 지원도 시원찮아 온건론 즉 신중론이 우세하였다. 1979년 이전까지는 결정적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났다. 보 구엔 지압은 유약한 온건론자들과 먼저 투쟁을 하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한 군사적 상황을 조성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회의 결과만은 대남 무력통일에 총역량을 집중한다는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회의가 끝난 며칠 후인 11월 6일 지압은 남베트남 2군단 지역의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쾅둑(Quang Duc) 성내 남베트남군의 3개 전초기지를 사단규모의 부대로 집중 공격하여 이를 탈취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반응을 기다렸다. 반응은 엉뚱하게도 미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 없이는 60일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제한하는 ‘전쟁수행에 관한 결의안’이 11월 7일 미 의회에서 가결(닉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었음)된 것으로 나왔다. 강경파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아직은 분위기가 성숙되지는 못하였다.
이미 3만 명 이상의 훈련된 간부급 민간인들을 남베트남의 점령지에 보내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증편 및 보충용 병력으로 1973년 말까지 7만여 명의 전투 병력을 남하시켰다. 각종 대공화기, 장갑차 등 주요 전투장비는 획득되는 대로 남으로 보냈다.
1974년 3월초 지압은 전 군의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과 주요참모들을 하노이에 소집하여 전군회의를 개최하였다. 남베트남의 경제를 마비시키고 남베트남군에게 혼란과 소극적인 수세를 강요하는 기습, 차단, 파괴, 전초기지 탈취 등의 공세를 남베트남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실시하도록 지침을 하달하였다. 전면공세가 가능한 유리한 여건이 조속히 조성되어야 반대파들을 설득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망하는 과정 보면 섬뜩할 정도...북베트남이 경제 산업 기반 없이도 충분히 장기전을 치뤄낸 걸 보면.... 저당시 살았던 남한 지도층, 국민은 정말 섬뜩했을 듯 하네요.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도 한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며 자신감을 가졌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