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아기들이 태어나서 심방을 갔습니다.
가장 이쁜 것 중의 하나가 옹알이입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입을 벌려 무언가 표현하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그저 귀여운 것이 아니라 대단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도약을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옹알이 즉 ‘말 배우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놀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오해서가 아니라 ‘겨우?’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아니면 난 그 수준은 벗어났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요.
거두절미하고 성서에서 들어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라 했으니 그리스도를 신앙함은 곧 말 배움입니다.
(말 배움, 말함, 말 걸기, 말대로 살기... 여러 표현이 가능합니다)
복음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 기쁨의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는 곧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포는, 우리 교회가 무슨 원대한 사업을 하고,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세련되며 얼마나 학식이 많으며, 우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영향력이 있으며, 무슨 사회적 공헌을 크게 한다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저러하다면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냥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지요.
나머지는 곁들이입니다.
너무 단순한가요?
이것 갖고는 성에 차지 않는가요?
무엇을 드러나게 내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이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기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말씀에 관심 쓰는 것은 아무런 행위를 안 한다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생동력 있는 것 같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성서는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브리서 4:12 새번역).”
주의 말씀에 심취한 자는 그냥 누워서 꼼짝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을 탐구하며 성서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리고 내게 실천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러지 못함을 기억하면서 아파합니다.
어찌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장은 그리스도께서 어린 나이에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논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던 부모는 아들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걱정합니다.
그들이 길을 거슬러 올라가 성전에 다시 왔을 때 그가 선생(율법학자)들과 있는 것을 봅니다.
부모는 그가 제 할 일 즉 부모와 동행해서 그들의 고향에 갈 일을 하지 않았기에 역정을 냅니다.
이는 모든 부모가 같은 심정이겠지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하십니다.
그가 자신이 ‘있을 곳’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말씀을 논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면 그의 말씀이 있는 곳을 찾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그의 말씀을 찾으면 됩니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무엇으로 분주합니까?
사실 다른 이들을 거론할 계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질문은 생애 중에 계속될 것 같습니다.
첫댓글 귀여운 옹알이 단순하지만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