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긴 마을(해가 붉은 마을)/조혜경
수탁이 목청을 울렸다. 횃대가 휘청일 정도로, 긴 목을 빼고 울대를 부풀렸다. 나는 새벽 선잠에서 깨어나,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동쪽 쪽창을 두드리던 아침 해는 아직 일어날 기색이 없다. 아랫집 연수 아빠가 경운기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6시, 썰물이다. 남편과 나도 챙겨 놓은 옷을 주섬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현관문 틈새로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마당으로 내려서니, 마주 선 감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밑둥치가 유난히 검다. 사각거리던 감나무 이파리도 거의 다 떨어졌다. 휑하니 비어버린 허공에는 감 몇 개가 가로등 불빛에 제 몸을 밝혔다. 마른 가지 사이로 별들이 깜빡였다. 여러 해 버텨 온 세월이 안쓰러워, 차마 베지 못한 감나무 세 그루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농사를 망치는 그늘 때문에 감나무를 베라고 해마다 성화였다.
감나무 그늘은 땀을 식히기에 그만이었다. 한낮, 쉴 새 없는 텃밭 농군의 나날을 버티게 해 주었다. 한여름에는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고, 늦가을엔 흉년의 쌀밥 내음만큼 달콤한 홍시 서너 바구니를 안겨주었다. 찬 바람이 소슬 거리면, 무성했던 잎들은 숨어있던 감들을 앞으로 내몰고 자신들은 바람을 따라 굴러갔다. 한번 헤어지고 나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내일의 삶을 잇는 것이 소임이라 여겼다.
바닷일은 짝이 맞아야 했다. 주꾸미 그물을 건져 올리는 일은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배를 끌고 나갔다. 여남은 개의 소라 집마다 들어앉은 주꾸미를 빼내고, 소라를 다시 바다에 넣었다. 짠물에 젖은 줄과 소라 무게로 어깨가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소라를 건지다 보면, 붉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밀물이 뱃전에 철썩였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바다는 순식간에 물이 차올랐다. 더 욕심을 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다가 허락하는 만큼 먹거리를 얻어 목숨을 연명하면 그뿐이었다.
남편은 물로 내려섰다. 부두를 향해 뱃머리를 돌려놓고는 경운기를 가지러 갔다. 주꾸미잡이를 갔던 배들이 경운기에 매달려 뭍으로 올라갈 차례를 기다렸다. 그 순간이 하루 중 유일한 나만의 휴식시간이었다. 남편이 되돌아오는 시간은 짧았다. 경운기에 배를 엮었다. 부두로 난 물길을 따라 배들은 줄줄이 애벌레처럼 움직였다. 경운기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등이 날이 갈수록 더 구부정해졌다. 어느새 귀밑머리에도 서리가 내려앉았다. 가슴이 아린 순간도 잠시, 배가 부두 위에 단정히 올라 앉았다. 그래도 오늘은 잔잔한 파도가 고맙고, 한 통 주꾸미가 신선했다.
늦가을, 고구마는 벌써 아들네 집으로 신접살림을 냈다. 벼들도 콤바인에 실리며, 들녘에는 알록달록 짚 덩이가 뒹굴었다. 들깨도 털고 나면, 집집이 감이 익었다. 빨간 열매가 주렁거렸던 고추도 둥치가 들렸다. 채 익지 못한 꼬마 고추로 담근 절임 반찬도 곳간 선반에 놓였다. 일 년의 땀방울이 선반에 늘어섰다. 이파리 밑에서 숨어 자란 주홍 봉오리는 얇게 썰어 말렸다. 달콤한 반건시와 삶은 고구마가 냉동고 옥수수 옆에 자리를 잡고 겨울 채비를 시작했다. 텃밭에는 김장을 위한 배추, 무, 갓이 곧 올 서리를 기다리며 청순한 싱그러움을 뿜어냈다.
갈바람이 맞서는 날에는 바닷일을 쉬었다. 아낙네들은 바쁜 농사일을 대충 마치고 마을 회관 앞 평상에 모여들었다. 모처럼 짬이었다. 감나무 서너 그루를 거느리고 동네를 지켜온 느티나무 아래에서는, 묵은 숨이 트였다. 찐 고구마와 홍시, 갓 담근 겉절이가 서로의 선을 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식혜 주전자가 입을 기울이며 흰 밥알을 띄웠다. 너른 품들이 더 아픈 품들은 껴안았다.
눈치를 살피며 남정네들도 끼어들었다. 이어지는 수다의 선두는 삼거리 술꾼 아저씨의 젊은 시절이었다. 논두렁에 미끄러져 물 논에 얼굴이 처박히던 이야기는 한바탕 웃음으로 피곤을 긁어냈다. 순식간에 참소라와 해삼을 한 통씩을 주워 올리던 마을 앞바다의 보물 섬 ‘정한여’의 옛 추억도 단골손님이었다. 싹쓸이 낚시꾼들과 기업형 어선의 갈퀴에 주꾸미 구경도 어렵다는 한숨이 들리면, 다들 평상 아래 기운 없이 널브러진 신발을 찾았다. 떠돌던 가랑잎은 도랑으로 스러지고, 해송 그림자가 길을 가로질러 드러누웠다.
서성리는 숨어 사는 마을이었다. 산들의 어깨로 둘러싸여 바로 옆 고속도로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 너머에는 하루에도 수만 대의 차들이 속도를 내지만, 서성리 농로에는 간간이 트럭이나 경운기가 지날 뿐이었다. 마을을 감싸 안은 언덕이 비단뱀의 등처럼 구불거렸고, 철새 한 무리가 빈 논을 채우기도 했다. 가끔, 마을 돌담을 훔쳐보던 비행기가 흰 숨을 내쉬며, 텅 빈 하늘에 끼어든 구름 사이로 꽁무니를 감췄다. 이곳 사람들은 발그레한 여명이 밝기도 전에 하루를 맞이했고, 낮에는 줄곧 바다와 들녘에 살았다. 하늘이 홍시 빛 여운으로 서성이면 비로소 집에 몸을 들였다.
느림보 해는 종일, 사람들 곁을 맴돌았다. 바다 바라기를 하고 앉은 나지막한 집들은 양팔을 벌린 채 해의 꽁무니를 밀었다. 서쪽 구름에 걸린 해가 숨을 다독일 즈음이면, 노을도 붉게 타올랐다. 바다로 스며드는 햇무리를 비집고 샛별이 깜박였다. 긴 하루를 달려온 해는 친정집 돌아보는 새댁처럼, 마지못한 발걸음으로 수평선을 넘었다. 동쪽 하늘에 뜬 너덧 별들이 가로등 불빛과 견주며 저마다 가는 빛을 깜빡였다.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청보라 빛 하늘이 검은빛을 감춘 대 번져왔다. 창 밑을 기웃거리던 어둠도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다. 길고양이도 입맛을 다시며 비밀의 보금자리로 발길을 서둘렀다. 별똥별 하나가 긴 숨을 내뱉으며 검은 바다로 자맥질했다.
첫댓글 해가 긴 마을들의 동물들에 대한 묘사가 아주 좋습니다. 멋져요.
해가 긴 마을은 농어촌의 넉넉함과 바쁜 나날이 번갈아 살아지는 곳이어요. 따로 휴일이 있는 곳이 아닌, 눈비나 바람 불면 그 날이 쉬는 날이지요.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갯마을 생활은 풍요 그 자체입니다.
농부와 어부로 결합된 다양성은 글 읽는 재미는 더합니다.
제가 자주 가는 서천은 갯벌 체험과 농사의 함께 하는 곳이라 더 풍요롭습니다. 그 넉넉함이 글을 통해 전달되기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