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한무제(漢武帝)
1. 한무제(漢武帝)의 등장
한 고조는 백등산에서의 ‘평성의 치’란 굴욕을 당한 이후 “흉노와는 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체 세상을 떠난다.
한 고조 유방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한(漢)은 어쩔 도리가 없다.
힘이 없으니 온갖 트집을 잡아 만리장성을 자기 집 안방 문지방 드나들듯이 오가며, 약탈을 일삼는 흉노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얻어맞기만 하니 속이 탄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어쩔 수 없다.
흉노(匈奴: 흉악스러운 노예 같은 놈)라고 글로 쓰면서 욕을 해보고, 읽으면서 욕을 해보았자 그것뿐이다.
그렇게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기원전 141년 한 무제 유철이 16세로 즉위하자, 곧 평성에서 받았던 증조부인 한 고조의 굴욕을 씻으려고 흉노 토벌을 기획한다.
*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
한 무제의 명령을 받고 서역 으로 떠난(서기전 139년경) 장건이 10여 년 만에 비참한 몰골로 귀국했다.
장건의 임무는 흉노에게 맞서기 위해 중앙아시아에 있는 대월지 라는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흉노에게 사로잡힌 장건은 그 곳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내며 흉노 여인과 혼인해서 자식까지 낳았다.
가까스로 흉노를 탈출한 장건은 한혈마 로 유명한 대완을 거쳐 대월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흉노에게 밀려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대월지는 강성한 흉노가 두려워 한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 소득 없이 대하 (박트리아)를 거쳐 남쪽으로 돌아오던 장건은 다시 흉노에게 잡혀 고생한 끝에 겨우 탈출해 빈손으로 돌아왔다.
출발할 때 함께 간 100여 명의 부하 가운데 단 한 명만 장건의 처자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록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장건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교역로와 국가들에 대한 정보를 중국에 알리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장건은 다시 한 번 서역에 파견돼 고대의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개척한 영웅으로 남게 된다.
2. 실크로드(Silk Road)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 지방에서 시작하여 하서회랑 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 북변을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 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른다.
이것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중 동쪽 부분은 중원에서 둔황[敦煌]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역대에는 장안(지금의 시안 또는 낙양)을 기점으로 했고, 하서회랑이 중요한 길목이었다.
중앙 부분은 둔황 서쪽에서 파미르 고원 동쪽까지이며, 이 길은 타클라마칸(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 사막에 가로막혀 사막 남쪽(쿤룬 산맥 북쪽)과 사막 북쪽(천산 산맥 남쪽)으로 가는 두 길로 나뉜다. 서쪽 부분도 중앙 부분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두 갈래가 있어서,
남로 南路는 파미르 고원의 쿠시쿠르간에서 서쪽으로 쿠샨 왕국에 이르고, 여기서부터는 뱃길로 천축(인도의 옛 이름)에 들어갈 수 있다. 인더스 강을 따라 내려가 아라비아해와 홍해로 들어가서 지중해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른다.
북로 北路는 강거(康居 : 한[漢], 위[魏] 시대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스 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투르크계 유목민족국가)에서 서쪽으로 이란을 지나 곧장 지중해와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거의 수천 리로 이어져 지금의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10여 개 국가를 거쳐간다. 이 세 부분 가운데 동쪽 부분은 역사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중앙과 서쪽 부분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 실크로드(Silk Road)의 어원 語源
비단길을 영어로 ‘실크로드’(Silk Road)라 한다.
그런데, 비단을 왜 실크(Silk)라고 호칭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비단의 원산지가 중국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면 ‘비단’을 중국어로는 ‘금’ 錦, ‘견’ 絹, ‘백’ 帛 등으로 표현하는데, ‘금’은 ‘jin’ ‘견’은 ’juan' ‘백’은 ‘bo'로 발음된다.
위의 발음들은 ‘실크’ (Silk) 라는 음원과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 해답은,
요하 문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홍산지역에서 옥잠 玉蠶이 여러 개 발굴되었다.
귀한 옥으로 만든 누에 모형 模型.
'옥잠 玉蠶'
기원전 3천 년,
당시에 이미 동이족은
뽕잎을 먹고 자라는 누에나방의 애벌레인 누에를 기르고,
누에의 고치로 부터 비단실을 뽑아내어 비단천을 짜고, 비단옷을 입었다는 증거다.
단군조선과 부여를 거쳐 고구려 시대에는 비단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비단의 원산지가 요하의 홍산 지역이며,
이곳은 동이족의 원류 源流, 배달국과 고조선의 영역이다.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보온성 그리고 아름다운 무늬가 서양 西洋의 로마에 알려지자,
그때까지,
목화로 만든 무명 천만 알고 있던, 로마 귀족층에서는 문화적인 충격이 대단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나 중국측으로 비단 주문이 쇄도하였다.
처음에는 서역으로 고구려에서 만든 완제품 完製品인 비단옷이나 비단 이불이,
로마로 수출되어 서방 西方으로 전래 되었다.
그런데 완제품은 기성복이니 로마인의 몸에 맞지 않는 제품들이 많았다.
그리고,
완제품은 부피도 크다.
부피가 큰 만큼 지나는 경로 徑路에 자리한 국가들에게 통행료를 많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역 상인들은 반제품 半製品인 비단 천을 가지고 갔다. 부피가 7할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통행료도 3할이 절감되었다. 이는 상인으로서는 엄청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상인들은 반제품도 부피가 크다고 생각하고, 드디어는 비단 원사 原絲를 가져가기 시작하였다.
실 꾸러미를 싣고가니 부피가 또, 7할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통행료도 대폭 절약되었다.
상품 운송 도중, 비를 맞거나 악천후에 노출되어 실 꾸러미가 훼손 毁損되었을 시에도, 문제가 발생 된 그 실 꾸러미만 포기하면 된다.
완제품 完製品이나 반제품 半製品을 손상 損傷시키는 것에 비해, 손실 損失이 대폭 줄어들게 된다.
당연히 운송의 전반적인 위험성(리스크. risk)이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귀한 비단의 실 꾸러미의 끝이 헝클어지면 야단이 난다.
서역 상인들은 고구려의 요하나 중국의 서안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바로 가는 대상 大商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국경선에서 물품을 인수인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보험 保險의 개념이 없는 시절이라, 그 상황에서 운송의 위험성을 최소화 最小化 시킬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그러니 물품인수인계를 적게는 서너 번, 많을 때는 십 회를 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그런데, 누에고치로부터 비단실 원사 原絲를 뽑아내고, 실 꾸러미를 만들 때 작업자에 따라, 실 꾸러미를 감는 방법이 제각각이었다.
작업의 동일성. 규격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의 여건상,
작업의 단일화나 통일성을 기대한다면 너무나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그래서 상인들은 수레에 실린 실 꾸러미를 인수인계할 때,
늘 하는 말이 실 꾸러미를 들고 실 끝 즉, 실 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실~끝” “실~킅”을 강조하였다.
“실 끝”이라니,
순수한 고구려 말이다.
고구려 언어로 ‘이 수레에 실린 실 꾸러미의 실 마리는 여기다’ 라고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 비단길의 주요 통로마다, 인수인계나 비단을 사고 팔 때는,
‘실킅’이란 단어가 여기저기서 난무한다.
도매시장 都賣市場이다.
국제 비단 도매시장인 것이다.
이국 異國의 돈 많은 상인 商人이나, 고객 顧客을 남보다 빨리 잡아야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상품설명에 철저한 ‘고객우대 설명회장 說明會場’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호객행위’ 呼客行爲다.
그렇게 도매시장 곳곳에서 "실킅"이란 단어가 남발 濫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영역인 요하 遼河지역에서 비단이 처음으로 생산되었고,
따라서 품질도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하다는 것을 당시의 상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비단의 원조 元祖인 원산지 原産地, 고구려 발음으로 더 크게 외치며,
다른 판매 경쟁자들 보다 더 큰 목소리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이 비단실은 원산지가 고구려(Made in korea) 제품이다’라고 원산지 原産地를 과시 誇示하는 언행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원조 격인 원산지 제품이라면, 품질과 신용도가 높은 만큼,
가격을 더 높게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양을 판매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면서 상인들은 눈치를 봐 가면서 중국산(Made in china) 제품들을 슬쩍 끼워 넣어버리거나,
대범한 상인들은 수레 자체를 바꿔치기해버린다.
‘실킅’을 로마(Rome)의 라틴어(lingua latīna)로 연음화 連音化시키면 자연스럽게 ‘실크’ ‘Silk’가 된다.
‘실크’라는 단어는 그렇게 비단길 상인들이 ‘질 좋은 원산지 비단’을 지칭하는 용어 用語로 변모되고 정착되었다.
‘실크’의 어원이 고구려의 말인 ‘실끝’에서 유래된 것이다.
‘실크’는 비단의 원조 元祖를 의미하는 순수한 고구려의 언어 言語인 것이다.
고구려의 국력이나 선진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우리 단어다.
* 사진 - 옥 잠 (옥으로 만든 누에)
한편,
한무제는 군마 軍馬 육성과 군사 조련에 심혈을 기울인다.
현숙한 황후, 위 자부의 내조 內助로 황실이 안정화되자, 누이 평양 공주의 부군 夫君이자,
처남인 위청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흉노를 무찌르기 시작한다.
비장군 飛將軍 이광 李廣의 뒤를 이어 위청은 숙련된 기마병을 이끌고 흉노의 배후 背後를 급습한다.
늘 공격만 일삼았으니 수비체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흉노 군은 허를 찌른 위청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어 등장한 위청의 생질인 청년장수 곽거병 霍去病의 맹활약으로 흉노의 서쪽 방위선은 붕괴되었고,
한무제는 하서회랑 河西回廊 (동서의 길이는 약 1,000km이나, 남북의 너비는 수십km밖에 안 되며, 고도는 해발 1,500m 내외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산맥 앞쪽의 비탈진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에
하서 4군을 설치하는 등 서북방 판도 확장을 기했다.
- 6. 元甫
첫댓글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실크의 어원에 대해 알려줘 감사합니다.
널리 알려줘 정설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봅니다.
깊은 관심을 표명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동참하면, 좋은 결과도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