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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 주사(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떤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깨고 그를 낳았으므로 몽란(夢蘭)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출생한 때부터 특이하게 생겼으며 어깨 위에 검은 사마귀 일곱 개가 마치도 북두칠성(北斗) 같이 배열되어 있었다. 나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떤 날 그의 어머니가 낮잠 자다가 꿈에 검은 용(黑龍)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 간 것을 보고 놀라서 잠이 깨어 나가 본즉 그것은 몽란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된 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공민왕 9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삼장(三場-초장, 중장, 종장‘終場’)에서 연이어 첫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제 1인으로 뽑혔다. 공민왕 11년에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선발 배치되었고 동 13년에 태조 이성계를 따라 삼선 삼개(三善三介)를 화주(和州)에서 쳤다. 누차 전임하여 전농시승(典農寺丞)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 져서 사대부(士大夫)들도 모두 초상 난 후 100일만 되면 부모 상을 벗었는데 정몽주만은 부모상에 분묘를 지키고(盧墓) 애도와 예절이 모두 극진하였으므로 왕이 그의 마을을 표창하였다. 16년에는 예조 정랑(正郞)으로서 성균관 박사(成均博士)를 겸무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 들어 온 경서(經書)들은 다만 《주자 집주(朱子集註)》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정몽주는 그것을 유창하게 강론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 뛰어 났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의심하더니 그 후 호병문(胡炳文-중국 원나라 인종 때의 유학자)이 쓴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참조해 본즉 그와 합치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여러 선비들이 더욱더 탄복하였다. 이색은 빈번히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이러저러하게 함부로 하는 말도 그 어떤 것이나 모두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그를 추대하여 우리 나라에서의 성리학(性理學) 창시자로 평가하였다. 17년에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전임되었으며 20년에 태상 소경(大常小卿)으로 되었다가 얼마 후에 성균 사성(司成)에 전임되었다. 21년에는 서장관으로서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남경에 가서 촉(蜀) 나라를 평정한 데 대하여 축하하고 돌아 올 때에 바다 가운데 있는 허산(許山)에 와서 태풍(颱風)을 만나 파선을 당하고 떠다니다가 바위 섬에 닿았다. 이때 홍사범은 익사하고 익사를 면한 자가 열 명 중에서 겨우 두 명이었고 정몽주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살았으며 말 다리를 베어서 먹으면서 13일 동안을 경과하였다. 이 정보가 명 태조에게 전해지자 그는 선박을 보내 정몽주를 데려다 후하게 구호해 준 다음에 귀국시켰다. 신우 원년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임명되었다가 성균대사성으로 전임하였다. 이보다 앞에 명나라가 처음 건국되었을 때 정몽주가 왕에게 힘써 요청하여 다른 나라보다 먼저 국교를 맺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민왕이 피살되고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것으로 하여 국내가 뒤숭숭하여 감히 중국과 사신을 교환하지 못하게 되자 정몽주는 다시 사리를 분석하여 말하기를 “근자에 발생된 사고에 대하여는 응당 빨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실의 진상을 명확히 해명시키고 의심을 풀게 해야 할 것이지 어찌 자신이 먼저 의심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화를 끼치게 하리요”라고 하니 왕은 이때에 비로소 사신을 보내 공민왕이 피살된 것을 통지하고 또 김의의 사건에 대해서도 요해시켰다. 이때 북원(北元)이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조서”를 보내온 데 대하여 권신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은 다시 원나라와 친하려 하여 그 사신을 맞을 것을 의논하므로 정몽주는 문신 10여 명과 함께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천하와 국가를 운영하는 자는 반드시 큰 계책을 먼저 정해야 하는바 그것이 정해지지 않으면 인심이 의아하게 되는 것이니 인심이 의아하는 것은 온갖 일에 화를 미치게 하는 것이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해외에 치우쳐 있으면서 우리 태조(王建)가 중국 당나라 말기에 일어 난 때로부터 중국과 국교를 맺어 왔는바 국교를 맺는 데 있어서는 천하에서 정의로운 군주가 누구인가를 살펴 볼 뿐입니다. 지난날 원나라는 스스로 피난하게 되었고 명나라는 새로 일어나 중국을 전부 통일하였으며 돌아 가신 우리 왕은 천명을 환하게 알고 국서를 보내 외교 관계를 맺으니 명태조도 만족히 여겨 우리 조정을 승인하고 방물을 교환한 지가 이미 6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전하가 즉위한 초기에 반역자 김의가 중국 사신을 전송하려 가던 도중에서 그를 제 마음대로 살해한 다음 제 나라를 배반하고 북원에 들어 가 원나라의 서손과 함께 심왕(瀋王)을 들여올 것을 꾀하였습니다. 그가 이미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또 제 임금을 배반하였으므로 그 죄악이 매우 중하니 마땅히 그의 죄상을 똑 바로 규정한 다음 밖으로 명나라에 통고하고 안으로 지방관들에게 표고하여 청토(請討)하고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다만 김의의 죄를 문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를 시켜 북원에 토산물을 보냈으며 오계남(吳季南)은 국경 지키는 무관으로서 정료위(定遼衛)의 세 사람을 제 마음대로 죽였고 장자온(張子溫) 등은 김의 일행의 인물인데 그 사변을 정료위에도 보고하지 않고 기탄 없이 귀국하였으나 역시 방치하고 문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원 사신이 오자 대신을 보내 국경에서 영접할 것을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북방을 격노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내침을 지연시키려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 원나라는 나라를 잃고 이 먼 곳까지 와서 먹을 것을 구함으로써 한 번 배불리 먹고 잠간 동안의 생명이나마 연장하려는 것으로써 말로는 임금을 들여 보내겠다고 하나 그 실상은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과 절교하면 우리의 강한 것을 보여 줄 것이고 순종하면 도리어 그들의 뜻을 교만하게 만들므로 군사 행동을 지연시키려 한다 하나 실은 그것을 도리어 촉진시키게 될 것입니다. 들은즉 그 “조서”에는 우리에게 대역죄를 들씌웠다가 이내 그것을 벗겨 주었다고 썼다 하는바 우리가 본래 죄가 없는데 또 무엇을 벗겨 줄것입니까? 정부에서 만일 그 사신을 예절을 갖추어 대접해서 보낸다면 이는 전국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러한 사실도 없이 스스로 대역의 이름을 뒤집어 쓰게 되며 외부에 알릴 수 없는 수치로 될 것이니 신하된 자들로서 그것을 참을수 있겠습니까? 황차 명나라에서 김의의 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에 벌써 우리를 의심했을 터인데 또 북원과 서로 연락하고 김의의 죄를 문초하지 않은 사실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 나라가 저의 사신을 죽이고 원나라와 상통한다고 생각할 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명나라에서 문책하는 군사를 일으켜 해군과 육군을 일시에 내몰게 된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장차 무슨 말로써 대답할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작은 적의 침범을 늦추려다가 실지에 있어서는 전 중국의 대군을 동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치는 매우 명백하여 누구나 다 쉽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마치도 말못하는 사람처럼 침묵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대체로 전일 여러 소인들이 사변을 일으켰을 때 당시의 집권한 재상은 명나라로부터 힐책(詰責) 당할 것을 두려워 해서 사실상 김의와 함께 통모하여 명나라와 국교를 끊으려 한 일이 있었으니 안사기(安師琦)가 사실이 발로되자 자살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안사기가 이미 죽은 이상 응당 속히 계책을 정함으로써 군중의 분노를 풀어야 할 것이였으나 지금까지도 잠잠합니다. 인심이 뒤숭숭한 것으로 보아 어떤 사변이 발생될까 걱정이니 전하는 자의로 단정 집행하되 북원의 “조서”를 회수하고 오계남, 장자온과 김의가 데리고 갔던 사람들을 포박하여 중국으로 압송하면 애매한 죄상은 변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판명될 것입니다.그리고 정료위와 함께 군대를 양성하여 사변에 대처할 것을 약속한 다음 앞으로 북벌할 것을 성명한다면 원나라의 일족(遺種)들이 자취를 감추어 멀리 도망해 가고 우리 나라의 행복은 영원히 무궁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윤과 이인임이 그를 꺼리므로 왕이 정몽주를 언양(彦陽)에 정배 보냈다. 신우 2년에 자유로 거주하기를 허가하였다. 이때 왜적이 다수 내침하여 바닷가 여러 고을이 모두 쓸쓸하여 텅 비다시피 되었다. 나라에서 이것을 걱정하여 일찍이 나흥유(羅興儒)를 패가대(覇家臺)에 보내 화친할 것을 협의하게 하였던바 그들의 주장이 나흥유를 투옥하였으므로 그는 거의 아사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 온 일이 있었다. 신우 3년에 이르러 권신들이 이전 감정으로 정몽주를 천거하여 패가대에 보빙사(報聘使)로 보내 해적을 금지할 것을 교섭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험시하였으나 정몽주는 조금도 어렵게 여기는 표정이 없었고 그 곳에 가서는 고금을 통하여 인방 간의 국교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 철저하게 설명하니 주장이 경복하여 매우 후하게 접대하였다. 왜인 승려 중에서 시(詩)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지어 주니 승려들이 모여 들어 매일 같이 가마를 메고 와서 명승지를 구경할 것을 청하군 하였다. 귀국할 때에는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가 파견한 주맹인(周孟仁)과 함께 왔으며 뿐만 아니라 포로되었던 윤명(尹明),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명을 놓아 보내게 하였다. 이 밖에 또 삼도(三島)에 대한 침략을 금지하게 하였으므로 왜인들이 오랫동안 그를 칭찬하며 사모하고 있었다. 그 후 정몽주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재(齋)를 올려 그의 명복을 비는 자까지도 있었다. 정몽주는 왜적들이 우리의 양민 자제들을 종으로 만든데 대하여 가긍히 여겨 그들을 해방시켜 올 것을 꾀하여 여러 정승들에게 힘 써 권고하고 각각 사재 약간씩 거출하게 한 다음 또 편지를 써서 윤명을 주어 보냈더니 적의 괴수가 그 편지 문장의 간곡한 것을 보고 감동되어 포로 백여 명을 귀국시켰다. 이때로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반드시 포로를 찾아 데리고 오군 했다. 신우 4년에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되었고 그 후 전공, 예의, 전법, 판도 등의 판서(典工禮儀典法版圖判書)를 역임하였으며 6년에 태조를 따라 운봉(雲奉)에 가서 왜적을 치고 돌아 오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첨서 사사(簽書司事)가 되고 10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되었다. 몇 해 전부터 우리와 명나라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많았으므로 명 태조가 성이 나서 장차 우리 나라에 출병하려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 해서 우리 사신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生), 이자용(李子庸) 등을 볼기를 치고 먼 곳에 유배한 사실까지 있었다. 이때에 와서는 사신을 보내 명 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될 형편이었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 회피하므로 마침내 밀직부사 진평중(陳平仲)을 보내기로 토의 결정되었다. 진평중은 노비 수십 명을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 드디어 병을 칭탁하니 임견미가 즉시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신우가 정몽주를 불러 직접 말하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가 명나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은 모두가 대신들이 잘 못한 탓이다. 그대는 고금 역사에 정통하고 또 나의 뜻을 잘알고 있는바 지금 진중평이 병으로 하여 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대를 대행시키려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떤가?”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령이라면 물불도 피하지 않겠는데 하물며 명나라에 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남경까지는 대략 8천리이니 발해에 가서 바람을 기다리는 날자를 제외하고도 실로 90일 걸립니다. 그런데 오늘로부터 명태조의 생일까지는 겨우 60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만일 10일 동안 바람을 기다린다면 여일은 겨우 50일이니 이것을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어느 날 출발하려는가”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지체하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길을 갑절씩 걸어 생일날에 당도하여 축하문을 올리었다. 명태조는 축하문에 적힌 날자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 신하들이 서로 사고를 핑게 하고 오기를 좋아 하지 않고 있다가 날자가 임박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대를 보낸 것이다. 그대는 왕년에 촉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왔던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그때에 배가 깨졌던 정형을 상세히 진술하니 명태조가 말하기를 “그러면 응당 중국 말을 할 것이다.”라 하고 특별히 위로해 주었으며 예부에 명령하여 우대해서 보내게 하는 동시에 드디어 홍상재 등도 석방하여 귀국시켰다. 11년에 동지 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어 선비를 뽑았는데 옛 규정에 1장(場)의 시험이 끝날 때마다 즉시 성적을 고사하여 게시하고 초장에서 합격 못한 자는 중장에 들어 가지 못하며 종장에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이때 의비(懿妃)의 남 동생 노귀산(盧龜山)이 연령이 적고 학력이 없으므로 중장에서 입격되지 못하였는바 신우가 크게 노하여 시험을 중지시키려 하였다. 이에 이성림(李成林), 염흥방(廉興邦) 등이 노귀산의 아버지 노영수(英壽)의 집에 가서 귀산으로 하여금 종장에 응시시키기를 청한즉 노영수는 귀산만 입장할 수 없다고 말하므로 불합격자 10여 명을 다 같이 응시시키고 마침내 노귀산을 입격시켰다. 덕창부(德昌府) 행수(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래 환관(宦官) 이광(李匡)의 수종꾼으로서 그 친구의 책문(策文)을 절취해서 썼으므로 정몽주는 이것을 떨어뜨렸으나 지공거(知貢擧) 염국보(廉國寶)가 이것을 합격시켰다. 최영이 농담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감시(監試)에는 학사 윤취(尹就)가 빈한한 선비를 버리고 방탕한 아이를 합격시켰으므로 하여 큰 우박이 내려 우리 집 삼을 다 죽였었는데 이 번 동당(東堂)에는 학사가 또 어떤 천변을 가져 오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12년에 명나라 서울에 가서 명나라의 갓과 의복(冠服)을 요청하고 또 해마다 보내는 토산물의 액수를 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몽주는 설명과 대답을 상세하고 명료하게 한 결과 5년간의 밀린 분과 증가하였던 매년 정액을 모두 면제 받았으며 그가 환국하니 신우는 매우 기뻐 하여 옷, 띠, 안장, 말 등을 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임명하였다. 다음 해에 해임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니 왕은 그를 영원군(永原君)으로 봉하였다. 정몽주는 하륜(河崙), 염정수(廉廷秀), 강회백(姜淮伯),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원나라 때의 의복 제도를 고쳐서 명나라 의복 제도를 쓸 것을 건의하였다. 14년에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고 신창 원년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으며 태조(이성계)와 함께 국왕 책립할 방침을 정하여 공양왕을 세운 다음 왕은 그를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동판 도평의사 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호조상서 사사(戶曹尙瑞司事),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로 임명하고 익양군 충의군(益陽郡忠義君)으로 봉하였으며 순충 논도 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칭호를 주고 교시하기를 “난국을 전환시키고 정도를 회복하는 것은 진실로 나라의 충신이요 덕 있는 이를 높이고 공 있는 이를 갚는 것은 참으로 국가의 법전이다. 그대는 천리와 인사에 통달하고 보필(王佐)의 재능을 가졌으며 과거에 응시(射策)하여 연거퍼 첫자리를 차지했고 분묘를 지켜 효성을 다하였다. 그 안에 박힌 뿌리가 확고하기 때문에 밖에 피는 꽃이 화려하도다. 선왕은 그대를 임용하여 사륜(絲綸-조서‘詔書’, 칙서‘勅書’, 교서‘敎書’ 등)을 저작하는 사무를 맡겼고 후생들은 그대를 경모하여 태산과 북두성 같이 우러러 보고 있다. 그대는 염락(濂洛-중국 송나라 성리학자 ‘性理學者’들인 염계‘濂溪’ 주돈이’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를 말한 것)의 도를 제창하고 불로(佛老-불교와 도교)의 말을 배척하였으며 정밀히 강론함으로써 성현의 오묘한 학리를 깊이 해득하였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열성을 다한 결과로 인재가 배출되었다. 덕망은 이로 인하여 더욱 높아졌고 명성은 이로써 크게 떨쳤다. 명나라가 건국된 처음에 우리가 제일 먼저 그와 국교를 맺었으며 모든 신하들 중에서 신중히 선발하여 그대를 서장관으로 임명하였었다. 그대는 푸른 바다를 항행하여 중국으로 가던 중 큰 바람을 만나 사경에 이르렀다가 명태조의 애호를 받고 무사히 돌아 왔으며 공민왕이 돌아 가신 후 김의가 원나라에 도망해 간 직후에 권신들은 의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모든 관리들은 분주한 일을 꺼린다 하면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장차 화를 백성에게 전가하려 하고 있을 때 그대가 정도전과 함께 역설하기를 ‘근자에 변고가 계속 일어 나고 있는데 왜 사정을 밝혀 명나라에 통보하지 않는가? 만일 중국과 충돌된다면 국가의 행복을 영구히 보전하기 어려우므로 사신을 왕래시켜 인방의 우의를 두텁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가 태평 무사한 것은 그대들의 이 신중한 계책의 결과이다. 그 후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는 그가 가지고 온 문서 내용이 불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교외에 나가 그를 맞으려는 의논에 대소 관리가 모두 따르고 있는 가운데서 그대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을 거느리고 그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언한 데서부터 이인임, 지윤 도배의 비위에 거슬려 용납 받지 못하게 되어 수년 동안 영남에 추방되어 있었고 일본에 갔다 오는 데도 1년이 걸렸으며 우리 나라가 사절 보내는 일을 늦추었다 해서 명나라로부터 추궁이 심함에 따라 나라 형편이 위태하고 인심이 뒤숭숭한 시기에 그대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가서 친히 명태조를 만나 봄으로써 비로소 사절 왕래의 길을 열고 매년 보내는 토산물의 수량을 감액 받게 하였다. 우리는 예로부터 교린 관계를 잘 유지 했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능히 백성을 안보할 수 있었었다. 그러나 갑인년으로부터 기사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신우, 신창이 왕위를 도적질한 화가 있었으므로 그대는 항상 적인걸, 장구령이 당나라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충의를 품고 있은 것은 하늘이 실로 그대의 마음에 강림한 것이며 이러한 뜻을 가진 그대는 일을 마침내 이루었다. 기사년 10월에 문하평리 윤승순이 명나라에 갔다 돌아 올 때 받아 온 명태조의 편지에는 ‘고려에서 왕위가 절대되어 비록 왕씨로 가장하여 세웠으나 이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으니 역시 삼한 이래 대대로 지켜갈 훌륭한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해 11월 15일에 그대들이 임금 책립할 계책을 정하고 명태조의 권고를 선포하고 태비의 말씀을 받들어 나를 추대하여 정통을 계승시킴으로써 16년 동안이나 이미 끊어졌던 선세의 제사를 이었고 천만 대 무궁한 경사를 연장하였다. 이때에 기율을 정돈하고 예악을 닦고 밝히며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분쟁을 없애며 한산한 관직을 줄이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며 정부의 시책은 실로 어진 임금과 착한 백성(堯君舜民)의 의사 그대로이며 경연(經筵)에서 충고(啓沃)하는 말들은 모두 이훈(伊訓), 열명(說命-모두 서경 편명)과 같은 것 뿐이다. 그대의 재간은 참으로 중신(股肱) 자리에 적합하며 그대의 장한 공훈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難忘於帶礪). 만일 그대에게 기리고(褒) 높이는 특수한 은전을 베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후인을 장려하리요? 그러므로 각을 세워 화상을 그리고 비석에 새겨 공적을 기록하며 3대 조상들에게 관작을 추증(追贈)하고 자손들은 원래 죄를 ?堉?磯? 토지를 주고 거기에 노비를 함께 주며 또 은(白金) 50냥과 어마(廐馬) 1필을 준다. 아! 나는 이 어렵고 큰 왕위를 이어 받고 과오를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있으니 그대는 더욱더 보필하는 충성을 다함으로써 영예를 끝까지 보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이 경연에 나아가니 정몽주가 진언하기를 “유자(儒者)의 도는 모두 일상 생활에 대한 일로서 음식과 남녀 관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동일한 바이며 여기에 지극한 이치가 존재합니다. 요, 순(堯舜)의 도 역시 이에서 벗어 나지 않는 것이니 동작하고 정지하며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을 정당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요순의 도이며 그것은 본래 지극히 고상하여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교는 이와 같지 않으니 친척을 하직하고 남녀 사이를 끊고 바위 구멍 안에 홀로 앉아 초의 목식(草衣木食)하면서 현실 세상을 떠나 공허한 것을 봄으로써 신조를 삼으니 이것을 어찌 평상한 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에 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맞아 스승을 삼으려 하였기 때문에 정몽주가 이렇게까지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바야흐로 불교에 미혹되었으므로 몽주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윤이, 이초의 사건이 일어 났을 때 대간은 그 일당을 극력 논박하였고 정몽주는 왕의 생가 4대를 추존(封崇)한 것과 관련하여 대사(大赦)를 내릴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도 대간은 그냥 주장하므로 왕이 이 문제를 정부에 회부하여 토의시켰다. 정몽주는 말하기를 “죄상도 똑똑치 않고 지금 또 대사까지 지났으니 다시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형조(刑曹)는 정몽주가 윤이, 이초 도당을 방조하고 있다고 추궁하고 정몽주는 두 번에 걸쳐 글을 올려 사임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다 허하지 않았으며 정몽주를 불러 잔치를 배설하여 위로하였으며 이내 삼한 삼중대 광(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 판 도평의사사, 병조 상서 시사(兵曹尙瑞寺事), 영 경령전사(領景靈殿事),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 경연사(經筵事)로 임명하고 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으로 봉하였다. 공민왕 3년에 왕이 경연관에게 말하기를 “요새 사람들은 중국의 고사는 알아도 본국 일을 모르니 그것이 옳겠는가”라고 하니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근대사는 모두 아직 편수하지 않았고 선대의 실록 역시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으니 편수관을 배치하고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편찬 방법에 의하여 그것을 편수하여 고람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채납한 다음 즉시로 이색, 이숭인 등에게 명령하여 실록을 편수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성균 박사 김초(金貂)가 왕에게 글을 올려 불교를 훼방하니 왕이 노하여 사형을 주려 하므로 병조 좌랑 정탁(鄭擢)이 상소하기를 “제가 듣건대 김초가 이단을 배척하면서 기탄 없이 말한데 대하여 전하는 그가 선왕이 정해 놓은 법전을 파괴하였다 해서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한다 하니 저는 전하를 위하여 한탄하는 바입니다. 서경(書)에 이르기를 ‘선왕이 정해 놓은 법에 의하여 정치를 한다면 영구히 과오를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선왕이 정해 놓은 법이란 삼강 오륜(三綱五常)에 불과한 것이고 불교는 모두 이와 배치되므로 김초가 선왕의 성법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전하가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니 김초의 아주 충직한 데서 얻은 죄를 용서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대언(代言)들이 왕의 노함을 두려워 하여 감히 이를 주달하지 못하였다. 정몽주가 동렬들과 함께 왕에게 상소하기를 “신(信)이란 임금의 큰 보배입니다. 국가는 백성에 의해서 보전되고 백성은 신에 의해서 보전되는 것입니다. 근일에 전하가 교시를 내려 진언을 요구하시기를 ‘말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지 않겠다’라고 하셨기에 사람들은 모두 자진 상소하여 정사의 잘 되고 못된 것과 백성의 기쁨과 근심 등에 대하여 직언으로 극론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이른 바 숨김 없는 조정입니다. 국자 박사, 생원(國子博士生員)들 중에서도 이단을 배척해서 글을 올리며 진언함에 있어서 언어를 삼가지 않아 전하의 존엄을 촉범한 자가 있는데 대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매우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생각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유학자의 상사이므로 예로부터 군왕들이 모두 이를 방치하고 논난하지 않았거던 하물며 전하의 관대하신 도량으로써 조그마한 어리석은 자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되니 너그럽게 처분하여 그들을 모두 다 용서하심으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신을 보이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쫓았으므로 김초 등이 벌을 모면하였다. 정몽주 등이 다시 상소하기를 “상과 벌은 국가의 대법이므로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명이 분발하며 한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천만 인이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상과 벌을 줌에 있어서 만일 지극히 공평하게 하지 않는다면 일국 인심을 그에 복종시킬수 있게 적중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가 즉위한 이래 사헌부와 형조가 번갈아 상소하여 죄인 추궁할 것을 제의하기를 ‘모인은 왕씨를 세우려는 의논을 가로막고 신우의 아들 창을 도와 세운 자이요 모인은 역적 김종연의 도모에 참여하여 행재소에 있으면서 내응한 자이며 모인은 여러 장수들이 명태조의 의견을 받고 신우 부자는 왕씨가 아니므로 왕씨를 회복하자는 의논을 하고 있을 때에 신우를 맞아 오고 왕씨를 영원히 절대시킬 것을 꾀한 자이고 모인은 윤이와 이초를 명나라에 보내 친왕에게 천하 군사를 동원할 것을 요청한 자이며 모인은 선왕의 서손을 몰래 양하면서 불측한 일을 응모한 자라’고 하는 말로써 빈번히 상소한 결과 비록 전하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반드시 죄를 짓고 용서 받은 자도 있을 것이요 죄 없는 자로서 명백하게 벗지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니 공도에 비추어 볼 때 어느 면으로나 다 잘못 된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분분하여 그칠 줄을 모릅니다. 저희들의 생각에는 “사헌부와 형조로 하여금 두 기관이 합동 토의한 후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의 취조 문건들에 대하여 재차 세밀히 검토한 다음 모인은 용서할 수 없는 정도이니 법에 의하여 처결해야 하며 모인은 정상이 의심스러우니 경하게 처벌해야 하겠고 모인은 죄 없이 무고를 당했으니 응당 이를 해명해서 석방해야 하겠다는 등 사건에 대하여 낱낱이 검토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건이 올라 오면 전하가 재신 및 기타 관계 관원들을 소집하고 전하가 친히 임석한 후 그 앞에서 심리 결단함으로써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 죄 있는 자를 벌하고 죄 없는 자를 석방하면 사람들이 심복하고 공도가 실행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쫓았다. 이때 사헌부와 형조는 이 사건에 관하여 다섯 가지 죄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죄하였다.“첫째로, 왕씨를 세우자는 의논을 가로막고 신우의 아들 신창을 옹호하여 세운 자는 조민수, 이색이요 둘째로, 김종연의 음모에 참여하여 그와 내통한 자는 박가흥, 지용기, 이무(李茂), 정희계(鄭熙啓), 이빈(李彬), 윤사덕(尹師德), 진을서(陳乙瑞), 박위, 이옥(李沃), 이중화(李仲華), 진원서(陳元瑞), 김식(金軾), 이귀철(李龜哲) 등인바 다만 지용기, 박위, 이무, 정희계, 이빈, 윤사덕, 진을서,진원서, 이옥, 이중화 등은 모두 심문하지 않고 그냥 귀양보냈고 또 공술한 말도 없으므로 정상은 의심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용기와 박위는 이름이 공신의 열에 올라 있고 지위가 장상에 이른 자들로서 응당 힘껏 보필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군사와 관리를 많이 뭉쳐 김종연으로 하여금 의뢰할 데가 있게끔 하여 줌으로써 그의 흉모를 수행시키려 하였으니 그 정상을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김식, 이귀철 등은 비록 공술한 말은 있으나 그 말이 분명하지 못하고 정상도 의심스럽습니다. 셋째로, 신우를 맞아 들이고 왕씨를 영원히 절대시킬 것을 꾀한 자는 변안렬, 이을진, 이경도, 원상, 이귀생, 정지(鄭地), 우현보, 우홍수, 왕안덕, 우인렬 등과 이색, 정희계인바 역적 변안렬은 비록 공술한 말은 없이 이미 사형에 처했으나 그 가산을 적몰하지 않았으므로 전국이 모두 원망하고 있으며 을진과 안렬은 공모해 가지고 국가를 요란하게 하려 한 사실이 공술에서 명백히 나타났고 지금 을진이 공술한 말에 의거하면 경도가 흉모에 참여한 것도 의심 할 바 없으며 도 그가 변안렬의 복심으로 그의 밑에서 도진무로 있었으니 어찌 변안렬이 모사(謀事)한것을 경도가 몰랐겠습니까. 그러므로 마땅히 을진과 한 자리에서 대질 심문해야 할 것입니다. 원상과 이귀생은 내정을 알고 있으면서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임 부자의 공술한 말에 의하면 우홍수가 신우를 맞으려는 음모에 관계했다고 했으나 본인이 공술한 말은 없으므로 그 정상이 의심스러우며 정지는 그의 공술한 말로 보변 죄 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박의룡(朴義龍)의 공술한 바에 의하면 이색이 신우를 맞아 들일 것을 꾀한 데 대하여는 응당 논죄해야 할 것이며 현보, 안덕, 인렬, 희계 등은 이미 모두 면직시켜 지방에 귀양보내었고 모두 공술한 말도 없기에 그때에 그들을 취조하던 순군관(巡軍官)들에게 물은 즉 다들 말하기를 ‘우현보 등이 음모에 가담한 사실에 대하여는 김저가 이미 언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김저와 함께 대질시킨 일도 없고 또한 공술한 말도 없으므로 그 정상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인렬은 위관(委官)으로 순군에 나가 있으면서 김저의 공술을 명확하??받지 않았습니다. 안덕은 도둔곳(都屯串)에서 패전한 뒤에 여흥에 가서 신우를 만나 볼 때에 여러 날이 걸렸었는데 그 어간 실정을 추측하기 어려우며 또 이임 부자의 공술 내용에 의하면 안렬이 인렬과 안덕을 시켜 신우를 맞아 오려 한 사실이 명백합니다. 넷째로, 윤이, 이초의 문건에 나타난 자로서는 변안렬, 김종연은 이미 사형을 받았고 이임과 조민수는 병사하였으며 우인렬, 정지, 이숭인, 권근, 이귀생, 우현보, 권중화(權仲和), 장하(張夏), 이종학 경보(慶補) 등은 이미 자복하였습니다. 이색, 진을서(陳乙瑞), 이백성, 한준(韓俊), 정룡(鄭龍), 구천부(仇天富), 이대경(李大卿) 등은 모두 공술한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윤이, 이초의 문건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홍인계(洪仁桂)의 공술 기록에 나타난 자로서 최공철(崔公哲)은 이미 곤장을 맞고 사망하였고 최칠석, 안주(安柱), 공의(公義), 곽선(郭宣), 정단봉(鄭丹鳳), 조언(曹彦), 왕승귀(王承貴), 장충립(張忠立) 등은 이미 자복하였고 조경(趙卿)은 병사하였습니다. 다섯째로, 선왕의 서손을 은근히 양한 자는 역시 지용기인데 용기는 왕익부(王益富)를 은근히 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명백하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몽주,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 겸 대사헌 김주(金湊), 문하평리 유만수(柳曼殊), 좌상시(左常侍) 허응(許應) 우상시 전오륜(全五倫), 간의(諫議) 박자문(朴子文), 전백영(全伯英) 헌납(獻納) 권진(權軫), 정언(正言) 유기(柳沂), 김여지(金汝知), 장령(掌令) 최함(崔咸), 김묘(金畝), 지평(持平) 이원즙(李元緝), 이작(李作), 형조판서 구성우(具成祐), 총랑 성부(成溥), 정랑(政郞) 하계종(河係宗), 좌랑(佐郞) 박의 등을 불러 다섯 가지 죄를 심의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왕이 말하기를 “내가 즉위한 때로부터 대간은 항상 다섯 가지 죄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번갈아 상소하고 있었으나 그 죄상들이 명백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단죄하기 어려웠었고 그것은 다만 내가 걱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간도 이 문제 처리로 인하여 혹은 철직 또는 좌천을 당하였으며 따라서 의논이 분분하여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마땅히 명확히 분간하여 죄 있는 자는 용서할 수 없고 무고를 당한 자는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맞대해서는 동의하고 물러가서는 뒷소리를 하지 말라 ”고 한 다음 신창을 세운 일과 신우를 맞아 들이려 한 일을 물으면서 이색을 관대히 취급하려는 생각으로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회군하고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하면서 그 계책을 이색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민수는 신창의 외척으로서 당시에 대장으로 있었는바 이색은 사실 상 비겁하고 나약한지라 ‘아버지가 그만 두고 아들이 서는 것은 국가의 상례다,’라고 말하기에 신창을 세워 왕위를 물려 받게 하였으니 그의 죄는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다만 이색은 절조가 없었을 뿐이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주가 반박하기를 “전하께서 아직 잠저에 계실 때에 가짜 임금 신우를 공민왕의 후라고 한 데 대하여 이색은 그가 왕씨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의 아들 창을 세울 것을 제창하여 말하기를 ‘아버지가 그만 두었으니 아들이 서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신씨로 임금을 삼을 것을 결정한 것이며 신씨로 임금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면 전하는 신씨의 신하로서 신씨의 자리를 빼앗은 것으로 됩니다. 이색이 당시 큰 학자로서 국론을 결단하는 자리에서 자기 몸만 생각하고 대의를 망각해 버렸는데 그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장 중에 제군사(諸軍事-이성계를 말한 것) 같은 이는 신뢰할 수 없고 원래 조민수만 무서워 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낭관들이 다만 네! 네! 할 뿐인데 오직 김여지가 왕의 비위를 맞추어 말하기를 “저도 이색 등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다시 우현보, 박하흥을 용서하려 하니 김주가 또 말하기를 “전하는 사정을 가진듯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갑자기 변색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사정을 둔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한 다음 마침내 이색, 우현보 등을 석방하였는바 이는 그들은 공술한 말이 없고 다만 김저와 정득후(鄭得厚)가 한 말이 있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왕이 명령하기를 “조민수, 변안렬은 가산을 몰수하고 지용기, 박가흥은 이미 처분한 그대로 하고 우인렬, 왕안덕, 박위 등은 지방에서 종편 거주하게 하며 기타는 모두 서울 밖에서 종편 거주하게 하라”고 하였다. 당초에는 왕안덕도 서울 바깥에서 종편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김주가 말하기를 “왕안덕은 남포(藍浦) 전역에서 자기가 영솔했던 군사 전원이 패배해 없어진 후 자기가 돌아 올 때에는 반드시 여흥을 통과하면서 신우를 만나 보고 그를 맞아 들여 임금으로 세울 것을 꾀하였는데 이 사람을 죄상이 명백하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지방에서 종편 거주하게 하더라도 그 혜택은 역시 큰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의견을 쫓았다. 정몽주가 왕에게 고하여 이것을 법령으로 기재하기를 “금후에 만일 이 사건 관계자들에 대하여 논죄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그를 무고죄로 논죄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내 정몽주에게 안사 공신(安社功臣) 칭호룰 주었다. 공양왕 4년에 정몽주는 대명률(大明律), 지정조격(至正條格) 및 우리 나라 법령을 상호 참작하고 산정하여 편찬한 새 법전을 왕에게 드렸다. 정몽주는 태조의 위신이 날로 높아 가고 조야의 인심이 그에게 집중하는 것을 꺼렸으며 또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을 알고 항상 어떤 기회를 타서 그를 처치하려 하던 중 세자 석(奭)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므로 태조가 황주에 나아가 그를 맞이하고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마상에서 떨어져 몸이 매우 불편하였었다. 정몽주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 하는 낯빛으로 사람을 보내 대간에서 사촉하기를 “이성계가 지금 마상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의 협력자인 조준 등부터 제거한 뒤에야 일을 처리할 수 있다.”하고 즉시로 조준, 정도전, 남은 및 평소에 그에게 마음을 돌리고 있던 자 5∼6명을 추궁하고 장차 그들을 죽이고 이태조까지 죽이려 하였다. 그때 태조는 벽란도(碧瀾渡)까지 돌아 와서 장차 유숙하려 하고 있었는데 태종이 달려 와서 고하기를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을 모함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대답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유숙할 수 없다고 다시 고하여도 태조는 그것을 허하지 않다가 굳이 청한 뒤에야 비로소 아픈 몸을 붙들고 출발하여 마침내 가마를 타고 밤에 집으로 돌아 왔었다. 정몽주는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3일간이나 식사도 하지 않았다. 태종이 다시 고하기를 정세가 이미 급해졌는데 장차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오직 마땅히 그것을 순순히 받을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태조의 아우 이화(李和)의 사위인 이제(李濟) 등과 함께 휘하 군사들과 의논하기를 “이씨가 왕실에게 충성하는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지금 정몽주의 모함을 입어 악명을 쓰게 되었으니 후세에 가서 누가 이것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하고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꾀하였던바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음모 내용을 정몽주에게 누설하니 정몽주가 태조의 집에 가서 사변의 눈치를 살피려 하였으나 태조는 그를 대하기를 이전과 같이 하였다. 이때 태종은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가 정몽주가 떠난 뒤에 곧 조영규(趙英珪) 등 4∼5명을 보내 길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는 56세였다. 태종이 들어 가 태조에게 고하니 태조는 크게 노하여 아픈 몸을 붙들고 일어 나 태종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그것을 몰랐다고 하겠느냐? 우리 집은 본래 충과 효로써 소문 났었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행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이것이 효도로 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휘하 군사들을 불러 뜻 밖의 화를 예방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부득이하여 황희석을 시켜 왕에게 고하기를 “정몽주 등은 죄인을 비호하고 대간을 은근히 꾀어 충량을 모함하였으므로 지금 이미 벌을 받았으니 조준,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번명시키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은 대간을 추궁한 다음 귀양보내는 동시에 그 여당을 귀양보냈으며 정몽주의 머리를 거리에 내달고 방을 붙이기를 “허무한 말을 꾸며 내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요란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태조(이성계)의 부하가 또 글을 올린 결과 정몽주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몽주는 재질이 비상히 높고 기절이 뛰어 나게 호매하며 충효 대절을 지켰고 젊었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예가 매우 깊었다. 태조는 그의 도량을 중히 여겨 지방에 대장으로 나갈 때마다 반드시 그를 천거하여 함께 하였으며 누차 그를 선발 천거하여 같이 정승으로 올라 갔다. 당시는 국가에 사고가 많고 정무가 호번하였으나 정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문을 해결함에 있어서도 음성과 안색을 변하지 않고 이리저리 응답하는 것이 모두 그 실정에 알맞게 하였으며 그때 풍속은 상사나 제사에 오로지 불교의 예법을 숭상하였었는데 정몽주가 비로소 일반 양반이나 서민들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또 종래에는 수령들을 임명할 때에 상참관 이외의 하급 관리들 중에서 채용하던 것을 정몽주가 비로소 상참관(參官) 중에서 청백하고 명망 있는 자를 선발 채용하고 그 출척(黜陟)을 엄정하게 하였다. 그는 또 금전과 곡물을 출납하는 도평의사 녹사(都評議司錄事)가 왕의 비준을 받지 않은 백첩(白牒)으로 사무를 처리하여 사업에서 부정한 경향이 많다 해서 처음으로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배치하고 출납을 장부에 기록하게 하였으며 도 서울에 오부 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 향교(鄕校)를 설립함으로써 유교를 발전시켰다. 이 밖에도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백성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상 운수(漕運)를 편리하게 만든 것 등은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은 시와 글(詩文)은 호방하고 고결하며 포은집(圃隱集)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본조(이조)에 와서 그에게 대광 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 의정부사(領議政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겸 예문춘추관사(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추증(贈)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주었다. 아들 정종성(鄭宗誠), 정종본(鄭宗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