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 오기전에 우물탐사를 마무리하려 장산유적탐사대는 춥지만 4주만에 3차 탐사를 다시 하게되었다.
◎ 본 우물의 축조시기를 1730년대로 추정한다.<원형에서 사각형으로>
조선 후기 영조(1733년)대 문둥병의 전염에 대한 두려움과 유교적인 윤리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치유의 어려움에 대한 규범의 사회제도에 관한 실록에 연관시켜본다.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우물은 세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고 본다. → 깊이 3.5m. 웅덩이0.5m. 넓이2.0m.
1. 최초에 개인이 자연웅덩이형으로 (1730년대에) 자연석돌을 이용 3단을 쌓았고 돌사이는 진펼로 메꾸었다.(1m 6~10사진) 공동우물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곳은 상층부 집안 자식이 돌림병에 걸려 동네에 멀리 떨어진 이곳에 암자를 지어 격리시키면서 만든 우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백토를 우물터로 사용하였으며 넓이가 좁음이 그 이유이다.
2. 2차 우물보수(1957년대 2.5m 1~5사진) → 정전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멘트를 이용한 우물의 축대를 1.5m를 더 쌓고 그 위에 안정성 고려 정사각형의 우물테두리(1m)를 시멘트로 보강했다. 그 이후 목장주가 보수 이용했다고 본다.
3. 3차 우물관리(1990년대 사진 11~12) → 목장폐지한 후 군사용지로 전환되면서 잔여 사료부대를 우물속에 넣고 폐쇄했었다.
4. 부러진 숟가락은 주위에 사람 거주했었다는 흔적이다. 거머리 두마리는 4주동안에 지하수를 통해 이동해 왔다는 것을 말한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이곳 논은 벼수확의 공출지로서 습지내 수로도 잘 만들어져 있다. 대동아전쟁에 얼마나 많은 수탈이 있었나! 목추김 해결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시 군사용지로 수용된것으로, 주변에 집터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마고당 중건과도 연계해보자!물망골 폭포는 문둥병 치료를 위한 물맞이 약수터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용호동 사람들과 기장사람들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 시련의 우물 변천기를 년도별로 기록해본다.
| 치유의샘 | 일제강점기 | 해방기 | 6.25전쟁기 | 개척기 | 목장기 | 군사시설보호구역 |
| 1730~1920 | 1920~1945 | 1945~1950 | 1950~1957 | 1957~1970 | 1970~1990 | 1990~현재 |
※ 1945.6월 장산마을 B29폭격기의 폭탄투하로 발생한 웅덩이가 지금도 보존되어있다. 1957년 휴전협정 이후부터 장산마을 출입이 공식허용 되는데 재건교회 최덕지 여성목사의 평장묘외 40여기가 일본 향한 회한의 눈빛 그곳으로 향해 있다. 본 우물 동북150m지점의 콘크리트 십자가도 이 우물의 콘크리트와 비슷한 재료로 개척기와 목장기보수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나 추정된다.
덧붙여 전하고 싶은 것은 장산의 물이다. 6.25전쟁시 UN군에 제공했던 세계적음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1970년대까지 우동과 반여동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첫댓글 추운 날씨에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장산문화유적탐사대 화이팅!👍👍👍
소 사료 포대나 군용건빵봉지 및 기타 봉지류들을 볼때 1990년 초 우물속에 집중적으로 던져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의문중 하나는 소 사표 포대 20키로짜리 8개를 누가 무슨 목적으로 우물속으로 던져 넣었을까요?
일제강점기에는 콘크리트 없었을까요?
1945.6월 우동과 대천마을 사람들 B29폭격 후 이곳에 모내기 하러 오니 웅덩이가 6곳이나 파여 있었다 한다.
새로운 역사 공부네요.
역사는 참 어려운데 사실을 유추하는것은 더 어렵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