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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 눅7:1-17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역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다. 도마라는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인정해야 하는데 골로새서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골1:15).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이전 대언자들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누가복음 7장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말씀으로 고치신 뒤에 제자들과 많은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나인성으로 오셨다. 나인성은 가버나움에서 약 40여km가 된다. 나인이란 나임(םיענָ 나인 Ναιν)이란 말인데 사랑스러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시기에 침례요한은 옥에 갇혀있었는데 갈릴리 영토는 헤롯 2세 안디바(Αντιπας)의 통치 영역이다. 침례요한은 안디바에 의하여 투옥되어 졌다.
누가복음 7장 1-35절까지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는 백부장의 종이 죽게 되었음으로 말미암아 곧 죽게 될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1-10절까지 나오고요. 두 번째로는 11-17절에서 남편 없이 사는 그 과부에게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 그 불쌍한 과부를 긍휼하심으로 가까이 다가셔서 위로하시고 살려주시는 장면이 나오고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18-35절 사이에 선지자로 오신 침례 요한에게 바로 자신이 눈 먼 자가 보게 되고 다리 저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이가 살아나고 가난한 이가 복음을 듣는다 라는 것을 자신에게 찾아온 요한의 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침례 요한이 잠시 후에 순교당할 그의 심령을 아주 견고하게 강화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침례자 요한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이 세 가지 사실들은 따로따로 우리에게 어떤 개별적인 계시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 가지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으로 연합되게 하여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영적인 의미를 계시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누가복음 7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그 모든 말씀들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셔서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으로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서 100여 명의 군인들을 거느리는 지위에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 하면 이방인이었던 누가라는 저자를 통하여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유대민족을 매우 사랑하고 또 유대 민족들을 위하여 오늘날의 교회인 회당을 지어서 기부하는 자로서 말씀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 모든 믿는 이방인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복음 7장 7절은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얼마나 겸손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자입니까? 여러분 유대 민족은 주님께 선택받은 선민이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있었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주님께 나아갈 자격도 없는 줄로 생각하였은즉 얘기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나의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모든 믿는 이방인들을 사실상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이 백부장이 정말 주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가진 자이심을 아시고 집으로 가시고 있는 도중에 백부장의 친구들을 먼저 주님께 보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저 내가 주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을 해보세요. 온 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의 아주 조그마한 동네 동장을 만나려고 그 집을 찾아간다면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기가 막힌 이슈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들로 오신 구주께서 한낱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의 집을 방문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거늘 어찌해서 저희 집에 들어오십니까? 저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하옵소서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백부장은 나도 권위 아래에 놓인 사람이고 내 아래도 병사들이 있어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오고 나의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권위자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어찌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권세를 어찌 알고 있었을까요? 5절에 의하면 그 사람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우리를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하니 그 정도로 유대민족을 사랑하였고 유대인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을 정도로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소식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약 성경에 대한 얼마간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우리가 암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 백부장은 사람으로 오신 구주를 6절에서 주님 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더 수고하지 마십시오. 이 주라는 인칭은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우주 가운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가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지위로서 권위의 말씀에 대한 의미도 알았던 자이기 때문에 이 권위에 대한 것을 스스로 얘기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면 제 종을 낫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권위자이심을 알고 그 권위의 표현인 말씀을 알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부장의 종은 바로 구주로 오신 분을 통해 백부장의 종이 온전히 치료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유대민족들을 통해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믿음에 대하여 크게 놀라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니라(9)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백부장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권세를 가진 분으로 알아보았고 또한 그분의 말씀이 치료하는 권세를 가진 말씀이심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종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을 통하여 종이 온전히 치료가 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나인성에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 7장 11-17절에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그 울고 있는 그 불쌍한 그 과부에게 자비와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바로 나인성이라는 곳으로 가셨을 때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그 나인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 죽은 사람이 실려나오는데 그는 그 어미의 외아들이요 어미는 과부라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이런 말씀이십니다(12). 여러분 우리는 여기 나오는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뜻을 알지 못하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11절에서 그날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성이라는 곳으로 가시는데 이 나인성을 왜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큰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스러운 즐거운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릴리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나사렛에서 불과 약10km 정도 또한 가버나움까지는 약 한 40km 떨어진 곳으로 모래산 기슭에 있는 곳이 바로 나인성인데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독자가 죽어서 장례치르러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살리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중에 죽은 자를 살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죽은자를 살리시다 첫 번째 바로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을 살리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막5:42). 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일은 막 죽었을 때 아버지의 믿음을 통해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누가복음 7장 11-17절 사이에 언급하고 있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12살 소녀였다면 지금은 보통 청년입니다. 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막 죽은 자였지만 이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은 죽은 지 얼마 된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그 회당장 아버지의 믿음으로 살아남을 받았다면 여기서는 순전히 그 어미 과부의 어떤 믿음을 전혀 보시지 않고 단지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을 통하여 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인데 이 나사로는 회당장 야이로 딸처럼 막 죽은 자도 아니고 어느 정도 죽은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나인성과부의 아들도 아닌 죽은 지 이미 나흘 된 자를 무덤에 두었는데 그 나사로에 대한 주님의 긍휼이라기보다는 경륜 안에 있는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바로 나사로를 살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2) 나인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 오늘 세 번의 죽은 자를 살린 일 가운데 두 번째인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은 여기에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첫 번째로 나인성 안으로 주님께서 가셨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조금 전에 나인성이라는 이름의 뜻은 사랑스러운 즐거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시고 있었다 라는 얘기는 사랑스러운 동네에 들어가시고 있는 중이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스러운 동네 즉 즐거운 동네가 되는 것은 주님이 들어가셨을 때 사랑스러운 동네가 될 수 있고 즐거운 동네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주님이 들어가시기 직전까지는 슬픔과 애곡과 참으로 비참한 상태만이 있는 동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스러운 동네 즐거운 동네라 칭하는 이 나인성은 주님이 들어가셔서 계실 때만이 사랑스러운 동네가 되어서 그 나인성의 성읍에 사는 백성들이 바로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삭개오를 통해서나 나사로를 통해서나 또는 수가성 우물가 여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님께서 오셔서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그 당사자를 대면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되고 모든 것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전 까지만 하여도 이 사랑스러운 동네라 칭하는 지명을 가진 이 나인성이라는 동네는 기쁨과 즐거움 대신에 슬픔과 눈물만 있을 뿐입니다. 그 나인성 과부는 남편을 잃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잃었을 때 그 과부의 마음은 비통함과 눈물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에게 처해진 이 삶의 모습이 원래는 첫 사람 아담을 에덴동산이라는 곳에 두심으로 말미암아 사랑스러운 동네 즐거운 곳 기쁨의 동산이 되도록 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이 낙원에서 저주의 땅으로 쫓겨나면서 고통과 이별의 삶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랑스러운 동네라 칭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인성의 동네도 기쁨과 즐거움 대신에 슬픔과 비통함과 눈물만 가득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 성에 들어가시는 중에 그 성읍 모든 사람들은 장례 행렬을 따라 그 성을 나올 수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 우리들이 처해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년 전에 주님께서는 그 아름다운 동네라 칭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도성인 그 나인 성으로 오셔서 그 죽음의 행렬을 따라 가는 인생들의 비통함과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아름답고 즐거움의 동네로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그 나인성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은 저주 때문에 사망을 당하게 되어 슬픔과 고통과 눈물만 있는 그곳에 오셔서 그 죽은 자를 생명으로 살려주시기 위하여 바로 14절에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나르는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그 죽은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을 했듯이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말씀하심은 오늘날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불행한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오셔서 반드시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 지금 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가장 절망적인 죽음이었잖아요. 12살 먹은 소녀의 죽음이 아니에요. 나사로처럼 어느 정도 자란 성년이 돼서 나이가 꽉 찬 죽음이 아니라 마음껏 활개를 치고 마음껏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정말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할 수 있는 그 청년의 죽음이었습니다. 더 마음아픈 것은 그 어머니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독자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적인 소망이 단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이 외아들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모든 소망이 완전히 끊어져버린 도무지 살아 가려해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외아들 마저 죽었으니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그 나인성은 도무지 사랑스러운 동네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외아들의 죽음은 세상이 다 한꺼번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같은 이 과부의 비천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소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 나인성이라는 동네에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주님께서 그 나인성으로 오고 있다라는 이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희년을 선포하여서 저주를 축복으로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빼앗긴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해 주고 잃어버린 장자권을 다시 되찾아주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되찾아주는 것 같은 일이 지금 바로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 그 나인성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이 소식은 놀랍고 기쁜 참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인성을 향해서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주님 뒤에 따라오는 생명의 행렬이 하나밖에 없는 과부의 아들이 사망을 당한 그 사망의 행렬을 만나게 되는 것이 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자체가 복음으로써 그 과부에게는 참다운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실낙원한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은 원래 영생의 존재로 지음받았으나 죄로 인하여 죽는 존재가 되었고,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과 큰 슬픔을 겪으며 특히 가족간 사별로 인해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늘 나인성이란 동네에서도 외아들이 죽었을 때 많은 동네 사람들이 위로했겠지만 그 무슨 말로도 위로가 안 되었을 텐데 이렇게 관이 나가고 여인이 울면서 뒤따랐을 것이며 동네사람들도 따라 나왔을 때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행렬을 세우시고 슬퍼하지 말라고 그 여인을 위로해주신 다음에 그 관에 손을 대시더니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이렇게 명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난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했던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하시며 그녀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아들을 살려 그녀에게 돌려주신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죽었던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진정한 위로를 경험한다.
(3) 나인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의미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누가 입을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주셨을 때만이 슬픈자에게 위로가 채워진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 현상이다. 과부에게는 그 죽었던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을 찾은 것으로 인하여 그분이 바로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어 절망적인데,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만이 모든 인생의 유일한 소망임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너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너희 인생들은 절망과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 생명의 부활이 있다. 너희에게는 영원한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창조드라마를 결코 죄와 죽음으로 끝맺지 않으신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 방치된 채 두시지 않는다. 죽음이 뭔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신실하신 성품 때문에 이런 상태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결렬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를 원래대로 회복시키려면 부활은 필연적이다. 부활이 없다면 죄와 죽음이 영구적으로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들을 구속하신 것이다.
아마도 외아들을 잃어본 이 여인은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처럼 우리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은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인의 마음이 어땠을까? 아들의 죽음이 마치 자기가 죽은 것 같았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아들이 살았으니 자기도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았을 것이다. 사람들도 놀라서 “위대한 큰 대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오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들을 잃고 슬퍼하며 눈물 흘리며 갈 수 밖에 없는 이 여인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이 여인만 자식을 잃는가? 모든 사람이, 부모, 형제, 자식을 잃을 수 있다. 일단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은 따라 붙어 다닌다. 어릴 때든, 청년 때든, 늙어서든 죽게 된다. 인간은 죽는 존재이다. 아무리 부자든, 황제든 다 죽는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넓은 제국을 다스리는 칭기즈 칸도 죽었다. 진시황도 죽었다. 세상을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도, 로마의 시저황제도 다 죽었다.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이므로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3. 죽음을 해결하신 예수님
죽음이 왜 왔나? 원래 죽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졌는데 인류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죽게 되었다. 성경만이 왜 죽는지를 알려준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연구했지만 이유를 모른다. 죄 때문에 죽는다. 아기는 왜 죽나? 아담과 하와에게서 받은 원죄성이 아기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나? 나쁜 생각, 부모님께 불순종, 내 맘대로 안 되면 화내는 것이 다 죄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다. 아무도 이길 자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셨다. 예수님만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히2:14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나.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데 마귀는 죄짓게 하면서 인간을 죽이는 일을 한다. 마귀가 가진 죽음의 권세를 예수님이 뺏으러 오신 것이다. 여인의 후손이시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예수님.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려하사’ 죽음을 안 무서워할 사람은 한명도 없다. 이런 자들을 해방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누구나 다 죽는데 남편도 없고 아들까지 잃어버린 이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불쌍한 여자이었다. 매일 울면서 살다가 병들어 더 빨리 죽지 않겠는가? 이게 남은 일생이다. 자, 이런 슬픔이 세상에 있는데 이 문제는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다. 그렇다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셨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은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시체로부터 부정이 옮겨 온다고 생각해서 시체를 부정하게 여겼다. 그래서 혈류병, 문둥병자들과 같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부정한 관에 손을 대시고 너의 죄로 인한 부정한, 그 죽음의 열매를 이제 내가 가져갈게 하시고 살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문제를 다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부정한 것에 손을 대고 내가 부정해짐으로 네가 죄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으리라. "청년아! 내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직접 시체에게 명령하셨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몇가지 말씀들을 살펴보자.
(1) 불쌍히 여기시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란 말은 스플라크논(σπλαγχνον 라캄 םחַרָ)이란 말인데 동정심을 가지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다 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의 어머니가 애절하게 우는 것을 보시고 그녀를 도와주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하시고 위로하여 주셨다. 이 여인의 슬픔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절망의 슬픔이다. 부모에게 가장 슬픈 것은 자식이 죽는 슬픔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청년아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 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14-15)
“관” 소로스(σορος) 뚜껑 없는 관이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관에 손을 대는 것은 시체에 손을 댄 것이나 같다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행위로 금지 사항이다.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자는 이레동안 부정하리니(민19:11).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신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 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다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민19:11-13). 관에 손을 댄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지배하시는 자임을 다시말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죽음을 지배하시므로 일어나라하시니 그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았다는 것이다.
(3) 하나님께 영광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대언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 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7:16-17).
죽은 청년을 살린 사건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큰 선지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버려진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 보셨다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따르는 모든 무리들과 그리고 나인성에 장례행렬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들렸다.
“두려워하여” 란 말은 무라(ארָוֹמ 포보스 φοβος)인데 무서움, 놀라다, 경외, 존경, 높이다 인데 이 두려움은 육신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백성이 황제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이고 신하가 임금을 두려워하는 높임의 표현이다. 즉 감히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했다는 의미이다.
“영광을 돌려다” 영광이란 말은 카보드(דוֹבכָ 독사 δοξα) 인데 감탄하다 빛나다 임재의 광체 감사하다, 찬양하다 이다.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의 현상을 의미하고 경의를 나타내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표현이다.
“큰 선지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셨다” 란 큰 선지자란 나비아 가잘(נָביא גָזַל 메갈레 프로페테스 μεγαλη προπητης)인데 높고 강한 선지자, 위대한 선지자 란 뜻이다.
유대인들에게 큰 선지란 모세, 엘리야, 엘리사 같은 선지자를 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선지자로 최고의 선지자로 여기고 죽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 선지자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엘리사 선지자를 위대한 선지자로 여긴다.
죽은 청년을 살리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져낸 모세와 같은 선지자요, 삼년 육 개월 동안의 기근에서 살렸고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엘리야 선지자와, 아람 왕 벤하닷의 이스라엘 침공에서 살려냈고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신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를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찬양하였다.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말은 에피스케피토마이(επισχεπτομαι)인데 의사가 죽어가는 환자에게 왕진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죽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선지자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사백년 동안을 선지자를 보내지 아니하고 버려두셨었다. 그리하여 신앙은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나라가 로마에게 멸망당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셨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우리를 다시 사랑하시고 우리를 찾아 주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큰 선지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를 다시 돌아보신 것이다 라고 기뻐 찬양했다.
“이 소문이 유대와 사방에 퍼지니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7:17).
시골 작은 성읍 나인성에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예수그리스도의 소문이 유대로부터 시작하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했다. “나사렛 예수가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렸다.”는 소문이 복음이 되어 사방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는 큰 선지자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보내신 선지자이다. 전 유대인들에게 소망이며 힘이며 기쁜 소식이었다. 나인성 청년을 살리신 사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이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부활 신앙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4. 죽은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메시야이다
유대 역사에 있어서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은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과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신 일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는 참 하나님의 큰 선지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많은 나인성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큰 선지자요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성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 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17-18).
주님은 일부러 관에 손을 대신 것은 죽은 자에게 안수 하시는 것도 아니고 말씀으로 살리실 것인데 관에 손을 대신 것은 죄를 사하시는 능력자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생명을 주관하시는 구주이심을 믿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때맞추어 나인성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부활 복음의 시작이다. 청년을 살리신 것은 이 청년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살려달라고 구한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의 뜻대로 살리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을 살리신 것은 말씀으로 살리셨다는 것은 이 또한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천지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나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아들을 살릴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능력의 도움을 입어 살렸으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생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구원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보이신 것이다. 청년이 살아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뜻이다. 이 말은 인류의 구원은 의의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믿는 혈통의 조건이나 율법에 의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 진리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다.
(사9:1-4)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주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고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 즐거워하도다.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 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꺽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유대인들은 부활 신앙이 없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산 에녹과 엘리야처럼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산채로 승천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서도 사두개파는 부활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고 바리새파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썩기 까지는 육체 안에 영혼이 머물러 있다가 육체가 다 썩은 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하여 방부제인 향품을 마련해 가지고 무덤에 찾아 왔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인성 청년을 살리신 뜻을 몇 가지 생각할 수 있다.
❶ 관에 손을 대심으로 인하여 율법의 완성자이며 입법자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❷ 말씀으로 살리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과 생명의 주관자임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❸ 죄값으로 죽는 인간을 살리심으로 죄를 사하시는 자이심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❹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❺ 청년을 살리심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는 것이 청년 자신의 선행도 아니며 청년의 기도나 어머니의 기도를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5.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4-17).
하나님은 사랑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청년아 일어나라” 이 말씀 한마디로 살아나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면 다시 산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은 부활생명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모두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부활의 몸을 입어 영생을 누리는 부활생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