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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향한 시므이의 저주 / 사무엘하 16:5-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는 다윗에게, 자신의 느낌과 미워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저주를 퍼붓고 있는 시므이입니다. 우리 주변을 가만히 보면, 대략 두 종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좋은 말만 하고, 자기 입장이나 잇속을 챙기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건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기를 경험하게 되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내가 정당한 위치에 있고, 다른 사람보다 나은 여건에 있을 때는, 아무도 내 곁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자기 입장을 드러내 보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미쉘다인이 ‘몸에 벤 어린시절’에서 설명한 대로, 부모의 양육태도가 인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정리해 보면서, 먼저 본문에 등장한 시므이의 인격의 내면적 구조를, 부모의 양육태도에 의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도피하는 다윗은 베냐민의 영토를 지나갈 때 바후림에서 시므이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시바와는 반대로, 자기 안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목숨을 걸고, 그대로 여과없이 표출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을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 옆에는 아비새라고 하는 충성스런 장군이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다윗을 저주하면 그 칼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저주하고 비난을 퍼붓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들이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로 윗사람을 들이받습니다. 자기보다 경제적 여유가 더 있거나, 더 배웠거나, 직장에서 자기보다 여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가 자기와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줬다고 하면, 목숨을 걸고 덤빕니다. 이것은 정직한 의협심이 아니고, 잘못된 삶의 구조 속에서 형성된 성격 때문입니다. 시므이 형 인간이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으로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는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시므이 형 인간은, 주로 윗사람을 들이받습니다. 이것은 정직한 의협심이 아니고 잘못된 삶의 구조 속에서 형성된 성격 때문입니다. 이런 성격을 만들어내는 양육태도는 부모의 강압, 거부 등입니다.
1. 강압형의 부모입니다.
① 먼저 강압형의 부모의 양육태도를 보십시다. 강압이라는 것은 아이의 자율성이나 원하는 것들은 배려하지 않고, 무조건 부모에 의해서 모든 것이 주도되는 구조입니다. 옷을 입어도 부모 기준에 맞게 입어야 되고, 아이가 나가 놀려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데도, 집안에서만 있게 하고 공부만 하게 하는 식으로, 부모의 의도에 의해서 아이를 조각하려고 할 때 생겨납니다. 아이의 자율성, 개성, 그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이게 강압입니다. 지나친 훈계, 잔소리, 끊임없는 지시 등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 자녀들은 어렸을 때부터 분노와 적개심을 갖고 성장하게 되고, 두 가지 형태로 자기를 표출하게 됩니다.
② 먼저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아이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어른들의 권리에 대해 무조건 대항하는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 회사에 가면 자기 상사, 교회 오면 목사 등 나보다 더 나은 여건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이 있거나 하면 조금도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 밑의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면, 아주 관대하게 용서하거나 자비를 베풉니다.
③ 다음으로 소극적으로 반항하는 경우입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기피합니다. 집을 나간다거나 늑장을 부립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15분, 바지 입는데 10분, 그러면서 아침마다 엄마와 전쟁을 합니다. “학교 늦겠다.” 하면 “알았어요.” 하고는, 양치질하러 들어가서 10분, 이런 식으로 계속 늑장을 부리는 것으로, 자기 안에 있는 반항심리나 분노를 표출합니다. 소극적으로 대항을 하는 것입니다.
④ 이런 분들이 성장하게 되면 남편과 한번 외출하려고 할 때마다, 30분, 또는 한두 시간 늑장을 부리며 한없이 늘어집니다. 불만이 꽉 차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성질이 급한 남편은 울그락 불그락 하게 되고, 또 전쟁을 한바탕 치르게 됩니다.
⑤ 강압의 구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부모가 그의 모든 걸 지배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고, 피곤한 것, 신경써야 할 것, 정성들여야 할 것은 기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늘 마음 가운데, 권위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갖고 살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한테 걸리면, 그들은 준비된 폭탄처럼 언제든지 위험한 상태입니다.
2. 거부 성향의 부모입니다.
① 또 하나의 구조는 ‘거부’입니다. 거부라는 것은, 부모가 계속 아이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를 하는 것입니다. 아이 감정을 쉽게 상하게 하고, 작은 것인데도 자꾸 거부합니다. 저희들 어린 시절에는 그런 구조가 많이 있었습니다. 기성회비를 내야 하는데, 돈이 있으면서도 돈을 안주는 거예요.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고 떼를 써야, 엄마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의 의식 속에는 자기가 요구하는 것은, 엄마가 무조건 거절한다는 거부감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존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가서 대우받거나, 칭찬 듣게 되면 좌불안석입니다. 어색합니다. 늘 비난만 받고 살아왔는데, 칭찬을 받으면 오지 말아야 할 자리에 온 것처럼, 굉장히 불안해 합니다.
② 또 부모가 형제 중 누군가를 편애하거나, 다른 아이들과 계속 비교하는 구조에서 성장하게 되면, 이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시기, 질투의 구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항상 비교 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보다 나은 사람은 기어이 짓밟고 눌러놔야 합니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다른 사람 잘난 꼴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징은 무가치감과 낮은 자존감입니다. 실제로 하는 걸 보면.. 잘하는데도, 늘 자신은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줘도 못 믿습니다. 그리고 늘 불안합니다. 뭔가 일을 해야 되고 가만있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열등감, 깊은 적대감,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감, 대상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계속 속에서 타오릅니다.
③ 이런 사람이 성인이 되면, 그 언사가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농담을 해도 편안한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남을 깔아 뭉게는 농담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인격적으로 상처를 입어도, 고려하지 않고 막 짓밟아 버립니다.
④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져줘도 사고가 납니다. 평범한 대화에도 쉽게 상처받고 오해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엄청난 오해를 해서 원수가 되어 버리고, 또 다른 사람이 혹시 나에 대해서 거절하거나 혹 충고를 하기라도 하면, 그 사람과는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구조가 바로 거부성향에서 성장한 성인아이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누구신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영이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인간은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과 사고방식 모두가 악으로부터 창출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에 처한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악에 의한 개념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악은 자기중심이라는데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라는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에 놓여 있는 인간이기에, 하나님 역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로 인해, 결국 다윗을 저주하는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5절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이라고 말하는데, 곧 사울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므이가 다윗을 어떻게 저주하는가 하면, 7-8절에 저주의 내용이 나옵니다.
7-8절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처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내용은,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압살롬의 나라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시므이는 다윗의 지금의 상황을,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다윗을 벌주기 위해,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하게 하시고, 다윗은 도망치는 형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게 일어난 상황만을 본다면, 사울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의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큰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한 댓가를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결국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이해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식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을 치는 상황이 되었다면, 일단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돕지 않으시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돕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다윗이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시므이는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신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왜 도우시는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도우심의 의미도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돕는다는 것을 무작정 세상의 일이 잘 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은, 단순히 편안히 잘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이 원하고 생각하는 신의 도움은, 삶의 편함과 잘됨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해 백성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위해 백성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일의 성취를 위해, 백성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을까요? 복주시고 천국보내기 위해서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만,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도우시고, 때로 징계도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신의 복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에, 잘되면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으로, 잘되지 못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되면,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이 처한 상황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거나 돕고 계시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을 벌주시는 것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봐도 다윗의 상황은 어둠이고 불행이며, 복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상황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는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을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나를 돕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되어지는 모든 일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꿰어 맞추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교인이 목사를 헐뜯고 욕을 했는데, 다음날 그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 일을 두고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욕을 먹은 목사 입장에서는, 사고 당한 원인이 자신을 욕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를 욕했으니, 하나님께서 징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먹힌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중대한 오류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내편에 서서 나를 도우시는 분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상황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악한 범죄를 깊이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울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으며, 다윗이 자신의 죄를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므이는 하나님의 일을 철저히 자기중심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와 같은 생각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므이처럼 타인이 처한 상황을 두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그런 벌을 받는다는 등, 성도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등의 말로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야 말로,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체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삼가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이래서 이런 일이 있다’는 식의 말은, 자신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무지한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쉽게 알 수 있습니까?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시므이의 오류가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족속 중 한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이 마치 사울의 편을 들고, 사울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저마다 시므이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니, 모두가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울도 다윗도 나도 아니라,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기 위해 일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해석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위한 해석, 내 교회를 위한 해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곧 성경의 중심에 내가 있어서도 안되고, 내 교회가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경의 중심에 우뚝 서 계셔야 합니다. 그럴 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는 해석으로 일관되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해석만이 참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기 위해 계시지 않고, 내 교회를 돕기 위해 계시지도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를 도우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성취를 위해 말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몇 년을 믿었느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맡아 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봉사하느냐가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누군지도 모르면서 믿는 것이야 말로, 맹목적인 것일 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질문한 것 중 하나가, ‘왜 참된 백성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괴로움을 당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형통하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악이 성행하도록 그냥 두고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성도의 입장에서는, 매우 혼란스러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더 큰 악이 설칠 것이고, 아무도 그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답이 과연 의문에 해결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성도의 복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저주임을 생각한다면, 모든 의문은 해결될 것입니다. 곧 악인이 아무리 큰 힘을 가지고,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는 결국 저주의 존재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안다면, 시므이와 같은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성도가 이 땅에서 승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형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입장, 자기 형통에 치우쳐 살지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시므이와 같은 생각에서 떠나게 합니다. 내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서게 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과 세상을 보게 합니다. 그럴 때 세상 되어가는 일에서, 자신의 되어가는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