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편 90편 1-12절, 누가복음서 17장 20-21절, 살전 4장 13-18절
한 문 덕 목사
[주님의 재림과 죽은 사람의 부활]
예수님 시대 당시 첫 교인들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 되면서 교인들의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과 또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는 이들은 주님께서 얼른 오셔서 이런 모든 어려움들에서 자신들을 구해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둘씩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들의 상처와 시름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은 이런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바울 사도의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가 선교하던 당시 데살로니가는 일본인들이 천황을 생각하듯 온 시민들이 로마황제에 대하여 깊은 경외감과 애정을 품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로마의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왕이라고 전하는 일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했고, 매우 어렵게 데살로니가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시의 질서를 파괴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위험분자로 여겨지고,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이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머물던 집은 습격을 당하고, 바울과 함께 있던 믿음의 식구들은 결국에는 도시를 소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고, 죽음의 위협에 이르게 됩니다(사도 17:1-9).
신도들이 재빠르게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탈출시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런 과정에서 일부 신도들은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동료들의 만류로 가지 못하고 대신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디모데를 보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이 궁금하였고, 박해의 상황에서 이들의 신앙이 무너질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이들은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살전 3:2-6).
바울 사도는 편지를 통해 이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먼저 죽어 잠들어 있는 자들이 부활하여, 산 사람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되리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고, 삼층천에도 올라가는 신비 체험을 하고, 주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는 매우 깊은 차원의 경지에 들어간 분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을 일종의 환상이나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뒤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 추측해 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종말론]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모든 종교는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교의 윤회설이 그러하고, 그리스의 영혼 불멸설, 그리고 가톨릭의 연옥설 등 매우 다양한 이론들이 있습니다. 자연문명이 발달한 오늘의 많은 현대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그 이후에 삶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죽음이 닥쳐오면 모든 인간은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또한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현재의 삶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또한 이런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것을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종말이라는 말은 마지막의 것 또는 궁극적인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론은 죽음, 죽음 이후의 상태, 예수의 재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나오지만 성경도 구체적인 내용을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종말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을 경험한 이들이 없기 때문에 정말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삶의 마지막과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과 믿음은 우리들의 현재 삶에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종말론은 미래에 이루어질 이야기라기보다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통해서 현재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인간 세계와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해명하여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는 것, 각 개인이나 교회에서 삶의 의미나 목적을 상실할 때 그것을 치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제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내용들을 하나씩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는데 오늘은 바로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대해서 함께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 사회를 보자면 우리 사회는 죽음 배제의 사회라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죽음 이야기를 하면 재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 교육을 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죽음을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작가 버나드 쇼는 95세의 나이에 임종을 앞두고 본인이 직접 남긴 말을 묘비에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묘비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쓰여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지만, 죽음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살다가,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 형편입니다.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분들을 오래도록 돌보며 죽음에 대해 연구했던 죽음학의 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저항합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점점 다가오면 고립감을 느끼면서 분노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울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잘 살고 죽음도 아름답게 맞이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을 오복 중의 하나로 여기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항과 분노, 우울함과 후회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편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는 이들은 현실적인 것에 집착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탐닉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죽음과 죽임의 현실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무감각해지고, 그래서 이 사회는 갈수록 비인간적이 됩니다. 또 그런 사회가 당연한 듯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시 죽음을 바르게 의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예상할 수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미리 생각한다면, 역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의 말씀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있는데, 바로 이 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매 순간 자신의 삶을 더욱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오히려 우리는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년 초가 되면 그 해의 유언장을 작성합니다. 유언장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 내가 좋아했던 성경구절과 찬송 등을 적고, 가족과 믿음의 식구, 그리고 친구들에게 남기는 말도 적습니다. 죽은 다음에 장례식은 어떻게 치를 것인지도 알려 주고, 자신의 인생을 간략하게 몇 줄로 정리한 요약문도 적습니다. 불치병에 걸렸을 경우 기계에 의해 인위적인 생명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씁니다. 이렇게 유언장을 쓰다보면 삶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죽음 : 삶의 완성]
그런데 죽음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죽음은 자연적인 것인가요? 아니면 죄의 결과인가요?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인가요? 아니면 모든 육체적 한계로부터의 해방인가요? 어떤 사람에게 죽음은 자연스럽고 심지어 육신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지긋지긋한 이 땅으로부터의 해방이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죽음은 비극이자 고통,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물적 차원에서 나이 들고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는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말해 왔기에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이해할 때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생물적 차원에서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이가 들어 찾아오는 자연스런 죽음에서부터 병으로 인한 죽음까지 모든 생명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명을 못살면 억울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죽는다는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차원에서 죽음은 단순히 호흡 정지, 심박동 정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느 어느 학교를 졸업해야 비로소 그 학교의 학생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만약에 중간에 자퇴를 하면 그 학교 출신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어떤 면에서 죽음은 우리의 삶을 완성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죽어야 가능한 것이지, 죽기 전에 아직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의미 차원에서 삶과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연장, 목숨부지와는 다릅니다. 살았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이 있고, 죽었지만 영원히 사는 죽음도 있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는데, 문대골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면서 “장준하는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물적 죽음이 곧 존재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합니다. 멋진 삶을 산 사람만이 멋지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죽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삶을 살게 하는 힘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을 때 자신을 완성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죽음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살다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장례예배를 드릴 때마다 죽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거룩한 얼이 가득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원래 있던 그 자리로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라는 책을 쓴 서울대 의대 내과학 교수인 정현채 선생은 자기 묘비명을 이렇게 적습니다. “우리는 무제한 여권을 가진 시간 여행자.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과 즐거움이 함께 했던 인생 수업을 마치고 본향으로 복귀합니다.” 그는 죽음은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미래를 사는 삶]
죽음을 앞당겨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큰 깨달음 하나를 또 얻게 됩니다. 우리들은 죽음이 부활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깐 잠드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그 때에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고, 울부짖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다시는 죽음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생이라 부르고,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또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새롭게 다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이것을 본 회퍼 목사님은 “약속이 의미다.”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종말은 희망이며, 오늘날의 고난도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것을 믿는다면, 영원부터 영원까지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영생의 시작이라면, 우리는 현실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며 세상의 변혁에 일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과감하게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함께 보는 넓은 시야를 획득함으로써 미래를 앞당겨 사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창립 기념 주일에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정찬구 집사, 김원배 성도 등 옛 생명교회에 다녔던 분들을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 만났습니다. 문혈 집사 또래 네 다섯 명이 자주 모임을 하는데, 저도 거기에 종종 낍니다. 그 때 거기에서 한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옛날 친구들 만나면 주로 대화의 내용이 옛날 얘기만을 하는데, 현재 사는 얘기도 하고, 앞으로의 얘기도 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과거의 이야기가 70%가 넘고 지금 사는 이야기는 조금 하고, 미래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데, 앞으로는 이 비율을 바꿔 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함께 모여 얘기하는 것이 그저 과거에 머무른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 나아갑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현재를 살아가고, 그것을 미루어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 생각해 보면 과거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것은 이것과 다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미래의 일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갑니다. 미래를 꿈꾸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합니다. 이것이 종말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를 예상하면서 현재를 바꾸는 것입니다.
미래를 앞당겨 살아가는 모습은 어린이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야말로 종말론의 영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내일 소풍을 가는 것 때문에 오늘 매우 행복하고 신나고 설레는 삶을 삽니다. 어른들은 과거의 경험에 묶여 내일 소풍을 간다 해도, 비 올 걱정, 차 막힐 걱정, 갔다 오면 몸이 피곤할 생각 등을 하지만, 어린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은 바로 이런 어린이들 같아야 합니다.
오늘과 16일에 우리는 각 신도회들이 모여서 우리의 미래를 함께 얘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희망찬 미래를 꿈꿉시다. “옛날에 해 봤는데 다 소용 없어요.”라고 말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어서,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켜서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를 지금 만들어 봅시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에서 멈출 수 있지만 우리가 모여 함께 꿈을 꾼다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볼 수 없는 것, 아직 오지 않는 것 속에, 우리의 미래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직 오지 않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어 주시는 주님, 우리의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지만, 주님께 의지하여 영생을 누립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다 하셨으니, 우리가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며 그 시점에서 오늘을 새롭게 만들게 하여 주소서. 이제 생명사랑 신앙공동체의 비전을 만들어 갑니다. 지혜를 주시고, 용기와 능력도 베풀어 주소서. 온전히 주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달려가게 하소서. 달리는 자에게만 맞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바람을 시원하게 느끼게 하소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지난 6년의 세월을 지켜 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서 성장하도록 허락하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새로운 생명사랑 신앙공동체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당신의 아들딸로 살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 주소서. 우리가 오늘 거룩한 주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들고 주님께 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받아 주소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주님께 정성껏 예물을 드리오니, 받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소서. 하늘 시민으로 살려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평화와 복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 생명, 평화, 정의가 이뤄지게 하시고, 우리가 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에 굴복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생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의 은혜 가운데 약속을 믿고 또 한 걸음 전진하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