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8回 忠州全國漢詩紙上白日場 要綱
1. 趣旨
2025 제18회 忠州全國漢詩白日場을 下記와 같이 지상백일장으로 개최하오니, 이에 관심을 가진 全國의 漢詩 同好人 여러분께서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2. 詩稿 마감 : 2025년 5월 30일 도착분
3. 主催/主管 : (사)해동연서회충주지부/中原吟社
4. 參加對象 : 漢詩 創作同好人
5. 詩題 및 押韻:
1) 詩題 : 讚金生田遊巖山家序
2) 押韻 : × ․ 傳 ․ 連 ․ 宣 ․ 田 ․ 延 ․ 先(先目)
★ 原韻詩 參照
★ 詩題는 7言 排律로 作詩(첫구 운자 없음)
★ 반드시 주최측의 시고지에 自筆로 제출요.
6. 作詩上 유의사항 :
1) 詩稿紙 작성시 반드시 楷書(정자)로 쓸 것.
2) 違簾.對不合.疊字.疊意외 일반관례에 준함.
7. 考選 : 斯界 權威者에게 委囑, 嚴正 考選함.
8. 入賞者 發表 : 2025년 6月初 個別通知
9. 施賞 : 壯元 1人 상장 및 부상 일백만원(충주시장상)
次上 1人 상장 및 부상 오십만원
次下 1人 상장 및 부상 삼십만원
參榜 10人 상장 및 부상 각 이십만원
佳作 20人 상장 및 부상 각 일십만원
10. 施賞式 : 2025년 12월 13일(토) 오후3시 충주문화회관 전시실
* 수상작은 제44회 해동서예전에 전시함.
11. 送稿處 : 우편번호 27365
충북 충주시 대가미9길 12. 중원음사/해동서당
12. 問議 : 徐東亨 010-8727-5456 / 崔殷盛 010-6589-5731
-다음카페 중원음사 참조
(사)해동연서회충주지부 / 중원음사
原韻詩 - 讚金生田遊巖山家序(先統)
金公墨跡 山家序 전유암 산가서는 선생의 묵적이라
一筆揮毫 逸品傳 일필 휘호한 일품이라 전한다네.
對等蘭亭 稱頌藉 난정서와 대등한 칭송 자자하고
比肩逸少 讚辭連 왕희지와 비견되는 찬사가 이어오네.
點如雁足 潔淸擬 안족 같은 점은 결청함을 헤아리고
劃若水流 柔麗宣 물 흐르는 획은 유려함이 펼쳐있네.
曲直字形 含氣魄 자형의 곡직은 기백을 머금었고
圓方文勢 響心田 문세의 원방은 마음을 울린다네.
銘碑建立 萬人仰 비로 새겨 건립하여 만인이 우러르고
拓本保存 千歲延 탁본으로 보존하여 천세를 이어야하네.
鼻祖吾書 緘口訴 우리 글씨 비조가 함구됨을 하소연하니
懇望紀館 促于先 기념관 간망하며 우선 촉구할 뿐이네.
第18回 忠州全國漢詩白日場 簡介
田遊巖山家序
夫以養性閑庭은 閉蓬門而翫書史라 遊心江漢인댄 策黎杖而望煙霞하면 白雲散而天地分하고 靑山寂而林泉麗니라 兀然獨坐하여 披尋老子五千文하고 寂寞幽栖하여 平酌嵇康一兩盞이라 遊天四望이면 雲積如帝鄕之樓하고 拓地三思하면 澗烟似秦川之水라 劉伯淪之隱處엔 翠柳三行하고 黃叔陶之閑居엔 靑松萬丈이라 池分九曲하니 時時流鸚鵡之盃하고 花有六岐하니 往往落鴛鴦之色이라 橫琴窓下면 擬遺風彈種萼庭前이라 用調蜂蜜하고 五丸仙藥하여 以充千日之飢하고 九轉神丹하여 延我百秊之命下니라 官性便山水志重琴書하며 橫筵就巢父之河하고 攜酒往許由之水니라 獨酌獨飮하니 與山鳥而齊歌하고 自吟自詠하니 共叢花而競嘆하니라 樂矣美矣로다 半醉半醒하여 勸酒於嶺上之雲하고 伴我於池中之鶴이라 雖盃中葉綠이나 眼外花紅이로다 金烏落於峰西하고 玉嶺頹於席上이라 驚風入牖하니 知我酕醄하고 明月臨庭하니 交人落託이로다 不遊四海하고 獨坐山家하여 聊述五行은 傳於後代云尒니라 報德寺 金生 書
迢迢嵩嶺北에 避世洛城東하니 門足陶潛柳하고 徑多原憲蓬이라 壺裡澄明月하니 琴上引淸風이라 誰能逐名利하여 終日事王公이리오
전유암 산가서
무릇 성품을 기르려면 한가한 집에서 쑥대 문을 걸어 닫고 완숙하게 경서와 사서를 읽어야 하네. 때로는 마음이 강으로 달려가 노닐 때는 지팡이를 짚고서 산수의 경치를 바라보면, 흰 구름이 흩어지니 천지가 완연히 분간되고, 푸른 산이 고요하니 임천이 아름답고 곱네. 우뚝이 홀로 앉아 老子 道德經 오천문을 펼쳐도 보고, 적막하고 고요함이 깃든 곳에 살면서 평소 嵇康이 따르던 한두 잔 술을 따라 마시도다. 사방의 하늘을 바라보니 쌓인 구름은 옥황상제의 궁궐누각 같고, 땅에서 세 번 생각하니 시내의 안개는 진천의 물안개 같구나. 劉伶이 은거하는 곳에는 버드나무 세 줄로 심어졌고, 黃叔陶가 거처하는 한가한 곳에 푸른 소나무 천지네. 아홉 구비로 나누어진 연못물은 때때로 앵무 술잔에 흐르는 것 같고, 여섯 갈래 눈꽃은 원앙 얼굴에 떨어지네. 거문고 비껴잡고 창 아래에서 옛 풍속 비슷하게 꽃 심은 뜰 앞에서 퉁겨보네. 꿀을 조리해서 다섯 개 선약을 만들어서 천일 동안 굶주린 배를 채우고, 아홉 번 찐 신단을 만들어서 나의 수명을 백년으로 늘여보네. 본래 성품이 편벽해서 산수에 뜻을 두었고 거문고와 서책을 귀중하게 여겼네. 멋대로 자리를 떠나 巢父가 사는 산하를 찾아가 보았고, 술두루미를 차고 許由가 사는 潁水에도 가보았네. 그러나 홀로 앉아 술 따르고 마시니 산새와 함께 노래도 하고, 스스로 시 짓고 읊으니 모든 꽃들과 함께 다투어 감탄하네. 즐겁고 아름답도다. 반쯤 취하고 반쯤은 술이 깨니, 산마루에 구름에게도 술을 권해보고, 못 속에 노는 두루미도 나와 짝을 해 즐기네. 비록 술잔 속 잎은 푸르나 눈밖에 꽃들은 붉게 활짝 피었네. 해는 서쪽 봉우리에 지고 아름다운 산마루는 자리 위에 떨어지네. 세찬 바람이 문으로 들어오니 내가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한 것을 알 수 있고, 밝은 달이 뜰에 비치니 사람들과 사귀려는 뜻이 없네. 사방을 떠돌아다니지 아니하고 홀로 이 산속 집에 앉아서 그럭저럭 오행의 시를 짓는 것은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라네.
멀고 먼 북쪽 높은 산마루에 세상을 피해 洛陽城 동쪽으로 찾아오니, 문 앞에는 陶淵明의 버드나무 넉넉하고 길에는 原憲이 사는 곳처럼 쑥대 무성하네. 술병 속에 비친 밝은 달빛처럼 깨끗하고, 거문고 타는 소리는 맑은 바람을 끌어드리네. 이러하니 누가 능히 명예와 이익을 쫓아 하루종일 왕공을 섬기겠는가. 보덕사 金生 서
解題
「전유암산가서」는 통일신라시대의 名筆, 金生(711~790?)의 유일한 양각본 書帖이다. 총 315자로 가로13.5cm, 세로25cm로 책표지를 포함, 모두8폭으로 표지에는 서첩명 ‘전유암산가서’, 말미에는‘보덕사 김생 서’로 되어있다. 가로, 세로 모두1.8cm로 小行草字로 앞쪽에는 산가서 5엽이 있고 뒤쪽에는 五言律詩 1수가 붙어있다.
「전유암산가서」는 전유암의 悠悠自適한 山中 삶의 노래와 이를 후손에 전하기 위해 김생 자신의 지은 오언율시를 담고 있다. 말미에는‘보덕사 김생 서’라고 서명을 해놓았다.
新唐書 隱逸列傳에 당나라 전유암이라는 사람이 재주가 뛰어났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太白山에 들어갔다. 가족들도 세속에 뜻이 없어서 모두 함께 산수 간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의 능력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조정에서 불렀으나 그는 병을 핑계로 箕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고종이 근처에 행차하였다가 직접 그가 사는 곳에 찾아갔다. 전유암이 초야의 옷을 입고 나와 재배하니, 고종은 그가 또 가버리기 전에 좌우를 시켜 붙잡고 물었다. “선생은 이런 생활이 좋으십니까?” 전유암이 말했다. “신은 물과 바위에 대한 마음이 膏肓이 되었고 안개와 노을을 좋아하는 마음이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성상의 태평성대를 만나 다행히 거닐며 소요하고 있습니다.[臣泉石膏肓, 煙霞痼疾, 旣逢聖代, 幸得逍遙.]”
서예역사에서 話頭가 된 두 성인이 있는데 중국이 王羲之라면 한국은 김생이다. 왕희지가 이전의 篆隷를 토대로 魏晉 이래의 글씨 법을 세웠다면 김생은 통일 신라 이전의 삼국 글씨를 토대로 王法과 唐法까지 하나로 녹여 우리나라 서예의 법을 처음 세웠다.
金生은 한국 서예의 祖宗格이다. 이어서 고려의 坦然,李嵒,조선의 李瑢,黃耆老,韓濩,尹淳,李匡師,金正喜와 같은 거장들이 탄생했다. 한국 서예는 이런 명필들을 거쳐오는 동안 중국 서예와 같으면서도 또 다른 우리만의 서법을 개척해 왔다. 李仁老는“신라 사람 김생은 用筆이 神과 같아 草書도 아닌 듯 行書도 아닌 듯 매우 신기로우니 멀리 57종의 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 “신라인 김생은 필법이 기묘하니 위·진대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극찬했다.
徐居正은 “우리나라 서가를 논하면서 김생이 제일이며 학사 姚克一과 스님 坦然, 靈業이 그 다음인데 모두 왕희지를 법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
李匡師는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宗으로 여기지만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나 탑본 역시 奇偉하고 법이 있어 고려시대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그는 神品의 명필가이기도 했지만 好佛不娶했고 頭陀行을 수행한 名僧이기도 했다. 충북 충주시에는 김생이 지은 사찰터 김생사지가 있다. 조선 후기 학자 李鍾徽 시문집인『修山集』「金生寺重修記」와『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김생이 北津崖, 예성의 북쪽나루라는 곳의 절에서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북진애가 지금의 충주시 금가면 유송리이다.
첫댓글 第18回 忠州全國漢詩紙上白日場 대회 개최를 축하드립니다
성황을 이루시고
많은 발전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