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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감정을 치유하라. (I) 분노
성경본문 : 잠언 16: 32
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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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규 목사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명상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사순절은 단순히 주님의 고난을 명상하는 것으로서 그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중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난을 대신 져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 53: 4-5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성처들을 깨끗이 치료받아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저는 사순절 기간 동안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는 제목으로 ‘분노,’‘우울증,’‘열등감,’‘죄책감,’‘고독’에 대하여 차례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Heal Your Wounded Heart (I): 'Anger'
한국 신학대학에서 목회상담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 중에 정태기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이 분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목사님이 나이 37세에 자기 마음의 상처를 고치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두 개 있었습니다. 첫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고 또 하나는 '재봉틀'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들을 무서워했고, 또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다리가 사정없이 떨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들이었습니다. 정목사님은 미국에 유학와서 공부하시다가 37세 되던 해, 치유 그룹에 들어가 자신의 상처에 대한 원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친어머니가 계셨지만 제법 돈이 있었던 아버지는 열 여섯 살이나 어린 젊은 여자를 작은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본 부인에게서 4남매를 낳고, 작은 부인에게서 5남매를 낳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다정할 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폭군으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정목사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캄캄할 때까지 함께 놀 친구도 없는데 집밖에서 마을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일에만 파묻혀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두운 가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나다 보니까 자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성격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상처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니까 이유 없는 분노와 불안, 짜증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마음 깊은 곳에 분노가 쌓이게 되자 화풀이의 대상으로 만만한 사람을 골라서 골탕을 먹이게 됩니다. 정목사님 댁에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의 아들을 이유 없이 못살게 군것입니다. 부모님께 분풀이를 하려다 보니까 도저히 무서워서 못하고, 그 대신 애꿎고 죄없는, 그리고 아무 힘도 없는 아이를 무조건 괴롭혔던 것입니다. 정목사님의 간증에 따르면, 자기 속이 아주 분노로 들끓어 오를 때면 그 파출부 아주머니의 아들을 빈 항아리에 들어가게 하고 뚜껑을 닫아서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풀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정목사님이 가진 병적인 분노의 희생자는 집에서 키우던 얼룩소였습니다. 형이 맡은 소는 살이 잘 찌는데 정목사님이 기른 소는 바짝 바짝 말라가고 고삐만 잡으면 안절부절을 못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얼룩소를 때리고 못살게 구니까 소 역시 히스테리 신경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목사님이 이와 같은 분노를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치유하지 못했을 때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부부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습니다. 이 분은 37세 때까지 인생을 늘 우울하게 비관적으로 살아오다가 6개월 동안의 치유 그룹 공동체에 들어가서 마침내 이 상처를 고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분노의 감정을 먼저 치유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분노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조그만 화를 내는 것에서부터 격노하는데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분노의 감정을 느끼며 삽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유달리 분노가 많은 편입니다. 아마 오 천년 역사 동안 너무 많은 시련을 겪다 보니까 어떤 한(恨, unresolved anger)이 우리 속에 맺혀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사실 우리가 분노를 잘 조절하기만 하면 분노는 우리의 발전을 위하여 굉장히 큰 자극과 창조적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분노를 잘못 다스려 폭발해 버릴 경우 상대방은 물론이고 공동체와 자기 자신까지 겉잡을 수 없이 파괴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마치 '성냥개비' 하나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냥개비를 잘 관리해서 적절한 불을 만들어 쓸 때,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음식도 만들 수 있고 기계를 돌릴 수도 있게 해줍니다.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냥개비 하나가 부적절하게 쓰여져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게 될 때 집안 살림은 물론이고 온 동네, 온 세상을 다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만큼 무섭습니다.
또한 정목사님의 얘기에서와 같이 자기를 정말 화나게 한 사람에게 분풀이하기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애꿎은 사람들이 우리의 분노의 희생물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분노할 수 있다. 이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를 화나게 만든 바로 그 사람에게, 자기를 화나게 만든 것과 똑같은 정도로, 적시에,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분을 내는 일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쉬운 일도 아니다."(Anybody can become angry. That is easy. But to be angry with the right person and to the right degree and at the right time and for the right purpose and in the right way--that is not within everybody's power and is not easy.)
오늘 여러분 모두는 분노의 감정을 잘 통제하고 치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분노의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제일 먼저 분노의 원인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의 원인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분노에 대한 정의부터 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영어 사전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분노란 진짜로 잘못된 것 혹은 오해로 잘못된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아주 불쾌한 감정을 말한다."(Anger is a strong feeling of displeasure aroused by a real or a supposed wrong.) 이와 같이 분노는 적어도 자기 자신이 볼 때에 잘못된 일에 의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아 생기는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분노를 느끼게 됩니까? 무엇이 우리를 화나게 만듭니까? 오래 전 미국의 어떤 연구원이 한 그룹의 대학생들에게 일주일 동안 그들을 화나게 만든 것을 적어 오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른 사람에게 야단을 맞았다든지, 일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든지, 돈을 잃어버렸다든지, 다른 사람의 차가 자기 차를 들이받았다든지, 아니면 원치 않는 시간에 누가 잠을 깨웠다든지 할 때, 분노를 느꼈다고 대답했습니다. 약 80% 이상의 응답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분노는 대인관계에서 자기를 정당하게 표현할 수 없고, 특히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게 될 때 주로 생겨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 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대노(大怒)해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 적이 있습니다(출 32: 19). 모세가 왜 이렇게 까지 화가 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기만 하셨던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전을 쑥밭으로 만드셨습니까? 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까? 그들이 불의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성전 장사꾼들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1: 13).
그 다음에 사람들은 자기가 계획했거나 기대했던 일들이 좌절될 때 분노합니다. 자기가 꼭 가고 싶었던 대학에 못 들어가게 될 때, 승진 심사에서 누락 될 때 사람들은 분노를 느낍니다.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의 빅토리아라는 곳에 사는 게리 프리들(Gary Priddle)은 다른 사람의 개를 골프채로 마구 때려 중상을 입힌 죄로 재판에 기소된 적이 있습니다. 프리들은 자기가 차를 몰고 가는데 바로 앞에 가던 픽업 트럭이 오리 떼들이 지나가도록 멈추어 서서 기다리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이 픽업 트럭이 자기를 빨리 못 나아가도록 막았다고 화가 난 나머지 이 차 뒤에 태워 둔 개를 골프채로 마구 때려 상처를 입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가 의도했던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분을 품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거절당하거나, 제지를 받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받을 때, 혹은 부당하게 비난받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 될 때 분노를 느낍니다. 창 4장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쳐죽였습니까? 자기가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드려지지 않았는데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인 자기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셨고, 자기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고 할 때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자신의 제사가 거절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가인은 안색이 변하여 크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분노를 잘못 처리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불명예를 떠 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노를 느낄 때 "도대체 나는 왜 이런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 원인을 잘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병은 원인만 제대로 알면 대부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의 원인, 분노의 이유를 바로 알 때 우리는 분노를 바르게 통제하고 바르게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이제 분노의 원인을 알았으면 분노를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분노에는 사실상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분노가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와 죄에 찬 분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분노와 세상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분노를 죄에 찬 분노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분노, 즉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분노입니다. 불의한 세상, 죄에 가득찬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도 분노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분노가 죄에 찬 분노가 되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우리와 이웃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분노가 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가 되려면 죄에 항거하는 분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순전히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죄와 싸울 때 그 분노는 거룩한 분노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룩한 분노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하여 통제됩니다. 인간의 육정이나 기분, 혹은 마귀에 의해서 조종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권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거룩한 분노는 우리의 이기적 만족을 구하지 않고 이웃과 공동체의 건덕을 세우게 합니다. 내가 분노를 발해서 일시적으로 내 기분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만일 공동체와 이웃에 상처를 준다면 결코 거룩한 분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의 날마다 생길 수 있는 분노의 감정을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대개 분노의 감정이 생길 때 네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내 마음속에 생긴 분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억누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분노가 생길 때 더욱 일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TV나 소설책 등에 탐닉함으로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분노가 내부에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면서 분노를 참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분노를 안으로 삭이다 보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게 됩니다. 그 결과 가벼운 두통에서부터 위궤양, 불면증,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셋째로, 파괴적인 방법이든, 그렇지 않은 방법이든지 간에 분노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분노와 상관없는, 죄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직장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받았을 때 괜히 그 분노를 직장에서 폭발시키면 해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저녁 때 집에 돌아와 아내나 자식들에게 분풀이를 하게 됩니다. 아니면 돌부리를 걷어 찰 수도 있습니다.
넷째로, 분노의 느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결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네 번째 방법으로 분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 성령은 우리에게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화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을 더디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뭐라고 했습니까?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또 잠 14: 29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약 1: 19-20에서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성내기를 더디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져서 절제의 고삐로 분노의 감정을 꽉 묶을 때 더디 성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겸손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분노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으로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했을 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 15: 1에서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대부분 분노가 걷잡을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과격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가 났을 때 더욱 냉정해져야 하고 우리의 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특히 화가 났을 때 만일 내가 이 화를 폭발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화가 났을 때 욕설을 퍼붓거나 기물을 파괴하는 방법 등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의 진노를 결코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혹 일시적으로 위로를 줄지 모르나 더 엄청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심을 믿고 좀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만나도 잘 인내하고 용서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롬 12: 19에서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분노의 감정이 들끓을 때마다 우리는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맺는 말:
여러분, 분노는 결코 죄된 것만은 아닙니다. 불의와 죄에 대하여 분노할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한 분노보다 죄에 찬 분노의 감정을 가지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먼저 우리에게 분노를 가져다 준 원인이 무엇인가 깊이 명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모든 상처를 내놓을 때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거의 다 최악의 경우만을 찾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화가 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되어야만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분노의 감정을 치유 받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모든 분노의 상한 감정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치유 받으십시오! 아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 26).
적보다 더 위험한것 /잠언16장32절
정필도목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천국은 너무나 살기 좋은 행복한 나라일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적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적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도 많습니다. 우리를 해치고 우리를 죽이려는 것 모두가 적입니다. 그런데 적이 우리보다 약해서 항상 우리가 이기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안타깝게도 적이 우리보다 강해서 우리가 적에게 패한다고 하면 우리의 생명은 물론이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면 적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금은보화와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긴 나라는 부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적과 싸워 지게 되면 우리가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되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과의 싸움에서는 항상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적에게 이기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내편만 되어 주신다면 적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47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에게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라고 외칩니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이 칼이나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골리앗의 목을 베고 멋지게 승리했습니다.
역대하 20장 말씀을 보면, 유다왕 여호사밧 시대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쳐들어왔습니다. 수많은 적군 앞에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모든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하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간구합니다. 역대하 20:6을 보면『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또 12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도저히 그들과 상대해서 싸울 힘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부르짖었습니다. 15절을 보면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영이 스가랴의 아들 야하시엘에게 임했습니다. 또 17절을 보면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응답으로 인해 여호사밧에게 큰 믿음이 생겼습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의논을 해서 찬양단을 구성하고 거룩한 예복을 입힙니다. 그리고 맨 앞에 찬양군대를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나아갑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미리 복병을 두어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들을 진멸 시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셔서 한 명도 살지 못하고 모두 죽게 하셨습니다. 이때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시며 어떻게 적들을 패하게 하시는지 구경만 하면 되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여러분!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 죽고 사는 것은 오직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손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서 9:11을 보면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빠른 발을 가진 사람이라고 금메달을 따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 전날 갑자기 배탈이 날수도 있고, 경기하는 날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금메달 딴 사람보다 더 빠른 사람이 세상에 많습니다. 또 힘 있는 자라고 다 이기고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할 군사의 수가 적고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전쟁에서 이기는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24:8과 27:1~3을 보면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항상 내편이 되어 주셔서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생명이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없는 믿음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36을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되 기쁨으로 하십시오. 마음을 다해서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생명이고 축복입니다.
신명기 28:1~7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적들과 싸워 승리하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고, 성공의 비결이고, 만사형통의 비결이고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28:1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는 저주를 받아서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게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죄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 6:23). 그런데 우리는 왜 불순종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5을 보면『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쌓여서 죄를 짓기 시작하며 시간이 갈수록 죄를 더 범하여 타락하게 되고 나중에는 사망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된 것도 한마디로 욕심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싶은 욕심을 못 이겨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도,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자기 속에 있는 욕심과 계속 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뱀의 꼬임을 받은 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게 되자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국 욕심이 하와를 죄짓게 만든 것입니다.
사울왕이 왜 범죄하여 저주를 받아 망했습니까? 욕심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말렉과 거기에 있는 모든 짐승과 가축까지 다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살찐 소와 살찐 양떼를 보니 너무나 탐스러웠습니다. 욕심이 생겼습니다. 사울은 그 짐승들을 죽이지 않고 데려 왔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나이다.”라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것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도 왜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으며, 왜 불행한 종말을 보게 되었습니까? 역시 욕심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여자 욕심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열왕기상 11장을 보면,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모압과 암몬과 에돈과 시돈과 햇여인 같은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방사람들과 통혼하지 말라고 하시며, 통혼하면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그녀들을 사랑했습니다. 3절을 보면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이방신으로 돌아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만 섬겨야 할 솔로몬의 마음이 돌아서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책망하셨는데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하 중에 한 사람이 열 지파를 데리고 북쪽 이스라엘을 세웠고, 솔로몬은 그 아들 대에 가서 유다지파 하나만 간신히 붙잡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외부의 어떤 적들보다 더 위험한 적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쳐서 복종시키느냐, 욕심의 노예가 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생사가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마음속에 있는 적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잠언 4:23을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승리하고 성공하고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받는 비결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쳐서 복종시키고, 오직 말씀대로만 사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을 잘 다스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을 빼앗는 자는 굉장한 힘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큰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로마제국은 법과 질서가 존중되는 사회였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해도 로마는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대한 국가였던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강한 나라가 형편없이 망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에드워드 기번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음란한 나라가 되어서 이혼이 급증하게 되었고 가정이 파괴되었다.
2. 정신을 혼미케 하는 술과 향락 상품의 소비가 극심했다.
3. 쾌락주의에 빠져 있었고, 잔악한 스포츠에 열광했다.
4. 적의 위험이 커져 갔고, 이를 대처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했지만 타락한 장병들로 군사력이 극도로 약해졌다.
5. 온갖 종교가 만연했고, 특히 음란한 종교가 성행했다.
이 시대를 보면, 로마제국이 멸망할 때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병들게 되면 나라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것은 지도자를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이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죄악에 관영하게 되었고, 결국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요? 죄악의 본성은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죄악의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죄악의 본성이 머리를 들고 밖으로 나옵니다. 다윗은 거룩하고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지붕을 거닐다가 젊은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음란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다윗은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 여자가 우리아 장군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서도 취하고, 급기야 권력의 힘으로 그 남편을 죽이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늘 죄악의 본성이 있어서 얼마나 넘어지기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항상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깨어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항상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믿음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참으로 큰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틴 루터를 계속해서 위협하고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겠습니까? 하루는 그를 사랑하는 친구 멜랑크톤이 그에게 “어려운 문제가 없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자 마틴 루터는 “언제 우리에게서 문제가 없을 때가 있었느냐?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늘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무장만 하고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랍과의 6일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승리한 비결을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둘째는 국론이 통일되었으며, 셋째는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에는 아주 비장한 신무기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최신병기의 실체를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6일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 군대의 가장 강한 비장한 무기는 다름아닌 그들의 신앙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늘 원수마귀와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원수마귀는 우리의 욕심을 자극시켜 범죄하도록 만들고, 타락하도록 만들며, 마귀의 종이 되도록 만들어 결국 우리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이 원수 마귀와 싸워 이기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내 욕심을 쳐서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십시오.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