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8-19
내 생각에는 - 인본주의 신앙의 전형 / 손상률 목사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존귀한 신분이었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소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분부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엘리사 앞에서 신앙고백도 하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철저하게 자기중심의 인본주의적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 아닐 때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도 현대판 나아만 같은 인본주의적인 신앙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1. 자기 중심의 신앙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얽매이는 사람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인본주의 신앙은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의 기준에 따르는 신앙을 지향합니다.
1)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인류와 역사를 주장하시는 유일한 주권자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그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입니다(고전 10:31).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명줄을 걸고 살아갑니다(롬 12:2).
나아만의 경우, 소녀의 말에 따라 사마리아에 갔지만 그 목적은 불치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찾아서 이스라엘 땅으로 나아갈 때 예배적 목적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지만(행 8:27), 나아만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헌신이 아닌 자기의 목적 때문에 행동하였습니다.
2) 자기의 방법을 고수하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가면서 자기 나라의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서찰을 받아 갔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막강한 힘이 있는 것을 과시하려는 태도입니다. 아람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왕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고 하며 벌벌 떨었습니다(7절). 나아만이 전갈을 받고 엘리사에게로 갈 때도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그가 엘리사의 집 앞에 갔을 때는 선지자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사자를 내보낸 데 대하여 몹시 분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선지자가 직접 나와서 나병의 부위에 손으로 어루만지며 기도해 주기를 바랐습니다(11절). 이와 같은 나아만의 태도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방법대로 해 주기를 바라는 인본주의적 행태입니다.
3) 자기의 판단대로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선지자가 보낸 사자로부터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 생각과 상충되는 부분을 지적하며 수락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12절에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분하여 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의 신앙을 여실히 드러낸 행동입니다. 그의 판단대로 자기 나라에 있는 다메섹 강이나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 흐르는 물은 요단강 물에 비하여 훨씬 더 맑고 깨끗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비는 물의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2. 불완전한 신앙고백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나온 나아만은 어린아이 살결같이 회복된 것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안다고 하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고백과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이적을 보고 감동한 신앙입니다.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는 선지자의 말에 거부감을 나타내었던 나아만이 종들의 권유에 따라 마지못해 순종했으나 완전히 회복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는 태도를 바꾸어 엘리사 앞에 나아가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적을 보고 믿는 것도 믿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대부분 일시적인 감동에 그치고 맙니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거듭남의 체험을 가져야만 온전한 믿음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본 다음 몇 번이나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고 고백했지만 결국 옛사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단 2:47, 4:17).
2)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17절에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이스라엘에서 가져간 흙을 펴 놓고 그 위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을 피력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을 의심하는 행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시 139:7-10). 오늘날도 이스라엘 땅의 흙을 고집하는 나아만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미신적인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요 4:23-24).
3) 우상에게 제사행위를 계속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께만 경배하겠다고 다짐한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엉뚱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18절에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림몬은 아람나라 왕이 섬기는 우상의 이름입니다(왕상 15:18). 하나님의 백성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됩니다. 나아만은 지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공식적으로 행하면서 그것을 인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외면한 것
은혜 받은 사람은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하여야만 됩니다. 나아만의 신앙은 그 자체가 자기 위주의 고백이었지만 그것도 현장에서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곧 자기 편리한 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1) 예배자의 기본을 망각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와서 가지고 온 예물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며 거절하였습니다(16절). 은혜를 받은 사람이 거기 감사하여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렇지만 나아만의 예물 드리는 태도는 예배자의 자세와 다릅니다. 그가 이스라엘로 올 때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왔으나 엘리사의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그냥 되돌아가려 했습니다. 결국 몸이 회복된 다음에야 예물을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 예물을 거절했습니다. 엘리사의 경우, 처음부터 주의 종을 공궤한 수넴 여인의 헌신은 기쁘게 받았지만(왕하 4:8-13) 조건부로 드리는 나아만의 예물은 받지 않았습니다.
2) 자기의 희생을 기피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고후 6:15-16).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말한 나아만은 자기나라 임금을 모시고 림몬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용납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체험한 이적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인했다면 이후부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자기 입으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고백한 이상 하나님이 아닌 우상은 거짓 신이라고 증거하면서 이를 배격해야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보필하여 정기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자행한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오는 희생을 기피하는 비겁한 태도입니다.
3) 십자가의 신비를 모르는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18).
그는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22-24).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처럼 이적만 보고 믿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헬라인처럼 지식에 근거한 인본주의 믿음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는 복음적인 신앙이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의 부활에 동참하여 다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