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아니면 어때! 영화 보던 인천의 다목적 공간들
발간일 2021.06.07 (월) 15:29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㉒
인천YMCA와 용사회관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
인천YMCA
인천일보 대표를 지낸 오광철 선생을 통해 인천YMCA에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걸 처음 듣게 되었다.
▲오광철 전 인천일보 대표
"신흥동 처녀목욕탕 바로 옆 인천YMCA회관에서 16미리 영화를 상영했었다. 본관이 있고 뒤쪽에 영화를 상영하는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인천YMCA가 설립된 것은 1948년이었다. 인천YMCA는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 구호에 힘썼다.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우선 신흥동 YMCA 사무실을 찾아 등록업무를 통해 가족이나 지인들을 상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과 연결된 허름한 벽돌 창고는 영사실로 활용되어 16mm 영화가 돌아갔고 한 편에서는 우유죽을 배급했다. 대형 깡통과 주전자를 든 어른과 아이들이 줄서서 차례를 기다렸었다.”
2004년 경인일보에는 인천YMCA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인천YMCA는 해방 직후인 1948년 10월 20일 제일장로교회 설립자인 이기혁 목사와 장로들이 주축이 된 '인천기독교청년회'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미군정청 고문관이던 피치(Pitch. Dr.) 박사가 일본 적산가옥 부지(중구 신흥동 42)를 제공하면서 인천에도 영어강습과 영화상영 등이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기 위해 인천YMCA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1948.10.20 인천기독교청년회 설립(중구 신흥동 42번지) 현 중구 서해대로 449번길 12’라고 연혁은 나와 있는데 더는 자료를 찾기가 힘들어 인천YMCA에 직접 전화를 했다.
그러나 초기 인천YMCA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해방 직후 전쟁을 겪었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안타까운 점이 아닐 수 없다.
한번은 옛 극장 사진을 찾기 위해 중구청에 연락했더니 역시나 없다는 답을 들었다. 중구는 인천의 원도심으로 애관극장, 동방극장, 키네마극장, 인영극장, 인형극장, 시민관 등등 수많은 극장들이 있었다. 그런데 옛 사진 한 장조차 보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료를 찾다보면 인천에는 체계적인 아카이브가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많다. 인천시가 자랑하는 ‘최초의 도시, 최고의 도시 인천’은 가장 기초가 되는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없이는 허황된 구호에 그치기가 쉽다.
▲오광철 선생이 옛 인천YMCA 자리를 직접 안내해 주었다.
▲옛 인천YMCA 자리. 현재 인천YMCA에는 구월동에 있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됐던 용사회관
1950년 한국전쟁 후 설립된 용사회관은 말 그대로 상이용사를 위한 장소였다. 다목적 공간이었는데 주로 영화를 많이 상영했고 그 수익금으로 상이용사들을 도왔다. 상이군경용사회에서 직접 운영했으며 용사회관은 인천 외에 다른 도시에도 설립되었다.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김윤식 시인은 “도원동 어묵공장 골목 쪽 샛길에 용사회관이 있었는데 무척 허름한 극장이었다. 외곽 전면만 극장 모습이었지 천막 지붕에 관람용 의자가 부족해서 맨땅에 가마니나 푸대를 깔고 앉아서 보던 극장이었다. 인어공주가 나오는 무성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높다란 영사실 창문 옆에 앉아 떠들던 변사가 생각난다.”라고 용사회관을 기억했다.
▲이원규 소설가
이원규 소설가는 “형과 함께 도원동에 있었던 용사회관에도 갔었는데 붉은색 페인트로 쓴 세로 간판을 단 목조건물이었고 입장료가 장안극장의 1/3 값이었다.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영화를 가마니를 깔고 앉아 봤는데 걸핏하면 필름이 끊어져 영화가 중단되곤 했다”고 회고했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는 용사회관에 대한 연구조사에서 “용사회관은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16mm 필름을 상영했는데, 이들 영화는 국내 개봉 이전 또는 개봉조차 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하루 2~3회 불규칙적으로 상영했지만 저렴한 입장료 때문에 학생 출입이 잦았고 영화는 한글 자막과 사운드를 지원하지 않았다. 당연히 영사실 옆에 자리한 변사의 연행을 수반하였다. 용사회관은 건물 외곽에 극장 표식만 했을 뿐, 의자도 없어 계단식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아 놓은 천막 형태의 가건물에 가까웠다. 용사회관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인기를 누렸는데 이들 극장이 상영한 서부극 장르의 특성 즉, 명확한 선악 구도와 감각적인 화면 구성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윤인섭
도원동에서 40년 넘게 살고 계신 분을 만나 용사회관에 대한 뒷얘기를 들었다.
“전쟁 후 생겼다가 한 10년 정도 하고 없어졌다. 한국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흑백영화였다. 너무 오래전이라 영화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용사회관은 작았고 지붕이 둥그렇다. 볼품없는 극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더니 그 건물 그대로 방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월세를 놓았다. 나중에 불이 나서 건물이 없어졌다."
용사회관 폐관은 1960년대 초로 추정된다.
▲오광철 선생이 용사회관의 위치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담장이 있는 공터로 남아있는데 건축자재들이 쌓여있다.
▲옛 용사회관 자리
글·사진 윤기형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