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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5.18 진실. 광주청문회의 김대중과 심재철
군복무를 마치고 83년에 복학 했을 때 학교는 여전히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하는 애들로 넘쳐났다. 가두진출을 시도하며 돌을 던지고 곧 최루탄이 터지고 도망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우리들 중에는 12.12 당시 수경사에서 상황을 보던 애도 있었고,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다가 부대를 따라 12.12 다음날 새벽에 서울로 출동한 애도 있었고, 5.18때 광주상무대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서다가 폭도들이 짚차에 실어 보낸 목없는 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아 오줌을 싸고 밤새 공포에 떨었던 애도 있었다. 대부분 우리들은 군대얘기와 정치얘기를 하다가도 취업과 불안한 미래때문에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1년 먼저 복학했던 A는 호남이 고향이어서인지 광주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구호를 따라 몇번인가 시위대 애들 틈으로 사라졌다. 어느날 시위대 틈에 몇일 어울렸다 돌아온 A가 이상한 말을 하였다.
자기는 그동안 군에 있어서 전혀 몰랐었는데, 알고보니 10.26이후 군대가 실권을 잡고 최규하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내세웠으며, 전두환이 곧 12.12쿠테타를 일으켜서 실권을 잡았고 중정부장서리가 되자 그동안 참아오던 학생들이 일제히 전두환 물러가라고 데모를 했으며, 5월 평화스러운 서울역 집회에 신군부가 음모를 꾸며 버스를 돌진시켜 사람을 상하게하고 그 시위혼란을 이유로 5.17비상계엄확대를 일으킨 후, 자신들의 쿠테타에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후, 국보위를 만들어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최규하를 축출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나열되어있는 것은 맞는데, 전후 사건간의 인과관계는 80년 여름까지 늦게 학교에 남아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았던 나의 인식과는 사뭇 달랐다. 12.12이후에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다? 외신에서 쿠테타 의혹을 거론한 적은 있었지만, 그 이튿날 병력은 다 철수했고, 대통령과 내각은 그대로 였으며, 바로 다음날 새 대통령이 새내각을 발표했는데 무슨 쿠테타를 했다는건가? 그럼 전두환이 12.12쿠테타를 하자마자 단 하루만에 내각진용을 만든 것인가? 당시 정부의 개헌주도와 방향을 두고 정부와 야당 사이에 대립갈등이 점차 커져갔는데 그건 모두 전두환이 시킨 것인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처음에 어색한 모습이었던 최규하는 대통령취임이후 민주화 개혁을 일관성있게 추진했고 개헌은 정부의 책임이라며 정부내 개헌연구조직을 만들고 국회와 별도로 개헌안을 추진하겠다고 했고 대통령중심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절충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점차 제법 당당하게 바뀌었으며, 신현확총리가 실무적으로 그 책임자가 되어 국회와 갈등을 조율하고 고비고비 마다 개헌일정과 방향에 대한 정부입장을 조정해나갔음을 알리던 신문기사가 넘쳐났는데 최규하,신현확이 모두 전두환의 허수아비였단 말인가.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당시 학생들이 12.12직후 부터 전두환이 실권자였음을 알고 경계하고 있다가 4.14일 전두환이 중정부장서리가 되자 정권장악이 노골화 되었음을 깨닫고 거세게 저항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억을 되돌아 보면 4.13일 부터 5월 1일 이전까지는 교련반대와 학내문제에 국한한 구호가 나왔지 정치투쟁의 소리는 없었으며 5월초~5.15일에 유신잔당을 처단하자는 주장과 함께 <계엄철폐,이원집정제포기,정부주도개헌중단> 구호를 외쳤지만 전두환을 특정한 투쟁구호는 없었다. 있었다면 그건 항상 <신현확,전두환 퇴진하라>고 공격목표를 復數로 지칭한 구호였다.
그에게 설명해줬다.
"전두환이 12.12쿠테타를 일으켰고 4.14일 중정부장서리임명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저항했고 이를 다시 전두환이 5.17계엄확대로 폭력진압했다고? 그게 아냐. 12.12로 전두환 쿠테타 의혹은 있었지만 그냥 의혹만으로 끝났고 전두환이 부장서리가 됐어도 그에 대한 반응은 별로 없었으며 최규하,신현확과 군부(전두환) 신당설이 나오면서 학생들이 데모하기 시작한거야. 먼저 도발한 것은 군부가 아니라 학생쪽이 분명하다고"
야. 너 잘못알고 있는거야. 헛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가볍게 일축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걔들은 그걸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얘기해 줘도 내말이 틀렸다며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고 하니 환장하지...그러거나 말거나...
다음해에 취직하고 또 결혼하고 수원에 있는 회사근처로 이사를 왔고 호랑이 같은 직장상사를 만나 매일 잔업을 해야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시절이 시절이니 만큼 정치이슈에 관심을 끊을 수는 없었다.
87년초 우리 부서에 후배직원이 하나 들어왔는데 지방 명문대학 사회학전공 출신이었다. 87년 6.29선언이 있었고 가을에 대통령선거가 있어 가끔 자판기앞에서 정치이슈 잡담을 나눴는데, 이 친구가 또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전두환이 12.12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학생들은 이에 저항하다 5.17비상계엄으로 2차쿠테타를 당했고 신군부는 광주사태가 나자 일부러 과잉폭력유혈진압했고 지휘권을 이원화시켜 시민들을 학살하고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군인대통령으로 등극했다며 광주학살 원흉인 전두환을 처단해야 한다고...김대중 슨상님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생명이며...대통령이 꼭 되어야한다고. 염병.
"광주학살인지 여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대명천지에 과연 군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부러 시민들을 학살했는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전두환이 12.12로 정권장악한 것을 알았고 4.14일 정보부장서리 취임으로 그것을 확인했다면 왜 보름이상이나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고 있다가 5월에야 정치데모를 시작했냐? 그리고 왜 구호가 전두환이 아니라 그냥 유신잔당이나 신현확,전두환이냐고?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이는 그럼 그 당시에 뭐한거냐?
이 친구는 나의 반박에 멈칫하더니만 얼마후 해명을했다. 그때 중정부장서리 취임후 곧바로 항의를 못한것은 역량이 부족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데모 지휘부들은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아직 의식이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면시위투쟁에 나서기 까지 시간이 필요했다고. 김대중이도 사실은 그 때 알고있었을거라고... 환장하지.
그런데 드디어 논쟁을 끝낼 좋은 기회가 왔다. 88년 11월 18일~20일에 김대중 증인에 대한 청문을 필두로 국회광주민주화운동청문회가 시작되어 TV로 중계되었다. '그래 내일 김대중씨가 증인으로 나와 진술을 하니 과연 그가 12.12쿠테타와 전두환의 중정서리취임으로 전두환쿠테타를 알고 있었는지 보자'고 제의했다.
첫 질문자로 민정당의 沈明輔위원이 질의했다.
沈明輔위원 : 증인은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 80년4월7일 무엇때문에 신민당 입당을 포기 결별을 선언하고 정치의 제도권밖에서 소위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재야인사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당시 과도내각 퇴진 계엄해제등 정치일정 단축을 주장했읍니까?
증인 金大中 : 그렇습니다. 거기에요. 신민당이 그 당시 제가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대단히 위태롭다고 이야기하고 신민당은 이대로 잘 된다고 그러고 저는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 겸임한 것은 중대한 사태의 악화라고 했는데 신민당측에서는 이것을 민주화에 지장이 없다고 그래서 제가 시국관의차이 때문에 신민당 입당을 단념한다고 발표하고 민주화가 확정되면 그 때 신민당입당을 고려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 그러셨군요. 아무렴. 심명보는 자기 질문에 바빠 김대중의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신기하, 김광일에 이어 나온 네번째 질의자 김문원이 김대중의 거짓말을 폭로한다)
金文元위원 : ...몇가지 좀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있어서 증인께서 좀 친절히 이 말씀을 좀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아까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신민당 결별을 왜 했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증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당시에 시국관이 달랐다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이 된 사실을 가지고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보았는데 신민당측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과히 그렇게 큰 반응을 안 보이고 그대로 민주화개혁을 추진해 나가자는 그러한 의사상충이 있어서 신민당과 결별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잘못 착각을 하고 계시는가 해서 제가 한 말씀 여쭈어 보겠읍니다마는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것이 제가 알기로는 4월14일입니다. 그런데 金大中고문께서는 그 당시에 4월7일 결별선언을 하셨어요. 혹시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 당시 시대상황을 보시는데 이것이 기억이 좀 잘못되시지 않았나 생각을 하는데...
증인 金大中 : 에..그 당시 신민당과 저 사이에는 서로 직접 또는 여러가지로 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시국이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했고 신민당측에서는 민주화가 제대로 되는 것인데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그러한 생각이 나중에 全斗煥씨가 정보부장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반응의 차이가 언론에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시국관이 신민당이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대로 민주주의가 된다고 보았고 저는 민주주의가 대단히 위태롭다고 보아서 그래서 민주화가 확정된 후로 신민당 입당문제는 다시 협의하겠다 이렇게 제가 얘기했습니다. 날짜가 다를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는 그렇게 버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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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소리인가? 김대중이 전두환의 중정부장취임의 의미를 알고 경계를 했다면, 위기의식을 느겼을 것이고 종전에 신민당과 결별한 것도 취소하고 즉시 다시 뭉쳐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시국이었다고 느꼈다면 군부에 빌미를 주지 말고, 군부에 직접적으로 경고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론은 바로 김대중은 전두환의 정체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다음날 또 커피자판기에 모인 김에 그 후배직원에게 어제 청문회방송을 본 소감을 묻고, 내 생각에 김대중이 당시 전두환 쿠테타를 제대로 파악한 것 같지가 않다고 조목조목 설명을 해줬다. 그러나 그는 마이동풍. 여전히 12.12가 쿠테타였고 학생들이 이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환장.
그로부터 10여일 뒤. 그 다음 청문회 차수인 11월30일~12월1일의 증인중에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심재철이 나왔고 밤을 새워가며 국회청문회 녹화방송을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At Last!
증인 심재철이 김문원의 질문에 자신은 4.14일 전두환 정보부장서리 등장의 의미를 당시에 잘 몰랐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확인하였다.
다음날 아침 커피자판기앞에서 나는 다시 그 후배직원에게 물었다. 지난밤 청문회 방송을 보았느냐고. 보았단다. 그럼 심재철이 당신의 주장과 다르게 당시 전두환에 대해 잘 몰랐다는 고백을 보았겠네.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똑같이 청문회를 시청했는데 그런 걸 본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신문보도를 확인해 보자. 조선,동아,중앙,한겨레... 조선,동아,한겨레에는 그 부분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에는 분명히 실려 있었다. 여기에 한겨레, 동아. 경향신문의 당시 기사들를 비교해 본다. (중앙일보에서는 기사를 못찾았음)
<한겨레 1988.12.01>
金文元 의원 :5.15 서울역 시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심재철 = 서울역 시위가 의식적이고 계획적 집회가 아니어서 큰 역할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헛소리)
<동아일보 1988.12.01>
金文元 의원 : 4월20일 부터 데모의 구호가 학내문제에서 학외의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4월14일 전두환씨의 중앙정보부장 임명에 자극받은 것이 아니었나.(왜곡보도)
심재철= 대단한 자극이었다.
<경향신문 1988.12.01>
金文元 의원 : 80년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서리직을 겸임하면서 데모가 격화됐었나.
심재철= 그때는 중정부장서리임명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것이 각료회의에 참석해 각료들 을 휘어잡으려는 의도였는지는 나중에 알았다.
짜잔.
내가 제시한 중앙,경향신문 기사를 보고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자기가 매주 사회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스터디클럽이 있는데 거기가서 알아보고 오겠다면서 꼬리를 내렸다.
80년5월 전국의 학생데모를 총 지휘했던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이 당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서리가 되었어도 그 의미를 몰랐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12.12 전두환의 쿠테타, 정권장악, 최규하 수아비론을 믿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당시 학생들의 자신들의 시위가 군부득세라는 위험성을 가져올 지도 모르겠다는 피상적 인식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심재철 등 재학생들은 몰랐어도 그 위에 이신범등 복학생들은 알고있었다고 주장할텐가. 그럼 왜 자기들 끼리만 알고 심재철에게는 얘기해 주지 않았는가?
이제 제발 헛소리들 그만해 달라. 전두환 수양대군론은 그 당시 학생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두환이 이미 집권한 후에 사후에 전개된 상황과 외신들을 종합해서 만든 상상속의 임신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이지만...
심재철의 당시 증언을 국회회의록사이트에서 발췌해 여기에 올린다.
1988.11.30. 광주청문회 p88~89
金文元위원 : 증언은 역사와 국민앞에서 솔직히 밝혀야 하는 그러한 소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질의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정직하고 당당하고 용기있는 답변을 기대하면서 몇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본위원은 80년4월14일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법을 어기면서 까지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학생데모가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전두환씨가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되었을 때 전후해서 그 전의 학생데모의 상황과 그 후의 상황을 혹시 느끼는 점이 있으셨으면 좀 풀이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요. 그전의 상황은 어땠고 그 후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증인 심재철 : 구체적인 시점으로 4월14일 전후를 말씀하십니까?
金文元 위원 : 그렇읍니다.
증인 심재철 : 학생들의 시위형태가 4월14일을 기점으로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4월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전두환이가 취임한 것을, 정치적인 의미를 학생들은 정확하게 읽지를 못했습니다.
金文元 위원 : 부여하지 않았습니까?
증인 심재철 : 이제 생각해 보니까 중정부장서리로 취임했던 것이 국무회의에 직접 들어가서 대통령 등 행정부문을 직접 통제하기 위한 단계였다는 것입니다.
金文元 위원 : 그렇게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4월20일부터 데모구호가 학내문제에서 학외문제로 바뀌기 시작했읍니다. 전두환씨 물러가라든지 이런 아주 극렬한 구호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그 당시의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됨으로 해서 그 때 상황애기가 흘러나옴으로 해서 학생을 더욱 자극한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데 자극이 안되었다고 보십니까?
증인 심재철 : 대단한 자극이었습니다.(중략)
金文元위원 :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전국 59개 대학학생 대표가 모여가지고.. 그 당시에 데모를 자제하자는 그런 결의도 있었지요? 일부 학생들 중에...이것은 그 당시에 군부가 학생데모를 이용해 가지고 군부쿠테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찬탈하려는 그런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학생들 스스로 자제하는 그러한 이성을 발휘한 일면이라고 보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당시에 증인께서는 그러한 정보에 대해 감을 잡으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정보를 직접들으셨습니까?
증인 심재철 : 학생들이 자제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도처에서 나타납니다. 5월9일, 5월11일 서울시내 학생회장단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한다. 교내시위를 원칙으로 한다는 입장을 거듭 표명하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행하게도 5월13일 깨지고 맙니다.
그래서 5월13일 밤 高大에서 모인 회의 부터는 이제 우리가 나가지 않더라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부세력이 나온다. 우리가 학생들을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다 라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5월12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12일은 서울시내에 병력배치가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5월12일 외부로부터 쿠테타의 징조가 보인다. 피신하라 라는 얘기들이 저희 학생회 사무실로 상당히 많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7시30분 cbs뉴스로 기억합니다만 그 뉴스를 듣다가 갑자기 끊어지면서 ‘아! 뭐야’하는 소리가 나더니 음악이 나가버렸습니다. 그 상황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그 상황을 보고 아! 이것은 쿠테타다 라고 저희들은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병력의 배치였다라고 얘기가 됩니다마는 당시 구체적인 정보라고 하면 그런 정도의 정보를 저희들이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金文元위원 : 예. 그 당시 5.17조치 이후에(?) 학생들은 상당히 자제한 것만은 사실이지요? 자제하고 군이 나올까봐 스스로들 견제를 하면서...
증인 심재철 : 5.17 이전에 계속해서 6개월동안 자제를 해왔습니다.
金文元위원 : 예. 5.12일, 5월16일 학생들이 상당히 스스로 자제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과격해지면 정치군인들이 쿠테타를 기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서 데모를 상당히 자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치군인들은 학생들의 이같은 데모양상을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정권찬탈의 기회로 이용했다 할 수 있어요. 지능적으로 학생들을 이용해서 조장시키고 쿠테타의 구실을 잡은 것입니다.
증인 심재철 : 당시 서울대학생운동의 최선봉에 선 사람으로서 서울역집회에서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그이후 도피과정에서도 내목숨 하나 구하는데 급급했었다.
또 수사에서도 고문에 굴복했으며 법정에서도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로 인정하는 등 계속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학생운동의 최선봉장에 섰던 인간이 그렇게 비겁하게, 부끄럽게 파멸되어 저로서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체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엄청난 마이너스였고 과오였습니다. 전두환 일당은 목숨을 내걸고 정권을 뺐으려고 하는데 나는 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점이 지금도 그렇게 부끄럽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심재철은 당시 서울역집회가 전두환쿠테타의 빌미를 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고 했습니다. 전두환쿠테타를 저지시키려던 영웅적인 투쟁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들은 그 당시 상황을 전두환 쿠테타라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고백입니다.
갈천.
[출처] 12.12,5.18 진실에 대해 생각함. 광주청문회의 김대중과 심재철|작성자 갈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