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6막50장 (1부)
2007년.
50세.
드디어 내가 지천명의 나이에 안착했다.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우친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도달하니 무엇이 인생인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작년에는 장모님을 보내드리고 허망한 세월만 소비하고 있을즈음 "정"이가 충남혜진대 "치기공과"에 합격하였다.
"정"이는 오빠가 치대 다니는것에 걸맞게 전공을 치기공과를 선택하여 주위의 부러움도 한껏 받았다.
"정"이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질 않고 서울 집에서 1년간을 장장 왕복 200km가 넘는 거리를 사당역에서 통학버스를 타고 ,어떨때는 기차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 하였으니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어떨때는 버스를 놓쳐 기차를 타고 오가야 하였고, 심지어는 내가 자동차로 등교 시킨적도 있었다.
"정"이는 무척 쾌활하였다.
"후"는 말이 별로 없는 과묵한 성격이나, "정"이는
도란도란 이야기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주위를 밝게 해주었다.
"후"는 가끔 술이 과하여 멀리 있는 부모님을 놀래키며 애간장을 태웠고 , 어떨때는 술에 취해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치기도 하였다.
부모없이 객지 생활 하다 보니 외롭고 쓸쓸하여 동기생들과 세상 푸념하다 술이 과하다고 생각되여 측은해 보였다.
의사들은 군대처럼 선후배 간에 엄격한 복종과 우상으로 유지되며 술문화 또한 고약스러웠다.
그래서인지 고교시절 술을 전혀 모르던 "후"는 부모가 없는 자유분망한 분위기에서 무절재한 음주와 술주정을 마음껏 펼쳤으니 처음에는 성인이 되여가는 과정으로 생각하였으나 나중에는 너무하다 생각도 하였다.
다행히 지금은 가정을 꾸려 술주정은 없어지고 음주문화와 예법에 다소 안정적이라니 다행이였다.
사실 사춘기의 자식들을 멀고도 먼 타지에 두는 것은 왠지 허전하고 불안하였다.
되도록이면 한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저녁을 먹으며 TV도 같이 시청하는 화목한 가정을 이뤄야 하건만 "후"는 고교졸업후 대학6년 보건의 2년 마친후 온가족이 화목히 모여 저녁한끼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보건소 근무가 만료되여 서울로 오자마자 곧바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니
아내와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후"는 고3학년 이후로는 잃어버린 자식이되여 버렸다
다행히 "정"이가 서울에서 홍성까지 등하교하며 적적한 가정에 활력소를 불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