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은 5세 신동으로 그 이름을 날렸고 세종대왕도 인정하고 총애한 두말할 필요가 없는 천재다. 어쩌면 머리로는 조선 500년 통털어서 최고의 천재 였을지도 모른다
대게... 천재들은 강하지 못한 성품을 타고남이 일반적이나
그의 성품은 그 어느 누구보다 강직하여 약관 21세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단종에 충성을 다하고자 학문과 입신영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버린다
그후 능지처참된 사육신의 시체를 홀로 노량진 강변에 묻어주는 대담함도 사육신의 난을 고변한 김질의 장인이자 당시 세도가인 정창손에게 백주에 광화문 거리에서
“야 이놈아 그만 해 처먹어라!!” 하고 대놓고 삿대질 할정도 였다.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에그의 한평생을 미화 시킨 오언절구를 변형시켜 세간의 웃음 거리로 만들어 버린 배짱도 그의 강직함과 더불어 초야에 묻어 버렸으니 아깝기 그지없다.
한명회가 말년에 한강변에 정자 압구정(현 압구정동 구정고등학교 자리)을 지어 5언 절구로 시를 읇으니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한명회>
김시습이 이곳을 지니다가 扶를 亡, 臥를 汚로 고쳐 이렇게 답하였다.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청춘에는 사직을 망하게 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김시습>
한명회는 흔히 칠삭둥이로 불리며 모략과 권모술수로 그의 천재성이 폄하 되어 왔으나 그의 말데로 천하를 그의 손바닥에 집어넣고 있었던 그 또한 천재중의 천재다.
수양대군의 장자방(유방의 책사 장량)으로 불리우며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수많은 정적을 제거하고 결국은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함에 권모술수의 대가,
책략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세조 정권의 최대 대주주로서 또한 실질적인 집권자로서 세조집권 시절의 권력의 안정과 이후 성종대의 태평시대를 일군 모사꾼이 아닌 탁월한 재상의 면모 또한 보여주고 있다
김시습은 5세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 세종대왕을 감탄시키고 총애를 받았을뿐 아니라
이미 그의 이름 석자 만으로서도 탄탄대로가 보장 되어 있었으나 과거 조차 보지않고 초야에 묻힌 반면...
한명회는 그의 벼슬이 고작 경덕궁 문지기 그나마 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음직蔭職..즉 조상의 공로로서....
하지만 고작 경덕궁 문지기 였었던 한명회는 세조와 손을 잡고 그의 천재적인 머리를 빌려줌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을 지내고
두 왕의 장인이 된 반면, 이미 5세 때부터 탄탄대로의 출세를 보장 받았던 김시습은 평생을 방랑자 로서 그 생을 마쳐야 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걸출한 두 천재의 삶이 이렇게도 철저히 뒤바뀌고 이처럼이나 극명히 대조 될수 있으랴?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일정 부분 그 쓰임새를 부여 하는가 보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명이고 팔자인줄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