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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한응 목사의 설교나눔 원문보기 글쓴이: 아모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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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삽교교회 원로목사 박 한 응(朴 漢 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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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21. 주일낮예배 설교문
본 문 : 마태복음 8:23-34(막4:35-5:20, 눅8:22-39)
제 목 : 예수님은 왜 밤중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나?
찬 양 : 371, 373, 388, 400, 429, 432, 543.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우리 주님의 사랑이 이 시간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하여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요즘이 1년 중 가장 더운 계절입니다. 지난 주간에 初伏이 지났고 내일 모레가 금년 들어서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와 中伏입니다. 옛말 그대로 복 허리입니다. 앞으로 연일 더위와 싸워야만 할 것 갔습니다. 게다가 지루한 장맛비로 인하여 중북부 지방에는 많은 피해가 발생을 하였는가 하면 남쪽에는 무더위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상의 양극화 현상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는 것은 이젠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건강에 무방비로 노출이 되어 있는 우리 농부들이야말로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돈 많은 어떤 사람들처럼 보약을 먹을 형편도 안 되고, 또 여름에 모두 다 가는 휴가도 가지 못하고, 남들 다 가는 바닷가 한번 못 가고, 1년 열두 달 365일을 흙과 싸워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건강만이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자기 건강은 자기가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나면 병원을 찾아가서 진찰을 하고 주사를 맞고 처방을 받아서 약을 사 먹습니다. 또 무슨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예방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나는 지난 해 11월 달에 보건소에 가서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1회용 주사기에 1~2cc정도의 약을 팔뚝에다 맞았습니다. 그때 이 작은 량의 약이 과연 예방 효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사를 맞으면 50,60kg의 우리 몸에 2cc정도의 주사약이 우리의 혈관을 타고 온 몸에 퍼지게 됩니다. 또 약을 먹을 때 우리가 먹는 음식량에 비하면 아주 작은 양의 약이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먹은 약이 위 속에서 분해가 되어서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가 아픈 부분들을 치료도 하고 완화를 시켜주기도 하여 아픈 몸을 낫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몸속에 투여되는 약이나 주사약은 우리 몸에 비하여 몇 십만 분의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량의 량이지만 그 약물이 우리 몸을 치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1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마치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 것과 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1일은 24시간이고 1주일은 168시간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은 주일 낮예배와 저녁예배 수요 기도회까지 나오면 3시간이고 속회와 새벽기도까지 모두 나오는 사람은 11시간입니다. 11시간이라고 하여도 말씀을 듣는 시간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5시간 정도입니다. 1년이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8,760시간인데 말씀을 듣는 시간이 260시간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활 중에 말씀을 듣는 시간은 약3%가 안 되는 형편입니다. 마치 50,60kg의 몸에 2cc의 작은 량의 주사약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집에서 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근이 들면 그 영혼은 피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작은 시간에 듣는 말씀이 우리들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병든 부분을 치료도 하고 고쳐주시며 예방도 시켜 주고 때로는 영양제가 되어서 우리들의 영과 육을 아름답고 살찌게 해 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죽은 심령도 살리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날마다 순간마다 읽고 듣고 먹어야 삽니다. 말씀의 기근이 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영혼이 병든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이 병들고 신앙생활이 정상적으로 되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어디가 병들었는지 어디가 아픈지 무슨 병이 들었는지 영양실조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 자신의 믿음 상태, 신앙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check)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병든 영혼, 병든 믿음, 병든 신앙, 병든 생각, 모두 고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병드는 것도 모르고 일만하다가 결국 중병에 걸려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기사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광풍을 “잠잠 하라 고요 하라” 고 명하심으로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게 된 놀라운 역사입니다.
먼 바다를 항해를 하는 사람이나 고기를 잡는 어선을 타는 어부들이나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항해 중에 광풍을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광풍은 배를 여지없이 파괴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배가 파괴된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은 바다에 광풍이 불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다는 웃었다가 울고, 잔잔하다가 다시 격동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좋은 날씨만이 고정이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건너야 할 세상이라는 바다도 예외가 아닙니다. 건너가는 기간이야 사람마다 다르게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야 어떻든지 우리의 인생의 항해는 항상 격랑(激浪)속에 흔들리고 노도(怒濤)속에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 Immanuel. 1724-1804)는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다’라고 한 말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산을 올라가는 등산가들은 만년설의 봉우리를 올라갈 때에 눈보라가 불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8,000m이상의 높은 산에는 항상 일기를 예측할 수가 없이 변화무상합니다. 그래서 정상을 정복하는데 가장 어려움이 악천후(惡天候)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가지 사건으로 구분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의 사건과
둘째는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뜻과 섭리가 무엇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기적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시던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보다 그 수면이 207m가 낮으며 주위에는 높은 산이 솟아 있기 때문에 급격한 기압 변동으로 돌풍이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갑자기 일기 시작한 돌풍은 갈릴리 바다를 들끓게 했고 노도 풍랑은 사정없이 주님의 일행이 탄 배를 뒤덮어 그야말로 익사 직전의 위기였습니다.
이 기적의 사건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몇 가지 교훈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세상은 갈릴리 바다와 같아서 작은 파도, 큰 파도가 끝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신 주님은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곤한 잠이 드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향하여 노천에서 침이 마르고 혀가 닳도록 있는 성량을 다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온갖 병자를 고쳐주시느라고 힘들고 고단한 몸을 잠시 쉴 사이도 없이 분주하시다가 배를 타시게 되자 주님도 인성을 가지신 분이신지라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불편한 자리이건만 단잠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배는 점점 언덕을 멀리 떠나 찰싹거리는 고운 파도 물결을 헤치며 전진하고 제자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에 꽃을 피우며 즐거운 뱃노래로 기분을 돋우는데 바람이 사나워 집니다. 파도가 세어져 물결이 일어 태산과 같이 밀려오자 배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뛰노는 물결이 덮이어 배에 물이 가득해지고 크게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나가보면 아무리 바람이 없는 날이라고 해도 물결은 끊임없이 해변가를 몰려오고 또 몰려가고 합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거세지면 물결도 거세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삶에도 크고 작은 파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우리 인간은 자연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만경창파의 바다를 건너는 뱃사람처럼 깨어지기 쉽고 침몰되기 쉬운 작은 목선 같은 육신을 갖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苦海라고 하고 불교계에서는 사바세계(裟婆世界)라고도 합니다. 근심 걱정과 우환질고가 없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인생의 풍파가 잔잔해 질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모두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온 힘을 다 기울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키를 잡아보고 돛을 올려도 보고 내려도 보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세상에 가난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병들고 싶고 무지하고 패가망신을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슥4:6)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세상에 파도 없는 바다가 없고 바람 안부는 지대가 없는 것 같이 근심 걱정, 번민과 고통이 없는 사람이 없고 시험과 환난이 없는 가정과 사회가 없습니다. 지식, 돈, 권세로도 안 됩니다. 총각은 결혼만 하면 행복해지는 것 같으나 결혼해도 행복이 없고 돈 없는 자는 돈만 있으면 잘 될 것 같으나 돈을 벌어도 행복이 없습니다.
(3)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힘과 재주와 재능을 다하였으나 배를 안정시킬 수 없어 아무래도 배가 침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라고 주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태연히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바다를 지으시고 지배하시는 창조주가 풍랑 속에 수장될 이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을 깨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서서 바람과 파도를 책망하시매 그만 바람은 사라지고 그 흉용 하던 파도가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잔잔하며 거울같이 맑은 유리 바다 같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너무 신기하고 놀라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 하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그 동안 주님과 함께 생활을 하여왔지만 주님이 정말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들에게 무슨 믿음이 있겠습니까? 믿음이란 상대방을 절대적인 존재로써 신뢰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고 그 반석 같은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마16;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믿음은 성도들의 자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히11:6)
2. 가다라 지방에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1) 가다라 지방에 오시니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귀신들려 미친 사람을 만났습니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무서운 힘을 가진 자요, 손과 발에 쇠고랑과 사슬로 묶어도 끊어버리는 그 사람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으로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산과 들을 향해 소리 지르며 돌아다니고 돌을 들어 자기 몸을 상했습니다.
이제 그에게서 사람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가 예수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이름이 군대라 했습니다. 그 군대 ‘레기온’은 당시 육천 명의 병사였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육천 명의 군사의 힘을 가진 귀신에 사로잡혀 사탄의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 귀신들린 자는 귀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예수가 싫어졌습니다. 이는 이대로 좋으니 나를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하나님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술 취한 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하는 말이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 고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만 안 계시면 이 세상을 마음대로 자기 세상으로 만들어서 인간을 파멸시키고 죄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서 마지막에는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데 예수님 때문에 자기의 뜻을 이룰 수가 없으니까 예수님을 향해 대항을 하였던 것입니다.
(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처럼 생활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귀신들린 이 사람은 동네에서 쫓겨나서 혼자서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살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 길이 죽음의 길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이와 같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사탄에게 점령당하고 사탄 마귀가 시키는 대로하며 자기의 인생을 보람되게 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인생의 비참함을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아편이나 마약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도 있고, 술 때문에 자기의 몸을 망치고 인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해 무익하다는 담배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박이나 환락에 빠져서 자기의 인생뿐만 아니라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귀신들려 무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강원도의 폐광촌을 살린다고 국제적인 규모의 카지노 도박장을 만들었는데 외국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국내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곳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수십억씩 잃고 가지고 온 자동차도 전당포에 잡히고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거지 노릇을 하면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백 명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사탄은 우리 인간을 할 수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멸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 주변에 갖가지 올무와 덫을 놓고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언제까지 귀신들려 무덤 속에서 사는 인생처럼 살아야 하겠습니까?
(3) 귀신은 나가면서도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나갑니다.
귀신은 어쩔 수 없이 이제 예수님 앞에 항복을 하고 무저갱 지옥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쫓겨나든지 해야 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를 저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2천여 마리의 돼지가 비탈로 내리달아 갈릴리 바다 속에 빠져 몰살을 당했습니다. 귀신은 쫓겨나면서도 남에게 손해를 입혔습니다.
돼지가 2천 마리면 지금의 시세로 최하로 잡아 한 마리 당 10만원씩만 계산해도 2억 원이 됩니다. 이렇게 거액의 손해를 입은 돼지 임자는 예수님께 나와서 빨리 이 지방을 떠나달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같으면 당장 멱살을 잡고 물어내라고 하든지 폭력을 행사했을 것이고 심하면 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을 것이고, 손해 배상 소송을 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왜 그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을까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이 사람에게서도 배울 바가 있습니다. 자기 사촌도 아니요 팔촌도 아닌 청년 때문에 또는 예수님 때문에 2억 원을 손해 본 돼지 임자를 주님은 그냥 손해 보라고 가만 두셨겠습니까?
구약 성경에는 육신의 축복을 약속하고 기록했지만 신약 성경에는 육신의 축복 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보훈에서 출세하고, 아들 딸 많이 낳고, 부자 되고, 돈 많이 벌어서 출세하게 된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돼지 임자야말로 한 청년을 건지기 위하여,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하여, 예수님의 구제 사업을 위하여, 그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손해를 본 사람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교회 선교 사업을 위해 2억을 바쳤다는 소리는 아직 못 들어 봤습니다. 오히려 절간에 시주하는 데는 몇 십억 원씩을 바쳤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예수 믿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돼지 임자만큼 손해를 보았습니까? 구약의 욥에게 갑절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 애매하게 주님 사업을 인해 손해 본 돼지 임자를 그냥 두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몇 배 이상 축복을 받았을 줄 믿습니다. 그래도 의심스러운 사람은 이 담에 주님 앞에 가서 나와 함께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때 내 한말이 잘못되었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왜 풍랑의 위험을 무릎 쓰고 그 밤중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까?
(1) 예수님은 귀신들린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그 밤중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마16:26) 그러므로 한 생명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아무도 그를 어찌할 수 없고 이제는 버려진 사람이기에 그를 구원하시려고 한밤중에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눅15:7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고쳐 달라고 하는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몇 차례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신 뒤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단 한번 사마리아로 가신 적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예수님은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서 그를 구원시킴으로 수가성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거리에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으시고, 또 밤이나 낮을 상관치 않으시고, 사람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영혼을 구원시키는 일에는 어디든지 달려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교회에 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할렐루야!!
(2) 귀신은 예수님이 건너오시는 것을 못 오게 하고 물속에 수장시켜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왜 왔느냐고 항거를 합니다. 나를 이대로 내 버려두면 이 한 생명 파멸시킬 수 있을 텐데 나를 방해하려고 왔느냐고 예수님께 대항을 합니다.
사탄 마귀는 이미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이때에 예수를 타락시켜 보려고 했다가 실패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을 물속에 수장시키려고 예수님이 배타고 오실 때 갑자기 광풍을 일으켰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오실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면 자기가 멸망을 당하던지 아니면 쫓겨나던지 할 것을 이미 알았기에 미연에 예수님이 오시지 못하도록 풍랑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는 잠잠할 수밖에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이곳에 왜 왔느냐고 최후의 발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을 갈릴리 호수에 수장시키려고 했던 귀신은 자기가 그 물 속에 수장되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광풍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환난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 그 환난의 바람과 고난의 광풍을 보고 제자들처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음도 없이 두려워하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눅12:4-7)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아-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과 환난 뒤엔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지금 내 인생에 부는 광풍을 위하여, 내 삶에 몰려오는 태산과도 같은 파도를 이기기 위하여, 또 우리 가정에 쉴 새 없이 불어오는 환난의 바람을 잔잔케 하기 위해서, 이제는 진정으로 주님을 깨워야 하고 그 주님께 부르짖어서 구원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알리는 말씀을 전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한 저의 설교를 사랑해 주시는 전국, 세계의 모든 동역자님들과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드립니다. 저는 설교를 작성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추려고도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나의 카페를 비롯하여 몇몇 기독교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적이 있습니다. 나의 설교는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인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설교를 자신의 사이트나 다른 곳에 자신의 설교 인양 전제를 하여서 이것을 보신 분들이 내가 그것을 보고 도용을 하였다고 오히려 나를 책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안되겠습니다. 나의 부족한 설교를 인용도 하시고 전문 사용을 하셔도 좋으나 다른 곳에 전제를 하는 것은 삼가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를 사랑하는 동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