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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로 올라오라.(휴거)(14)
말씀: 계 4:1-11. 2024년 3월 31일 일요일 오전 11시
이제 계시록 4장입니다.
주님께서 “이 일 뒤에....... 이후에 반드시 있을 것들”(1)이라고 말씀하신 환상과 계시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 영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일곱 교회의 환상들을 보고 그가 본 것들을 책에 기록해서 일곱 교회에 보내도록 명령받았습니다.
계시록2, 3장에 나오는 교회는 지나온 2천년교회사에 적용해서 영적으로, 교훈적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는 지금의 신약교회에 적용할 수 없고 분명히 큰 환란 성도들에게 해당됩니다. 신약 교회가 공중으로 들림(휴거) 받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모든 성도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성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변화되고 저 하늘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복음을 들었으나 헛되이 믿었던 자들이 채여 올라감을 당하지 못하고 실제로 일어난 휴거사건과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통하여 다시 주를 믿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큰 환란이란 엄청난 재앙을 몸소 보고 느끼며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이 어린양의 피에 있음을 깨닫고 믿어 끝까지 견디며 하나님의 명령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지킬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나니 곧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들과 예수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더라.](계14:12) 환란 성도들은 죽기까지 신실하며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표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큰 환란 때 이들이 선포하고 믿는 복음은 왕국 복음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성도”라는 단어를 볼 때 편견에 얽매이지 말고 문맥에서 구약 성도, 신약 성도, 큰 환란 성도를 분명히 나누고 구분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는 방법입니다(딤후2:15).
요한계시록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네가 본 것들과 지금 있는 것들과 이후에 있을 것들”(계1:19)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승천하신 모습입니다. 요한은 주의 날 성령 안에서(계1:10)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고, 일곱 금 등잔대를 보았고 그 한 가운데 계신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을 보았습니다(계1:10-12).
계시록 1:20을 보십시오. “네가 본, 내 오른 손에 있는 일곱별과 일곱 금 등잔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한이 본 것 즉 “네가 본 것”은 주님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교회의 천사들)과 일곱 금 등잔대(일곱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것”은 계시록 2,3장에 해당하는 일곱 교회의 모습과 유형입니다.
요한이 A.D 96년 경 밧모섬에 있을 당시의 실존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아니라 “주의 날” 미래에 있을 (큰 환란) 성령 안에서 본 교회에 보내어질 내용들이므로 기록한 책의 대상은 큰 환란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회중(광야 교회) 한 가운데 두 세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계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 거기에 나도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니라.](마18:20). 주님은 큰 환란 때 자신의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들고 계시며, 일곱 금 등잔대(교회) 가운데 거니십니다(계2:1).
일곱 교회에 대한 환상, 계시를 다 본 후에 주님은 요한을 하늘로 데려 가셔서 “이 일 뒤에....... 이후에 반드시 있을 것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19장은 “이후에 반드시 있을 것들”로서 미래의 일들입니다. 이것은 결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등, 과거나 현재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1절입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바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더라. 또 내가 들은 첫 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있을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4:1). 요한은 AD96년에 영 안에서 2천년 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편지에 대해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뒤에 요한은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a door was opened in heaven-4:1).
계시록에서는 하늘의 문이 두 번 열리는데 본문(4:1)에서 한 번, 19:11에서 한 번입니다. (계4:1)은 땅에서 하늘로 성도들이 채여가기 위함이고, (계19:11)은 하늘에서 주님이 땅으로 내려오기 위함입니다. 한 번은 성도들의 휴거를 보여주고 또 한 번은 주님의 지상 재림을 보여줍니다.
“이 일 뒤에...”란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대한 환상을 본 뒤에”란 말입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큰 환란 때 있을 사건들, 인물들을 보여 주시는데 땅과 하늘을 번갈아가며 입체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더라.”(1). 이것은 구름이 없는 청명한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에는 창들(창7:11,8:2 왕하7:2,19 말3:10)이 있고 문들(시78:23)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많은 문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개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내가 들은 첫 번째 음성”(1). 요한은 이미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계1:10)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땅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나팔 소리”같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공중으로 들림 받을 때 나팔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으켜지며 우리가 변화되리니] (고전15:51-52).
신약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는 “나팔 소리가 날 때”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다 변화됩니다. 몸의 부활로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많은 성도들이 스스로 변화되고 성화되기 위하여 육체의 훈련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고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순식간에 변화 하게하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주님께서 호령(외침)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십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신약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가 일어납니다. 요한이 들은 나팔 소리는 주의 음성이었습니다(1:11, 4:1). 요한은 이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1). 이 표현은 성경에서 세 번 나옵니다(잠25:7, 계4:1, 계11:12). 구약에서는 왕이 부르는 음성이고, 신약에서는 땅에 있는 누군가를 하늘로 불러올리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요한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를 하늘로 불러 올리셨습니다.
이 구절을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신약 성도, 신약 교회의 휴거로 가르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을 가슴에 품은 사랑하는 제자로서 교회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보며 오늘날 모든 성도가 간절히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면 “이리로 올라오라.”는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올라갔을 때는 이미 왕좌 둘레에 누군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1). 요한은 지상의 교회들을 본 후 하늘로 올라가 7년의 큰 환란 동안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전에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낙원)로 채여 올라갔었지만 그가 본 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12:4). 그러나 요한은 올라가 보고 들은 것을 다 기록하고 증언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2절입니다. [즉시 내가 영 안에 있었는데, 보라, 하늘에 한 왕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라.](계4:2). 사도 요한은 “영 안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구름을 탄 것이 아니고 불 말이나 불 병거, 회오리바람을 타고 옮겨 다닌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었습니다. 영 안에 있다는 것은 육신 안에 있는 것과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보고, 듣고, 이동하는 모든 것들이 자유롭습니다.
“즉시 내가 영 안에 있었는데”(1)에서 “즉시”란 말은 순간적으로,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영 안에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육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팔 소리가 날 때 즉시 영 안에 있게 됩니다. 영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육신 안에 있는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요한은 육체 안에서 주의 환상과 계시를 본 것이 아니라 영 안으로 옮겨져서 그분의 환상과 계시를 보았는데 이는 다른 대언자들, 사도들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시거나 환상이나 꿈을 통해 말씀을 주시지 않고 요한을 성령 안으로 옮기셔서 직접 보고 듣게 하셨습니다.
계시록에서 요한은 4번이나 이런 체험을 합니다.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으면서”(계1:10), 즉시 내가 영 안에 있었는데(계4:2), 이렇게 그가 영 안에서 나를 광야로 (계17:3), 영 안에서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계21:10). 영 안에 있을 때 그는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시공간을 이동한 것입니다.
구약에 이런 예가 있습니다. [{주}의 손이 내 위에 임하사 {주}의 영 안에서 나를 데려다가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한가운데 두시고](겔37:1). “주의 영 안에서” 에스겔은 시, 공간 이동을 했습니다. 신약에 전도자 빌립도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사막에서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에게 침례를 행한 후에 주의 영께서 채어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육체와 함께 시공간을 초월했습니다. [그들이 물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 [주]의 [영]께서 빌립을 채어 가시므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기뻐하며 자기 길을 갔으나](행8:39)
사도 요한 역시 그런 상태입니다. 우리가 육체 안에 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보라, 하늘에 한 왕좌가 놓여 있고”(2).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요한이 하늘에서 처음 본 것은 “한 왕좌”입니다. 계시록에서 31번이나 ‘왕좌’란 말이 나오는데 4장에서만 일곱 번이 나옵니다(2,3,4,5,6,9,10). 4장에서 왕좌는 ‘통치자’입니다. 5장에서는 ‘왕좌’란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1,6,7,11,13). 5장에서 왕좌는 ‘구원자’입니다. 요한이 본 하늘의 왕좌는 온 우주의 중심입니다. 성경의 중심 단어, 핵심 단어가 ‘왕좌’입니다.
일찍이 이사야와 에스겔 대언자는 요한이 본 이 왕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또한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었으며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사6:1-2). 이처럼 대언자 이사야는 왕좌에 앉으신 주 하나님과 성전과 스랍들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영 안에서 성경으로만 읽었던 그 장면을 직접 보고 듣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왕좌의 모습’과 “그것 위에 앉으신 분”은 사도 요한이 본 것과 동일합니다. [그들의 머리들 위에 있는 궁창 위에는 사파이어 보석 모양 같은 한 왕좌의 모습이 있었고 그 왕좌의 모습 위에는 사람의 모양을 닮은 모습이 그것 위에 있더라.](겔1:26). 이처럼 요한 계시록은 철저히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주의 왕좌는 옛적부터 견고히 섰고(시93:2), 주께서 자신의 왕좌를 하늘들에 예비하셨습니다(시103:19). 이 왕좌를 찬탈하려던 이가 루시퍼입니다. 루시퍼는 자신의 왕좌를 주의 왕좌보다 높이려 했습니다.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내가 또한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사14:13-14).
루시퍼는 자신의 왕좌를 높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루시퍼)의 생각은 망상이었고 그는 둘째하늘로 추방당했습니다. 천년 왕국 때 주님은 자신의 왕좌를 예루살렘에 두십니다(렘3:17).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라.”(2). 왕좌에 앉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하늘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똑바로 하늘을 우러러본 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께서 [하나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니](행7:55-56). 스데반은 땅에서 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최초로 하늘에 올라가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고 증언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왕좌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히8:1, 12:2).
3절입니다. [앉으신 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 왕좌 둘레에 보기에 에메랄드 같은 무지개가 있으며](계4:3).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고 했는데 영롱함과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석에 비유한 것은 흔한 일입니다. 1장에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잘 나옵니다.
벽옥과 홍보석은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12개의 보석의 처음(홍보석)과 마지막 보석(벽옥)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도 모든 보석의 아름다움, 빛, 영광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출28:17-20).
왕좌 둘레에 무지개가 있는데 보기에는 에메랄드 같았습니다. 무지개는 주님께서 노아의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시고 구름들 속에 두신 언약의 증표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 맺은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과 땅 사이에 맺은 언약”(창9:13)입니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있으리니 내가 그것을 보고 [하나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체의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있는 영존하는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시며](창9:16).
왕좌 둘레에 있는 ‘무지개’는 주님께서 이 땅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체의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을 기억하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핵심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창조물입니다. 큰 환란의 주제, 대상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방으로 퍼지는 그 광채의 모양은 마치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 모양 같았는데 이것은 {주}의 영광의 모습을 가진 모양이더라. 내가 그것을 볼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말씀하신 분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8). 이 구절을 통해 요한이 본 왕좌 둘레에 있는 무지개는 영광의 광채의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좌 둘레로 보이는 무지개는 주의 영광의 모습을 가진 모양입니다.
요한은 “에메랄드 같더라.”했는데 에메랄드는 녹색입니다. 녹색은 자연의 색으로 생명을 표현합니다. 녹색은 오래 보아도 눈이 피곤하지 않는 색이며, 마음에 흥분을 진정시키는 안정감을 줍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인데 녹색으로 “에메랄드 같더라.”고 썼습니다. 주의 왕좌는 은혜의 왕좌이기 때문입니다(히4:16).
4절입니다. [또 그 왕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가 있더라. 내가 보니 그 자리들에 스물네 장로가 흰옷을 입은 채 앉아 있는데 그들이 머리에 금 왕관을 썼더라.](계4:4). 사도 요한은 왕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를 보았습니다. 스물네 자리에는 스물네 장로가 흰옷을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머리에 금 왕관을 썼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학자들마다 자기들의 의견, 추론을 진리처럼 주장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왕좌 주변에 있는 스물 네 자리에 있는 스물네 장로는 누구입니까?
◆ 어떤 이는 천사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왕좌가 없습니다. 천사들은 왕관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장로라 불린 적이 없고, 불리지도 않습니다. 장로는 사람들에게 있는 직분입니다. 천사들은 주의피로 구속받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입니다.
◆ 어떤 이들은 구약의 열두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열두 사도는 열두 지파를 재판한다는 말씀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태어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재판하리라.](마19:28) 하셨습니다.
성경 기록의 사적인 해석은 이단으로 빠지는 길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이 해석해주는 것을 따르면 가장 쉽고 안전하고 편하며 올바른 믿음 안에 거하게 됩니다. 스물네 장로가 누구인지는 성경의 해석을 보고 믿으면 됩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께서는 그 책을 취하여 그 책의 봉인들을 열기에 합당하시니이다.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5:9-10).
이들은 이스라엘의 혈통을 따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이들은 주의 죽으심과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구속 받았습니다. 천사들은 모든 족속 가운데서 구속 받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이들은 주의 죽으심과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구속 받았다고 했기 때문에 유대의 12지파가 아니고 신약의 온 세상의 구원받은 크리스천입니다. 더 이상의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성경의 분명하고도 명백한 말씀을 가감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사도 요한이 주의 날 성령 안에서 하늘로 올라갔을 때 이미 하늘에는 주의 왕좌 둘레에 24장로가 흰옷을 입고 머리에 왕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를 자신의 피로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앉히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우리를 함께 앉히셨으니](엡2:6) 주님은 과거형으로 요지부동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약 성도들에게 다섯 가지 관(왕관)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쓴 왕관이 바로 그 왕관입니다. 주님은 이기려고 애쓰며 모든 일에 절제하는 자마다 얻는 ‘썩지 아니할 왕관’(고전9:25)을, 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여 받는 “환희의 왕관”(살전2:19), 주의 오심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의 왕관”(딤후4:8), 시험을 견딤으로 단련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약1:12, 계2:10), 양들을 먹이고 돌본 목자들이 받는 “영광의 왕관”(벧전5:4)을 주십니다.
스물네 장로는 주님이 주시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 땅의 큰 환란 때 이미 저 하늘에는 신약 성도들이 올라가 유업의 상급을 받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약 교회가 큰 환란 전에 휴거된다는 증거요, 불변의 진리입니다.
성경에 휴거를 말씀하시는 정확한 시점은 없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하신 말씀을 듣고 요한이 올라가 보니 이미 휴거사건이 일어난 후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 큰 환란이 일어나기 전에 휴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곧 큰 환란의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왜 24명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리한 억측, 추측을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인원은 12나 24 또는 그 배수로 정합니다. [그때에 레위 사람들은 삼십 세 이상이 계수되었으며 한 남자씩 차례대로 그들의 머릿수에 따라 계수된 그들의 수가 삼만 팔천 명이더라. 그들 중 이만 사천 명은 {주}의 집의 일을 진척하기 위해 있었고 육천 명은 직무 수행자들과 재판관들이었으며](대상23:3-4). 38,000명의 레위 사람들 중에서 24,000명이 주님의 집의 일을 위해 지정되었습니다.
악기를 들고 노래하며 주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뽑을 때도 24명을 제비 뽑았습니다(대상25:31). 장로 24명을 선발하여 순서대로 제비를 뽑아 주의 집에 들어가 직무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대상24:17-18).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도 24명을 제비뽑아 각 문들에 세웠습니다(대상26:17,18). “스물 넷”을 정한 것은 사람들의 전통이나 사람들의 관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미리 양식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의 생각이나 수단이나 고안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을 통하여 지시 받는 것을 말합니다. 대언자들이 미래를 예언 한 것도,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하고 자신의 태어남이나 죽음을 기록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들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지은 성막역시 그러합니다. 지상의 성막이나 성전은 뛰어난 건축가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 주신 하늘의 성막, 성전 모형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너는 주의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그것들의 양식대로 그것들을 만들지니라.](출25:40)고 하셨습니다(출26:30).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했을 때 주님은 하늘에 있는 것을 보여 주시고 그 양식대로 짓도록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주}께서 자신의 손을 내 위에 얹으사 기록해 주심으로써 내가 이 모든 것 즉 이 양식을 따른 모든 일을 깨닫게 하셨느니라. 하니라.](대상28:19),
이 역시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의 모형입니다. [이 성막은 그때 그 당시를 위한 모형이었으므로 그들이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그 섬기는 일을 행한 자를 완전하게 할 수 없었으며](히9:9) 땅의 성전과 주의 성소에서 주를 섬기는 24명은 하늘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땅에서 그 양식을 따라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은 이런 것들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의 것들 그 자체는 이런 것들보다 더 나은 희생물로 해야 하나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것의 모형들인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하늘 그 자체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라.](히9:23-24).
땅의 성막, 성전을 성경은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 “참된 것의 모형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스물 네 장로가 있는 것은 땅의 모형들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4). 하늘의 왕좌 둘레에 앉아 있는 스물 네 장로는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흰옷은 우리 주님이 입고 있는 옷이며, 천사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입게 될 옷이 흰 옷임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옷은 우리의 몸을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을 성경은 옷, 장막, 그릇, 흙집 등으로 비유합니다. 우리 몸이 혼과 영을 가리는 옷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이란 옷을 벗고 영광스런 옷을 입는데 이 옷이 ‘흰옷’입니다.
5절입니다.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4:5). 하나님의 왕좌는 셋째 하늘에 있으며 지구에서 볼 때 북쪽을 향해 올라가면 됩니다. 성경은 북쪽에 있는 왕의 도성, 하나님의 왕좌에 대해서 말합니다. [시온 산은 아름답게 위치하여 온 땅의 기쁨이 되나니 곧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위대한 [왕]의 도시로다.](시48:2). 시온 산은 북쪽 면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저 하늘로 들림을 받을 때 북쪽 하늘로 모두 채여 올라갑니다. 하늘에 있는 왕좌는 결코 상징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저 하늘이란 공간에 있는 왕좌입니다(사14:13-14).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5). 번개, 천둥, 음성이 나오는 왕좌는 주의 심판을 집행하는 심판의 왕좌란 뜻입니다(계8:5, 11:9, 16:18). 출애굽의 시내 산에 주님이 나타나실 때 “천둥과 번개와 심히 큰 나팔 소리”로 인해 온 백성이 떨었습니다(출19:16).
[주의 천둥소리가 하늘에 있었으며 번개들이 세상을 비추니 땅이 떨고 흔들렸나이다.] (시77:18). 이스라엘이 왕을 구했을 때 주님은 천둥을 보내셔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삼상12:17-18).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는 왕좌는 “은혜의 왕좌”가 아니라 “심판의 왕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여 줍니다. 요한이 본 하늘의 왕좌는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5). 일곱 등불이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성경에서 등불은 ‘영’을 가리키거나 사람 자체를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주께서 내 등잔불을 켜시리니 {주} 내 [하나님]께서 내 어둠을 밝히시리로다.](시18:28). 내 등잔불은 내 영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이므로 배의 모든 속 부분을 살피느니라.](잠20:27).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라고 하셨는데 “너희 등불”은 각 사람의 영을 말합니다.
등불이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었습니다. [......왕께서 다시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나가지 마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삼하21:17).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등불입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의 뿔이 싹을 내게 하리라. 내가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해 한 등불을 정하였도다.](시132:17).
본문에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4:5)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천사들은 ‘영’이라고도 불립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고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시되](히1:7).(시104:4 인용). 성령이 아니라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들입니다.
등불로 표현된 ‘영들’은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입니다.
타오르는 등불, 횃불은 심판의 불을 밝히는 목적 뿐 아니라 뭔가를 태워 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왕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전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께서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채 서 계시는데 이 눈들은 온 땅 안으로 보내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5:6).
일곱 뿔,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이들은 온 땅으로 주님의 사역을 받아 일하는 천사들입니다. 이 중에 두 [영]은 “심판하는 영”과 “불태우는 영”입니다. [이 일은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어 내시고 예루살렘 한가운데로부터 그곳의 피를 깨끗이 제거하실 때에 이루어지리라.](사4:4).
6절입니다. [그 왕좌 앞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이 있더라.](계4:6).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지금 우리는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서 본 하늘의 중심부를 보고 있습니다. 하늘의 왕좌는 온 우주의 지성소입니다.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은 만유의 주(主)이시며 성경의 주인공이십니다.
요한은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 왕좌 뒤에 있는 무지개의 모습, 왕좌 둘레의 스물 네 장로, 왕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영)을 보고,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바다는 문자 그대로 ‘바다’입니다.
하늘들 위에 물(바다)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보도록 합시다. [하늘들의 하늘들아, 또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시148:4).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이라고 합니다. 이 물은 지구에 있는 5대양의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재창조 때에 땅(지구)을 덮고 있는 깊음의 물들을 나누셨습니다(창1:6-8). 우리가 하늘이라 부르는 창공은 물들을 나눈 그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위에 물이 있고 하늘 아래에 물이 있습니다. 하늘 아래 물은 이 땅의 바다들(대양)이고 하늘 위의 물들은 깊음의 바다라 불립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왕좌의 정면을 숨겨 두시고 자신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낮과 밤이 끝날 때까지 경계들을 두어 물들을 둘러싸시느니라.](욥26:9-10). 잘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읽고 믿으면 됩니다. 추론하거나 왜곡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계속해서 욥기를 보십시오. [그대가 그분과 더불어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을 펼쳤느냐?](욥37:18).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하늘이 텅빈 허공이 아니라 물이 있고, 단단한 거울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이 “수정 같은 유리 바다”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욥기에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에 대해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물들은 돌로 숨긴 것 같이 숨겨져 있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느니라.](욥38:30).
욥기에 기록된 “깊음의 표면이 얼어 있는 이 물들”을 요한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라고 한 것입니다. 계시록 15:2에도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성도들이 나옵니다(계15:2).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요한계시록은 독립된 책이 아니라 철저히 구약을 배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리 바다에 관한 것 역시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의 실물과 지상의 모형을 보겠습니다. [너는 또한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것의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씻게 하며 그것을 회중의 성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안에 물을 담을지니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을지니 그들은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서 죽지 않도록 할 것이요, 섬기려고 제단에 가까이 가서 {주}께 드리는 화제 헌물을 태울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이렇게 그들이 손발을 씻어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 그것은 그들에게 곧 그와 그의 씨에게 그들의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출30:18-21).
출애굽기는 성막, 열왕기에는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는 ‘물두멍’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씻기 위한 것입니다. 씻지 않고 성막에 들어갔다가는 죽습니다. 섬기려고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때에도 먼저 이 물두멍에서 씻어야 합니다.
[또 그가 바다를 부어 만들었는데 한쪽 가장자리에서 다른 쪽 가장자리까지는 십 큐빗이며 그것은 사방으로 둥글고 그것의 높이는 오 큐빗이며 삼십 큐빗 줄이 돌아가며 그것을 둘렀더라. 그것의 가장자리 밑에는 돌아가며 둥근 장식들이 일 큐빗마다 열 개씩 있어서 그것을 둘렀고 돌아가며 바다를 둘렀는데 그 둥근 장식들은 그가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 두 줄로 부어 만들었더라.](왕상7:23-24). 솔로몬의 성전에는 물두멍이 아니라 “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에 무슨 “바다”가 있는가 싶지만 이것은 하늘의 양식을 본 따 만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전에서 모형으로 보았던 것을 하늘에 올라가 직접 실물, 실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주께 나아가기 위해 씻어야 할 물이 필요하지만 저 하늘에서는 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깨끗해지고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이 있더라.”(6). 요한이 본 네 짐승은 왕좌 한 가운데와 둘레에 있었는데 이들 짐승은 ‘앞뒤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이는 지상에서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영물인 짐승으로 그룹들이라 불립니다.
창세기 3:24에서 처음 등장하는 그룹들은 에덴의 낙원을 지키며 사람들이 다시 그리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들은 출애굽의 성막을 제작할 때 주님이 언약궤의 긍휼의 자리 양 끝에 금으로 그룹 둘을 만들게 하셨습니다(출25:18,19). 주님은 그룹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출25:22), 그룹들을 타고 나십니다. 성막의 휘장을 만들 때 거기에 그룹들을 수놓아 앙장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출26:1).
그룹들이 수놓인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을 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역할을 하는 의미로 휘장에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출26:31). 그룹들은 천사들과 달리 날개가 있습니다.
7절입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둘째 짐승은 송아지 같으며 셋째 짐승은 사람 같은 얼굴을 가졌고 넷째 짐승은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더라.](계4:7).
이 구절은 에스겔 1:10절과, 10:11-15절을 서로 비교해서 보아야 합니다. 요한이 본 네 짐승은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같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을 대표합니다. 사자는 들짐승을 송아지는 가축을 사람은 인류를 독수리는 조류를 대표합니다.
[그들의 얼굴 모습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 넷이 사람의 얼굴을 가졌고 오른쪽에는 사자의 얼굴을 가졌으며 또 그들 넷이 왼쪽에는 소의 얼굴을 가졌고 그들 넷이 또한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더라.](겔1:10). 요한과 에스겔은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각각 네 얼굴을 가졌는데 첫째 얼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며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고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그룹들이 들렸는데 이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 그 살아 있는 창조물이니라.](겔10:14-15).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서는 뭔가 한 단어가 바뀌었습니다. ‘소’의 얼굴이 아니라 ‘그룹의 얼굴’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소의 얼굴”을 “그룹의 얼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에 빠져든 것이 모두 ‘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탄 루시퍼는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너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니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오르내리며 다녔도다.](겔28:14). 이 그룹은 주의 왕좌를 덮고 있었습니다. 왕좌 주변 사방에 있는 다른 그룹들과 달리 왕좌 위에 덮는 그룹으로 있었는데 용, 옛 뱀 등으로 대표됩니다. 이 그룹은 “기름 부음 받은 그룹”이었습니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문자적 의미가 “기름 부음 받은”입니다. 덮는 그룹이었던 그가 “나의 왕좌”를 외치는 것은 그가 바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주님이 그를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그들이 네 한가운데를 폭력으로 가득 채우매 네가 죄를 지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리라. 오 덮는 그룹아, 내가 너를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끊어 멸하리라.](겔28:16). 주님은 덮는 그룹이었던 그가 불법으로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며 반역하자 그를 더럽게 여겨 끊어 버렸습니다. 루시퍼는 사탄이요, 한 때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8절입니다. [네 짐승 즉 그것들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것들의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또 그것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분이시니라. 하더라.](계4:8). 그룹은 날개가 있습니다. 반면 천사는 남자의 모습이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날개가 없습니다. 왕좌 주변에 있던 그룹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것들의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밤낮 쉬지 않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분이시니라.”(8). 그룹들은 주님의 거룩하심과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분으로 영원성을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신약에서는 요한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거의 나오지 않는(고후6:18-1번) 표현입니다.
9절입니다. [그 짐승들이 왕좌에 앉으신 분 곧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때에](계4:9). 그 짐승들이 왕좌에 앉으신 분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립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거룩하시며, 전능자이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에 올라 간 요한은 지금 놀라운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스물네 장로가 왕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왕관을 왕좌 앞에 던지며 이르되,](계4:10). 왕좌 둘레에 있는 스물 네 장로는 그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했습니다. 엎드려 경배한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경배란 뜻은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예배, 경배, 숭배, 참배, 라고 할 때 배(拜)는 엎드려 절한다는 뜻입니다.
요즘 개신교회에서 주께 경배,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모두 앉아 있거나 앉았다, 섰다 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성경적으로 경배는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본 분들이라면 구약에서부터 모두 주께 엎드려 절했던 것을 볼 것입니다. “엎드려 경배, 엎드려 절하고..”란 표현들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 있던 장로들은 자기들의 자리에 앉아서 주께 경배 드린 것이 아니라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자기들이 왕관을 왕좌 앞에 던지며”(10). 장로들은 주님께 받은 왕관들이 있습니다. 왕관은 유업의 보상이요, 상급입니다. 우리는 상을 받도록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절제하지 않으면 썩지 않는 왕관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주의 재림을 사모하지 않으면 의의 왕관을 얻지 못합니다(딤후4:8). 복음을 전하고 혼들을 얻어오지 않는다면 환희의 왕관을 얻지 못합니다(살전2:19). 시험을 견디지 못하면 생명의 왕관을 얻지 못합니다(약1:12). 목자들이 더러운 이익을 탐하거나 양들 위에 군림하면 영광의 왕관을 얻지 못합니다(벧전5:4).
우리는 왕관을 얻기 위해,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푯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계신 것과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주를 위해 아무리 놀라운 일을 많이 해도 주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3).
성경이 말씀하시는 감독이나 목사의 자격이 무엇입니까? [남자가 감독의 직무를 사모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이 말은 참된 말이로다. 그르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고 .........](딤3:1~2상) 여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 감독이나 여자 목사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리 놀라운 은사를 가지고 구제와 선행과 헌신을 했어도 상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모든 믿음이 있어 산들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느니라.](고전13:2-3).
사랑이 없으면,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일은 내게 아무 유익도 없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열심을 내고 노력을 했을 지라도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사람이 또한 우승하려고 애써도 적법하게 애쓰지 아니하면 왕관을 얻지 못하며](딤후2:5). 성도가 규칙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왕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해야 합니다. 주를 믿을 때 우리는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사순절, 고난절, 부활절, 맥추절이 성경에 있습니까? 신약성경에 그런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이교도들의 풍습을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로 가르치는 것은 오류일 뿐 아니라 아무런 상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을 받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영원의 세계로 이민가기 위한 준비하는 삶이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받을 보상을 위해 준비하고 소망하는 것이 이 땅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스물 네 장로는 자신들의 왕관을 주님 앞에 던졌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받은 보상이 자신들의 수고, 노력, 애씀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모든 일, 열매”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행하신 일이기에 왕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부담인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우리는 우리가 받는 상급이 모두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 때 왕관을 주님 앞에 던져 드릴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오 [주]여, 주께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 하더라.](계4:11). 스물 네 장로는 주께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은 영광과 존귀와 왕관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왕관을 왕좌 앞으로 던진 것입니다. 주님을 알수록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뭔가 된 줄로 아는 자는 속은 자요, 속이는 자입니다(갈6:3).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11). 아멘.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11). 우리는 왜 존재하며, 주님은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지 그 목적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존재합니다. 존재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왜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기를 기쁘게,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며 그것이 행복인 줄로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를 기쁘게 하려고 삽니다. 우리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롬15:1,3).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우리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산, 바다, 들, 하늘, 초목이나 짐승들까지 모든 창조물은 주를 기쁘게 하려고 창조되었으며 존재합니다. 우리에게는 쓸모없고 해악이 되는 그런 것들까지 모두 다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각자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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