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법성게’ 제1구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법성게와 의상대사(13)해주스님
| 13. ‘법성게’ 제1구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부처와 내가 다르지만 법성에 있어서 둘이 아니기에 원융
원융은 이치가 하나로 융합
구별되고 방해됨 없이 무애
원융은 하나의 의미 아니라
여러 모습이며 하나라는 뜻
남산·수미산 높이 다르지만
법성으로 보면 완벽히 같아
모든 존재 동등해 둘 아닌데
분별하여 차별 존재 만들어
7처9회도. 돈황 제12굴주실 북벽.
‘법성게’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된다. ‘법성게’의 첫 구절이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30구의 게송을 해설함에 있어서 이 구절을 포함하여 처음 4구가 자리행(自利行)의 증분(證分)을 보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깨달은 지혜가 있어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증분 4구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은 생략하고 제5구부터 설명을 붙여나간 후 다시 보충설명을 더하고 있다. 여기서는 게송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의미와 의상 스님의 강설 내용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 경증(經證)과 아울러 주석서 등에 보이는 법손들의 해석 등을 빌어서 게송의 뜻을 천착해보기로 한다.
‘법성’은 원융하여 일정한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이상(無二相)이다. 법성이란 ‘법’은 일체존재이고 ‘성’은 그 성품으로서 원융한 것이다. 그래서 법성은 존재로서 그 성품이 원융한 것, 또는 그 성품이 원융한 존재이다. 그 원융함을 거듭 강조해서 ‘법성원융’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는 이 법성의 원융한 성품이 그대로 일어난 법성성기(法性性起)이며 성기법성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변. 돈황 제9굴주실 서피.
‘원융’은 사전적 설명으로는 ‘모든 이치가 하나로 융화되어 구별 없고 방해됨이 없이 무애함’이다. ‘원융’이라는 용어는 ‘화엄경’에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의상 스님은 ‘화엄경’ 교설에 입각해서 모든 존재를 법성이라 부르고 그 법성이 원융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면 원융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법성원융이라 함은 법계 모든 존재가 다 동등하여 두 모습이 없다는 것인데 하나뿐이기 때문에 둘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모습뿐이기 때문에 두 모습이 없는 것이 아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두 모습이면서 한 모습이다. 둘·셋·넷 다양하면서도 하나이고 한 모습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의상 스님이 ‘법성게’를 지을 때 의거한 ‘화엄경’에도 물론 법성이라는 용어가 수 없이 나온다. ‘일승법계도’에서 일승, 법계와 아울러 법성을 중시한 것으로 보아 경의 전체내용이 법성임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법성이라는 용어가 직접 쓰인 용례 또한 수없이 많다. 특히 부처님은 법성을 요달하신 분이고, 보현보살을 위시한 수많은 청법대중 보살들이 모두 동일 법성이라고 한다.
60권 ‘화엄경 세간정안품’의 말씀을 좀 더 들어 보자.
“(모든 부처님 법은) 진실하여 두 모습(二相)이 없으니, 법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법성은 스스로 청정하여 모습이 없으니(無相) 허공과 같다.”
“법왕께서 묘법당에 안주하셔서 법신 광명을 비추시지 아니함이 없으니, 법성도 여실하여 다른 모습[異相]이 없다.”
법성이 원융하다는 것은 스스로 청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청정은 본래 참됨[眞]과 속됨[俗], 깨끗함[淨]과 더러움[染] 등의 모든 상대되는 모양을 여읜 것이다. 진속, 염정을 여읜다는 것은 진속, 염정에 다 통한다는 것이니, 전체가 그대로 청정한 법신 그 자체이다. 그래서 무이상이다.
화엄경변. 돈황 제9굴주실 남피.
또 다음 법문은 한국불교교단에서 널리 회자되어 온 대표적인 게송이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 줄 알라.
이같이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뵈리라.(‘수미정상게찬품’)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약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야마궁중게찬품’)
첫 번째 게송은 신라 자장(慈藏)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받아 온 범게(梵偈)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장 스님 당시는 아직 80권 ‘화엄경’은 한문으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자장 스님이 받아온 범게의 번역문으로서 이 ‘수미정상게찬품’ 게송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게송은 ‘화엄경’ 제일게로 회자되고 있는 유심게(唯心偈)이다. ‘일체유심조’는 60권 ‘화엄경’에서는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로 번역되어 있다. 마음이 여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계성 즉 법성의 일체 존재는 바로 그 마음이 여래를 만드는 여래이고,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난 여래성기(如來性起)임을 알 수 있다. 여래성기는 곧 여래출현(如來出現)이다.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이 곧 부처님 여래가 출현하시는 것이다.
여래의 마음을 ‘보왕여래성기품’에서는 여래의 성품, 또는 여래의 지혜로 보이면서, 여래성기 즉 여래출현을 설하고도 있다. 여래의 마음은 성기심(性起心)이니,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일어나 만덕을 구족한 마음인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인 것이다. 이 성기심은 우리가 구경에 깨달아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인데, 실은 우리 중생에게 본래로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의 지혜마음이기도 하다.
이 여래심 뿐만 아니라 여래의 모습과 여래께서 하시는 일도 전부 성기이다. 법신이 그대로 성기이고, 여래의 음성이 성기이니 어업이 성기인 성기음(性起音)인 것이다. 또 부처님의 경계, 행, 성정각보리, 전법륜, 반열반이 다 성기이고, 부처님을 견문하고 공경공양하며 친근하는 선근도 다 성기이다. 부처님이 중생연을 따라 출현하시는 그 모든 것도 다 연기가 아니라 성기로서 여래출현임을 보이고 있다.
화엄경변. 돈황제9 굴주실북피.
의상 스님은 이러한 성기를 법성으로 말하고 있으니 성기법성이고 법성성기이다. 화엄법계의 모든 존재세계를 법성성기로 밝히고 그 법성의 성, 여래성의 성을 ‘원융’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나’를 기준으로 법성을 말해보자. 문제는 ‘나’이지 않은가? 우리는 제법이 무아(無我)이고 무아소(無我所)임을 배워 알고 있다. 무아가 대승적으로는 무자성공(無自性空)의 공임도 알고 있다. ‘법성게’에서는 더 나아가 제법은 원융이라고 한다. 공하기 때문에 공이라서 원융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부연한다면 나의 몸과 마음은 ‘법’이고, 나의 몸과 마음이 원융한 것이 ‘성’이다. 그 법성 역시 원융하다. 그러면 어째서 원융한가? 무이상이기 때문이다. 즉 법성원융은 두 모습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성원융의 존재는 모두 동등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나’도 ‘부처’도 동등하다. 오척쯤 되는 나의 몸과 마음인 오척신(五尺身)이 법성으로서 부처님과 동등한 ‘오척법성(五尺法性)’이다. 법성이 그렇게 원융한 것이다. 그래서 의상스님의 법손인 신림(神琳) 스님도 ‘일승법계도’는 ‘화작전법계일신지상(畫作全法界一身之像), 온 법계가 한 몸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라고 하며, 온 법계가 오척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원융한 모든 존재를 법성이라 함은 모든 존재에 법성을 붙여 말할 수 있다. 수미산은 수미산법성이고, 남산은 남산법성이다. 미세한 티끌은 미진법성이고 오척쯤 되는 나는 오척법성이다.
수미산은 높고 남산은 낮다. 미진은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고 나는 오척쯤 된다. 분별세계에서는 이처럼 높이와 크기가 다 다르다. 높고 낮으며 크고 작다. 그런데 법성은 서로 다르지 않고 모두 다 같다. 오척법성인 나를 기준으로 하면 다 오척에 들어맞는다. 큰 수미산을 줄이지 않고 오척에 들어맞으며 작은 미진을 늘여 키우지 않고 그대로 오척에 들어맞는다. 온 법계가 바로 오척법성으로서 한 몸이다. 한 몸이 온 법계이다. 이것을 법성원융이라고 한다.
중국화엄 초조 두순(杜順) 스님은 “가주의 소가 풀을 먹으니 익주의 말이 배가 부르다. 천하의 의인을 찾았더니 멧돼지 왼쪽 허벅지에 뜸을 뜨더라.(嘉州牛喫草。益州馬腹脹。天下覔醫人。炙豬左膊上)”고 하는 ‘법신송(法身頌)’을 남겼다. 법성원융이라서 두 모습 없는 경계를 읊은 것이라 하겠으니 이것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리는 경계이고, 다른 이가 밥을 먹는데 내 배가 부르는 도리이다.
이처럼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존재는 동등하여 둘이 아닌데 다만 사람들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나와 남을 나누어 차별존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46호 / 2018년 7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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