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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장코뱅 추천 3 조회 439 26.03.21 07:05 댓글 2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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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3.21 11:43

    첫댓글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26.03.21 14:44

    알겠습니다^^

  • 작성자 26.03.21 11:45

    <호크마 주석: 로마서>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어떤 사본에는(P46) 두 번째에 나오는 '축복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이테'(* )가 빠져 있다. 또한 '너희를'의 헬라어 '휘마스'(* )가 빠진 사본도 있다(P46, B). '율로게이테'의 원형 '율로게오'(* )는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의 뜻이다. 이 말을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쓸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며(눅 1:64;2:28;약 3:9),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사용하면 복주신다는 뜻이며(마 25:34;행 3:26;갈 3:9;엡 1:3),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하면 축복하는 것이 된다(눅 2:34;고전 10:16;히 11:20)(Murray).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 것이다(마 5:44;눅 6:28). 핍박하는 자, 즉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에는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내용도 포함된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 자체로는 이것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성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행해야 한다(갈 5:16).

  • 작성자 26.03.21 11:45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 14절과 본절은 자신을 잊어버려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즉 감정과 처지와 조건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가능하며(눅 10:27), 성령으로 인도받아야(갈 5:16) 한 마음이 될 수 있다(빌 2:2).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고전 12:26;빌 2:17, 18), 14절과 관련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하다(Dunn, Cranfield). 그리스도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다(요 11:33-35).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선한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빌 2:18) 곤경과 불행으로 우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같은 슬픔을 갖는다(마 5:4;눅 6:21).

  • 작성자 26.03.21 11:45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 '마음을 같이한다'는 표현은 15:5;고후 13:11;빌 2:2;4:2에 나오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아우토 프로네인'(* )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한다. '서로'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이스 알렐루스'(* , 'toward one another')에서 '알렐루스'(one another)는 대개 전치사 '엔'(* , '안에')과 함께 사용된다. 이 차이는 '엔 알렐루스'가 '너희 중에', '너희 가운데'라는 범위의 의미가 강하다면 '에이스 알렐루스'는 '서로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에 강조점이 있다. 또한 14절이나 17-20절로 비추어 보아 저자가 특히 신자들의 행동이 외부에 나타남으로써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빛된 선행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될 것이다(마 5:16).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 '높은 데'의 헬라어 '타 휴셀라'(* )는 중성 명사이면서 목적격으로 '높은 것들'을 의미한다.

  • 작성자 26.03.21 11:46

    따라서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수준을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기이한 일에 뜻을 품는 것이다(시 131:1). '낮은 데'의 헬라어 '타페이노이스'(* )는 '비천한'(눅 1:52;약 1:9), '겸손한'(마 11:29;고후 10:1)의 뜻이다. 따라서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자신을 생각함에 있어서 겸비(謙卑)하라는 것이며, 3절의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며 처신하라'는 권유를 반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자들 즉 지혜없는 자들의 생각이다(잠 3:7). 이를 히브리어식으로 표현하면 '높은 것에 대해 심사 숙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하고 우월 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진중(珍重)하게 대하고 온순함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준다(Calvin). 그렇지 않고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오만함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12:17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 이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제한시키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악행하는 자에게 보다 큰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이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 욕구를

  • 작성자 26.03.21 11:46

    제재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 25)는 공식적인 형벌을 말한 것이며 이런 규정을 세운 것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들을 금하기 위한 것이다(잠 20:22;24:29). 바울은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1:21)을 잘 알았으므로 인간에게 이런 교훈이 필요함을 느낀 것이다. 또한 본문과 살전 5:15;벧전 3:9은 서로 유사한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마 5:38ff.)을 따라 일정한 교리가 형성되어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본절 전반부의 소극적인 권면에서 발전하여 이제 적극적인 권면으로 나아간다. '모든 사람'은 '아무에게도'에 대칭되는 말로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 앞에서'는 또한 '주님 앞에서'(고후 8:21)와 버금가는 권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사람들과의 현상적인 관계와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절에서는 '선한'이라는 말을 7:12에 나오는 헬라어 '아가도스'(* ) 대신에 '칼로스'(* )를 사용했다. 이는 일반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나타낸다(Dunn).

  • 작성자 26.03.21 11:47

    '도모하다'의 헬라어 '프로노에오'(* )가 본문에서는 분사형 '프로노우메노이'(* )로 쓰여 명령을 나타낸다. '프로노에오'는 '미리 생각하다', '간구하다', '몰두하다'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 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는 '선한 일'에 너희 자신을 몰두하라는 뜻이 된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이는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신자들이 가능한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할 수 있거든'이란 표현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한다(Harrison).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눅 2:14),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골 1:20, 2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이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 작성자 26.03.21 11:47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신자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골 3:15). 그러므로 신자들은 화평케하는 자들이다(마 5:9).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 이에 대해 1절을 보라(1:7;16:5, 9, 12;고전 4:14, 17;고후 7:1;엡 5:1). 이는 1절의 '형제들아'와 비슷한 애정이 담긴 호칭이며, 이런 호칭들이 여러 곳에 나온다(고전 10:14;고후 7:1;빌 2:12).
    진노하심에 맡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테 토폰 테 오르게'(* )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이다. 신약성경에서 '진노'가 수식어 없이 나올 때는 대개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본문에서도 수식어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임이 분명하다(3:5;5:9;9:22;13:5;엡 2:3;살전 5:9).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치나치게 냉혹하지 않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 작성자 26.03.21 11:48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 바울이 자주 그러했듯이 본 구절에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4:7;8:36;9:33;10 :19;11:26). 구약성경의 본문 신 32:35에는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로 되어 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수는 자신의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거짓 신에게까지도 미친다(Harrison).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마 12:18, 요 5:30;9:39;살후 1:5;히 9:27). 예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受辱)과 고난(苦難)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벧전 2:23). 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로 인해 거뒤가심(8:1)을 생각하며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은 포기되어야하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절대적 권위와 확실성을 언급한 것이다.

  • 작성자 26.03.21 11:48

    =====12:20
    본절은 70인역(LXX) 잠 25:21, 22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이는 17절의 진술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서술하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이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요 6:35).
    숯불 - 해석이 다양한데, '숯불'은 '회개의 표'(Klassen), '마음의 불'(Liddon),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Cranfiedl, Hendriksen, Harrison), '은혜', 즉 궁극적으로 은혜를 가져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오는 고통'(Godet)등으로 해석한다.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이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작성자 26.03.21 11:48

    =====12:21
    이는 17절에서부터 계속 진행되어 온 내용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 26.03.21 14:42

    네, 잘 읽었습니다. 묵상 본문과 함께 참고하겠습니다.

  • 26.03.21 17:54

    좋은 설명입니다. 읽고 배웁니다.

  • 26.03.21 15:30

    성경적, 신앙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냉정한 현실에 비추어도 맞는 말씀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 26.03.21 15:38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런 가르침은 많은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에서 가장 강하고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느 종교에서 이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기독교에서 이렇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하게 악을 선으로 이긴 분이셨기 때문이겠죠. 세상에서는, 자연법으로는, 그리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형보복을 가르치고 있죠.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오히려 그를 축복하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갚아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며 좋은지요. 과연 주님은 화평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화평케 하는 것만이 서로를 향한 끝없는 미움과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시는군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셨으니 그것을 믿고 우리는 평안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영적 싸움을 하는 자들이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으로 시간 낭비, 돈 낭비, 인생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본문의 풍부한 경험담들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습니다. 또 최선과 차선에 대한 것, 순결함에는 지혜를 겸비해야 한다는 것도 좋은 팁을 주셨습니다. 잘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6.03.21 16:01

    깊고 풍성한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추가적인 분별을 더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26.03.21 17:57

    @노베 매우 공감합니다^^

  • 26.03.21 17:56

    보여주신 말씀은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가르침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를 넘어, 파괴적인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 26.03.21 20:25

    깊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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