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교철학은 유교철학의 성리학 못지않게 욕망을 주요한 경계 대상으로 간주하여 죄악시하고 위험시하였다. 특히 불교철학에서 깨달음은 욕망의 제거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 다양한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탐구되었다.
불교철학에서는 욕망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갈애(tanhā), 탐욕(rāga), 애욕(kāma), 의욕(chanda) 등이 욕망의 대표적 용어들이다.
갈애는 12연기 사슬의 하나로서 결핍 상태의 욕망이다. 갈애는 결핍을 뜻하지만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다. 탐욕은 삼독(三毒)인 탐(탐욕), 진(노여움), 치(어리석음)의 으뜸으로서 무엇이든지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의 집착이다. 애욕은 좁게는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넓게는 모든 욕망의 출발점으로서 세상 전부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갈애, 탐욕, 애욕은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욕망들이다. 이에 반해 의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욕망이다. 용맹정진 하려는 욕망도, 나쁜 짓을 하려는 욕망도 의욕에 속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이 욕망도 넘어선다.
사성제와 12연기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가 깨친 뒤 처음으로 대중에게 가르친 설법이다. 이 설법은 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다. 그렇기 때문에 <아함경>에서는 사성제와 12연기가 여러 가지 꼴로 숱하게 등장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의 거룩한 가르침으로서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의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고성제란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라는 진리다. 집성제란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의 집착이라는 진리다. 멸성제란 욕망의 집착을 끊어야 괴로움의 바다를 벗어날 수 있다는 진리다. 도성제란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닦아야 한다는 진리다.
석가는 사성제에서 욕망의 집착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진단하여 욕망의 집착을 없애는 수행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욕망의 집착은 결코 쉽사리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다. 석가는 12연기를 통해 욕망의 허망함을 보여줌으로써 욕망의 집착을 없애려고 하였다.
12연기는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갈애)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의 십이지(十二支)로 이루어진 윤회의 사슬이다. 12연기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 따라서 ‘→’는 인과적 조건을 뜻한다.
어리석음과 애착에 의해 고통이 연기되는 과정은 무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성제를 몰라 어리석어서(무명), 여러 맹목적인 의지와 활동이 생겨 업을 짓고(행), 이 업으로 말미암아 앎이 생겨나고(식), 이 앎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의 현상이 생기고(명색), 이 현상으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이 생기고(육입), 이 여섯 감각에 힘입어 대상과 접촉하고(촉), 이 감각이 대상과 접촉하여 여러 느낌이 생기고(수), 이 느낌으로 말미암아 욕망과 애착이 생기며(애), 이 욕망과 애착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생기고(취), 집착함으로써 이 세상의 존재가 생겨나며(유), 이 존재로 말미암아 생명이 있게 되고(생), 살아 있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이 생겨난다(노사).
이런 식으로 중생은 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다. 중생이 12연기를 돌이켜 무명의 제거로부터 출발해서 그 나머지 11지(支)를 인과적으로 소멸시켜 나가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
12연기에 나오는 12지는 마치 갈대가 저 혼자 설 수 없고 다른 두 개의 갈대와 서로 의존해야 설 수 있듯이, 제각기 독자적으로 존립할 수 없고 다른 지와 서로 의존해야 존립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12지는 자성(自性)이 없다.
그런데 12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도 자성이 없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게 아니라 인연에 따라 서로 의존하며 생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덧없고 실체가 없어서 공(空)하다.
욕망은 어떠한가? 갈애(tanhā), 즉 욕망도 심신의 감각 작용과 느낌 등의 인연에 따라 생긴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도 실체가 없고 덧없어서 공하다. 욕망이 그러하다면 욕망의 집착이란 허망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석가는 욕망의 집착을 없애려고 하였다.
석가의 연기 사상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욕망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봄으로써 욕망을 보는 전혀 새롭고도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아함경>에서는 12연기와 같이 욕망을 보는 방법뿐만 아니라 욕망을 가라앉히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도 나오고 있다. 그 방법은 호흡과 명상이다. 석가는 선정에 들어가 들숨과 날숨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명상을 통하여 거친 욕망을 가라앉히는 수행을 권장하였다.
불교의 경전에서 욕망은 종종 타오르는 불에 비유되곤 한다.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도 등장하는 <아함경>의 설법에서 석가는 욕망의 타오르는 불꽃을 꺼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을 권한다. 대승 경전인 <법화경>에 등장하는 화택(불난 집)의 비유에서도 석가는 중생이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기를 간곡하게 기원한다. 화택의 비유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대궐과 같이 크고 재산과 식솔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데 그 집은 매우 컸지만 낡고 썩은데다 대문이 하나뿐이었다.
어느 날 이 집에 큰 불이 났다. 부자는 무사히 빠져나왔지만 그의 아들들은 장난에 정신이 팔려 나올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부자가 뛰어 들어가 아이들을 데려나오기가 너무 위험했으므로 그는 아이들에게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연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아버지의 외침엔 아랑곳없이 뛰어놀기만 하였다.
그러자 그는 아이들이 장난감을 좋아하는 게 생각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대문 밖에 있으니 어서 가져가라고 외쳤다. 그제야 아이들은 불타는 집을 다투어 빠져나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칠보로 꾸민 큰 수레를 나누어 주었다.
화택의 비유에서 욕망은 불로, 이 세상은 불타는 낡고 썩은 큰 집으로, 탐욕에 빠진 중생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뛰노는 철없는 아이들로 비유된다. 그리고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 부처의 설법을 보고 들어서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수행 방법),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 십이연기를 홀로 사유하여 깨달음에 이르려는 수행 방법),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菩薩乘; 자신의 해탈과 중생의 해탈을 동시에 구현해 나가려는 수행 방법), 칠보로 꾸민 큰 수레는 대승의 법화일승(法華一乘; 삼승-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가르침을 방편으로 거두어들이면서도 모든 차별을 뛰어넘고 걸림이 없어 두루 통하는 일승의 대승적 가르침)을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힘과 기운이 넘치지만 힘을 써서 아이들을 구하려 들면 자칫 그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감당할 수도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장난감이라는 방편을 이용해 아이들을 구슬려 불타는 집 밖으로 뛰쳐나오도록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도 중생을 제도할 힘과 지혜가 충만하지만 중생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삼승(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방편을 써서 대승의 일승으로 중생을 인도한다.
이 비유에서 세상은 썩어 문드러지고 더럽고 험악하고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추구하느라 고통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화택의 비유는 욕망의 블랙홀에 빠진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경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꼭 들어맞는 건지도 모른다. 또한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불교의 시각을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보명(普明)의 목우도(牧牛圖)는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와 함께 중국의 송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근세에 들어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심우도가 널리 퍼져, 현재 목우도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보명의 목우도가 불교의 기본 교리를 오히려 더 잘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목우도는 사람이 욕망의 오염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10폭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십우도(十牛圖)로, 점수돈오(漸修頓悟, 욕망의 오염을 점차로 줄여서 단박에 깨달음)의 수행을 보여준다.
보명의 목우도는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겠다. 목우도에서 목동은 나 자신이고 검은 소는 욕망(망념)에 오염된 마음을 상징한다.
미목(未牧, 윗줄 왼쪽에서 첫번째)의 그림에서 검은 소는 목동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이 경지에서 나는 욕망을 전혀 제어하지 못한다.
초조(初調,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그림에서 목동이 소의 코에 고삐를 꿰어 끌어당기고 채찍을 휘두르자 검은 소의 주둥이가 희어졌다. 이 경지에서 나는 용맹정진하며 욕망과 맞서 싸워 욕망의 오염이 조금 줄어든다.
수제(受制, 윗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그림에서 검은 소는 목동의 제재를 받아들이고 머리 부분이 희어졌다. 이 경지에서는 욕망이 어느 정도 제어되어 거친 욕망이 좀 더 수그러든다.
회수(廻首, 윗줄 왼쪽에서 네번째)의 그림에서 검은 소는 목동이 고삐를 잡아끄는 대로 머리를 돌리고 몸통이 조금 희어졌지만, 목동은 소가 언제 날뛸지 안심할 수 없어 고삐를 나무에 매단다. 이 경지에서는 욕망이 상당히 제어되어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순복(馴伏, 윗줄 오른쪽 끝)의 그림에서 소는 고삐와 채찍이 없어도 목동을 따르고, 몸통 뒷부분과 꼬리부분을 제외하고는 온통 희어졌다. 이 경지에서는 욕망의 오염이 거의 사라지고 거친 욕망은 조용히 잠든다.
무애(無碍, 아랫줄 왼쪽에서 첫번째)의 그림에서 목동은 즐겁게 태평가를 부르고 소는 꼬리만 제외하고 온통 희어졌다. 이 경지에서는 욕망의 오염이 거의 사라지고 나와 소는 걸림이 없다.
임운(任運,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그림에서 목동은 푸른 버드나무 아래에서 졸고 있고 소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지만 소의 꼬리는 여전히 검다. 이 경지에서는 마음이 맑고 깨끗해져 선(禪)의 삼매(三昧)에 들어선다.
상망(相忘, 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의 그림에서 꼬리까지 흰 소와 나는 구름 위에서 무심하게 서로 마주본다. 이 경지에서는 욕망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되어 나는 마음조차 잊고 무심(無心)에 들어선다.
독조(獨照, 아랫줄 왼쪽에서 네번째)의 그림에서 소는 사라지고 목동만이 밝은 달빛 아래 혼자 노래 부르고 손뼉을 친다. 이 경지에서는 나와 하나가 될 마음조차 사라져 참된 자기로 돌아온다.
쌍민(雙泯, 아랫줄 오른쪽 끝)의 그림에서는 소도 목동도 다 사라지고 일원상만 남는다. 이 경지는 만상을 있는 그대로 대긍정하는 선(禪)의 최고 경지다.
목동이 채찍과 고삐를 써서 검은 소를 길들여 온순한 흰 소로 만드는 과정은 내가 욕망을 길들이고 욕망의 오염을 덜어내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욕망에 관한 한, 이 목우도는 성리학의 금욕주의와 일맥상통하며 불교의 금욕주의를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목우도의 제멋대로 날뛰는 검은 소와 목동의 채찍은 <파이드로스>의 전차의 신화에 등장하는 못된 검은 말과 마부의 채찍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앞에서 보았다시피, 불교는 욕망을 죄악시하고 위험시하여 부정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금욕주의다. 불교의 기본 교리인 사성제가 그러하고, <법화경>과 보명의 <목우도>도 그러하다. 물론 불교의 발전 과정에서는 욕망과 드잡이하지 않고 욕망의 심연에 뛰어들어 깨달음을 얻으려는 흐름도 있다. 이를테면 선불교가 그러하다.
선불교는 노장사상의 영향 아래 성립된 중국 불교이기 때문에 욕망을 대하는 태도가 인도 불교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당나라의 선사인 영가(永嘉)는 깨달음의 게송에서 “배움 끊은 한가로운 무위의 도인은 / 헛된 생각 끊지 않고 참됨 또한 안 구하니 / 무명의 실제 성품이 곧 바로 불성이요 / 허깨비의 공한 몸이 곧 바로 법신이네”라고 읊었다.
영가의 이런 게송은 욕망을 긍정하려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욕망의 방임을 주장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선사들의 삶이 철저하게 금욕적이었음을 안다면 이 게송은 중생의 욕망에 물든 망상과 고뇌를 통해서 지혜와 깨달음을 구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