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쇼윈도에는 계절이 앞서온다. 가을볕이 가로수 은행잎을 물들이려는 즈음 패션 거리에는 이미 한겨울이 와 있다. 지난해처럼 올해도 코트와 목도리가 광복동 겨울의 입성을 알린다. 하얀 커플 패딩 코트에 빨간 목도리를 늘어뜨린 두 마네킹이 설야를 가린다.
오랜만에 광복동 구경을 나섰다. 세월 따라 만사가 변하기 마련이듯 패션 매장의 마네킹도 달라져 있다. 한때는 사람이 마네킹을 대신하기도 했다. 얼굴에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꼼짝 않은 몸짓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일종의 행위예술로서 주로 대학생이 학비 조달을 위해 마네킹 대역을 했는데 부동의 침묵을 지키는 인내가 인상적이었다. 이제는 은빛 웨이브 긴 머리숱이 사라지고 검고 하얀 밋밋한 마네킹들의 얼굴이 나와 마주한다.
요즘 광복동에 들어서면 야외 조각상들이 사람들을 반긴다. 깔끔하게 보이는 연한 회색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 옆에 멋있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사가 모자를 벗어든 모습이 도시의 우울한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꾼다. 사람의 형상으로 사철 구릿빛 단벌옷을 입은 조형 작품이 옛 광복동 마네킹 모습을 떠올려 준다.
이십여 년 동안 광복동 중심 상권이 있는 ‘S’패션에서 근무했다. 그 시절 유명 메이커디자인 패션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고객에게 신뢰를 주었다. 내가 근무했던 매장은 대기업의 브랜드 가치도 있었지만 감각적인 디자인과 다양한 브랜드로 고객들을 매장으로 끌어들였다. 그 무렵 마네킹의 역할은 매우 컸다. 마네킹의 걸친 옷은 인기를 받게 마련이다. 보기만 하여도 사람들의 심박이 저절로 올라간다. 저 옷을 입었으면 하는 유혹에 홀려 매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네킹 옷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구매 욕구가 남아 다른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마네킹의 침묵과 부동의 주술력 이랄까.
내가 경영했던 의상실의 쇼윈도에는 마네킹이 세 명이 있었다. 두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앉아있는 구도가 마치 현대조각 같았다. 오뚝한 콧날, 풍성한 속눈썹, 그윽한 눈매가 진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그중 앉아있는 마네킹에 남다른 애정이 갔다. 알맞은 어깨 곡선에 시선을 아래로 둔 다소곳한 옆모습이 마치 첫날밤을 기다리는 신부의 자태 같았다. 고객의 첫 시선을 맞이하는 마네킹은 시즌 트렌드의 주자이기도 했다. 정교하게 입히고 몇 가지 가발을 준비하여 옷에 맞게 스타일을 꾸며 아침 행인의 시선을 끌었다.
마네킹이 임무를 보여주는 라인에는, 실은 인간 이상의 소임을 갖추고 있다. 하루종일 꼼짝하지 않아도 짜증 내지 않는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들이면서 완벽한 몸매로 옷을 돋보이게도 해준다. 돌이켜보면 마네킹은 누구보다 나에게 행복과 위로를 안겨준 일등공신이다. 아침마다 앉아있는 마네킹을 보면서 종종 문득 홀로 법당에서 철야 기도를 올리는 여인을 떠올렸다. 한이든 소원이든 드러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 말못할 사연을 갖고 있다. 외로움과 슬픔을 숨기고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사바세계의 고통을 마네킹이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의상실 마네킹이다. 특이한 샘풀 옷을 만들면 제일 먼저 멋지게 시범 삼아 차려입는다. 의자에 앉아 고객의 옷을 디자인할 때는 앉아있는 마네킹이 되고, 서서 업무를 볼 때는 걸어 다니는 마네킹이 된다. 멋진 맵시로 손님의 시선을 끌다 보면 성미 급한 어떤 고객들은 내가 입은 옷을 벗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완전한 마네킹이 되지 못했다. 쇼윈도의 마네킹은 약게 계산을 하지 않고 힘들다고 짜증 내지도 않는다. 쇼윈도의 마네킹은 시폰 잔주름 치마폭을 늘어뜨리고 반가사유상처럼 꼼짝 않고 앉아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동안거와 하안거를 지켜낸다. 고뇌와 번민을 스스로 자각하는 듯한 마네킹을 보면 깊은 산속의 어느 절간 스님이 떠오른다. 그런 마네킹에 비하면 의상실을 경영하는 나는 결국은 돈만을 계산하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인 나는 금전적으로 계산하는 속내를 숨기고 계산이 채워지질 않으면 화가 난다.
요즘에는 쇼윈도가 아닌, 걸어 다니는 마네킹들이 곳곳에 있다. 날씬한 몸매에 멋진 옷을 입은 그녀들은 활기차고 당당하다. 또는 텔레비전을 보며 요즘 대세인 걸그룹이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하나같이 팔등신 마네킹 몸매다. 내가 봐도 사랑스럽고 멋지다. 체질적으로 날씬한 몸매를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너도나도 환상적인 마네킹 몸매에 집착한다. 열심히 운동으로 체중감량을 시도한다. 잘은 모르지만, 귀동냥으로는 간혹 의학적인 힘을 빌려 지방흡입 수술이나, 지방분해 주사도 맞는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이어트 약물 요법으로 마네킹 체형 만들기에 급급하다.
조화를 이룬 완벽한 몸매를 마네킹 몸매라 한다. 예쁘지만 속이 빈 여자를 마네킹 여자라 부르기도 한다. 쇼윈도를 지나가던 남자들이 마네킹을 보면 저런 멋진 아가씨를 짝으로 삼고 싶어 할 것이다. 아가씨들도 완벽한 멋진 몸매에 대한 꿈을 꾸겠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걸음을 먼춘다. 옛 시절 마네킹에 옷을 입히던 내 모습이 패션 매장 진열장에 비친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덩달아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늘씬한 마네킹의 몸매를 훔쳐보는 건지, 걸친 옷의 매력에 빠진 건지 알 수 없지만 두터운, 패딩 옷을 바라보면 가을볕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아쉬움이 느껴질 것이다.
예전에 무심하게 여겼던 것들에 요즘에는 마음이 찡해진다. 눈이 호사를 누리도록 도시 거리가 발전하건만 나는 왜 자꾸 과거 한때를 흘깃거리는 걸까. 나에게 베풀기만 했던 쇼윈도 마네킹이 새삼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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