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8
코로나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어설픈 위드 코로나 실험이 초래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가라앉은 듯싶다가 조금의 틈만 주면 무서운 기세로 다시 창궐하는 코로나 역병은 재난 드라마 속 좀비 떼를 연상시킨다. 거리를 두면 피할 수 있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들에게 물어뜯겨 그 끔찍한 괴물의 일원이 되고 만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좀비 떼보다 두려운 존재는 인간들이다. 법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인성과 규범을 상실한 채 타인들을 약탈하고 살육하는 무리다.
2021년 연말의 한국 사회는 더도 덜도 아닌 이 같은 디스토피아적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코로나 역병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고통과 비용이 상상을 초월하겠지만 우리는 언젠가 이 역병을 이겨낼 것이다. 정말 절망스러운 것은 우리가 인간다움을 상실한 야수 같은 인간들로 돌변하는 상황이다. “설마 그런 일이…” 하지만 초유의 추악한 대선 선거전이 우리 사회를 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야 후보들은 공히 애초에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계획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본인들의 자질 논란에 가족 리스크가 겹쳤다. 그 결과 대선은 진흙탕 선거를 넘어 나와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한 죽기 살기식 각축전이 되고 말았다. 정책 대결이 사라진 가운데, 각 후보 진영은 연일 상대 후보와 그 가족들을 향해 말로 옮기기 민망한 적대적 메시지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희망의 대상은 국민뿐임을 절감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대선의 본질이 정치와 국민의 대결이라는 판단이다. 지지자들을 향한 온갖 사탕발림과 상대에 대한 저주성 공격으로 이 사회를 상식과 규범이 붕괴된 아수라 상태로 끌고 가려는 정치와, 그에 맞서 인간 사회 본연의 가치와 질서를 지켜내려는 국민 간의 대결이 이번 대선의 본질이고 실제 승부처다. 결코 쉽지 않은 대결이지만 국민이 이길 것으로 믿는다.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우리 국민들은 어떠한 존재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가진 자와 없는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시민과 기득권층, 진보와 보수…, 이게 국민의 본질인가?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정치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재단한 국민들의 모습일 뿐이다. 정치집단이 자기들끼리 패거리로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처럼 거친 이분법으로 국민들을 갈라칠 때, 정작 국민 개개인은 귀를 뚫은 남학생,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변호사, 밴드 활동에 열심인 대학병원 전문의, 70대의 멋쟁이 실버 모델로 진화했다.
▲일상이 된 코로나19 검사; 17일 오전 대구 서구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시민들이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뉴시스
필자는 한때 이러한 국민들의 모습이 사회 통합을 약화하는 개인주의의 과잉이 아닐까 걱정했다. 개인적인 행복에 전념함으로써 공정과 민주주의 같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식는 것은 아닐지 우려했다. 어리석은 단견이었다.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섬세한 사회적 균열을 내포한다. 거기서 오는 파격과 변종이 생각을 확장시키며 삶에 다채로움과 활기를 더한다. 다양한 취향, 역사 인식, 정치적 지향이 공존하며 상호 소통한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사회가 통합된다. 또한 외양이나 생활 방식과 무관하게, 일을 잘하고 가족과 공동체에 기여하는지가 그 성원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일차적 기준이 된다. 그에 따라 능력주의와 공정이 한층 강화된다.
이처럼 고도화된 사회의 성원으로 우리 국민들은 성숙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제멋대로이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이기적 존재이며, 휴대폰만 쳐다보는 지하철 승객들처럼 타인들과 사회에 대해 무심한 방관자로 보이지만, 이들의 가슴속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한 민주주의, 사회 통합, 공정의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 털털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경제 및 문화적 성과를 만들어 내는 주역들이다.
이번 대선에서 야당 후보들은 물론 여당 후보조차 정권 교체를 앞세운다.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이보다 잘 입증하는 사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이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선거운동에 앞서, 이전의 정부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은 우리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흔히 재단되는 것보다 얼마나 크고 성숙한 존재인지 깨닫는 것이다. 이들은 무심한 척 모든 걸 지켜본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의 훼손을 좌시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주체들이다.
코로나에 위협받고 정치에 실망하는 우울한 연말, 거리와 지하철은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로 여전히 분주하다. 그 무심한 이들에게 크게 외치고 싶다. 당신들이 희망이라고, 감사하다고, 힘내시라고.
윤석민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