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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보정(保定)군관학교와 함계 양무운동으로 설립된 저명한 세 곳의 군사학교로 평가된다. 전란을 겪으며 그 터가 일지감치 사라져버렸으나 곤명의 강무당은 지금까지 건물과 터가 잘 보전되어 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박물관도 있다. 이곳 출신이 황포군관학교 교원이 되고 이후 중앙군사학교 곤명분교가 된다, 중국 근대화를 위해 만든 이 학교는 결국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그대화의 아이러니를 이룬다, 여기 교관중 일본인이 많았고 조선,월남 학생도 100여명이 넘었던 국제학교이다. 사진 권오철
2024년9월28일은 1909년 음력8월15일 정식개교한 운남강무당학교의 개교 115주년이 되는 날이다. 중국 운남성 성도 쿤밍(昆明),그 중심부에 자리잡은 추이후(翆湖)공원 호숫가,한 변이110미터이고 너비가10미터인 긴 건물이 정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중국 전통양식의 사합원(四合院)건물,이 곳이 바로 그 유명한‘운남육군강무당학교’이다.사합원이란 ㅁ 자 형태의 중국 고유의 거주 공간이다.이 학교 건물은 중국의 사합원 건물중에서 최대 규모로 알려지고 있다.
이 학교는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음은 물론,우리 민족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곳이다.
중국 운남성은 옛 부터 소수 민족의 땅이었으며,동남아 여러나라와 국경을 맞닿아 있는 중국의 변방지대이다.징기스칸의 손자 원세조 쿠빌라이 칸이 백족(白族)의 대리국(大理國)을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그 후 원나라는 그 지배 중심지로서 현재의 쿤밍(昆明)을 건설하고 현재에 이르기 까지 운남성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초대교장 이근원(李根源 1879-1965) 초대교장, 중앙은 무창의기 승리후 만든 18星旗 중학생이 디자인. 무창의기는 1911년 반청개혁운동, 오른 쪽은 운남성 군벌 당계요 그는 한국애서 독립운동 대통령장(1968년)받았다. 신규식 선생과 우정들으로 많은 한국출신들을 입교시켰다. 사진 권오철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의해 중국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특히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와1904년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전월철도(쿤밍 하노이간 철로)가 완성되니,청(淸)나라 정부는 근대적 군대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천진,봉천에 이어3번째로 설립한 군사학교이다.1908년8월15일개교하여4개 병과(보.기,포,공병)와3개 반(갑,을,병)으로 시작하여, 1945년 폐교 할 때 까지1만명의 졸업생을 배출 하였는 데,이 중 수 명의 원수, 40여명의 상장, 70여명의 중장, 100여명의 소장이 포함 되있으며,특히 중국10원수 중1위 주떠(朱德),10위 예졘잉(葉劍英)와 주빠이떠(朱培德)장군,양지에(楊杰)사령관, 88여단의 단장으로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주빠오중(周保中)장군등이 있으며,특이 한 것은 중국,조선,대한.월남의 국방장관4명(中섭검영,北최용건,南이범석,越무원갑-보구엔지아)을 배출 했다는 것이다.이 외에 이 학교의 교장급이 었던 차이어(蔡鍔),리껀웬(李根源),탕지요(唐繼堯),롱윈(龍雲),로한(盧漢)등은 초창기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이 학교를 운영하였다.당시 변방을 튼튼히 하고 근대적 군사 간부 양성을 위하여 유학을 보낸 청나라 조정은 이들에 의해 아이러니 하게도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일본 무사도 정신에 의해 교육을 하였고 이들은 이미 일본에서 혁명 지도자 손문이 조직한 동맹회 회원이 되어 근대적 민주의식에 눈 떠가고 있었던 것이다.그 훈련 강도는 매우 강하고 엄정하여 생도들 변소 앞에 대나무 기둥이 있어서 그걸 잡고 서야 겨우 볼 일을 보고 일어 날 정도로 힘든 과정이 었다고 한다,
교육 책임자 이근원은 전월전철도 개통식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오만함과 중국 민중의 고통을 보고‘견인각고(堅忍刻苦)’라는 네 글자를 학교 교훈으로 삼았고, 1911년 신해혁명 무창(武昌)봉기가 발발하자 이내 의기(음력9.9)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 하였고,후에1915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칭제하여 봉건으로 돌아가려하자 그 꺼져가는 혁명의 불길을 살려‘호국전쟁(護國)’의 시발도 채악,당계요등이 주도하고 이 때 운남성 남부 몽자(蒙自)에 주둔하던 주덕의 부대가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 이범석 국방정관 북한 촤용건 국방상 월남 무원갑 국방상 중국 섭검영 국방부장
여기서 1920년 경11기 부터17기 까지는 중국인 외에 조선,월남,대만등지의 학생도 받아들인바,이중 조선인 졸업생은30여명이라고 하지만 실제 50여명이 넘는 다고 한다.이유는 일본인 교관도 많아서 그들과의 관계도 있었고 심지어 초창기에는 운남성 출신 만 인정 하여서,주덕도 운남성 몽자현 사람이라고 하고 철기 이범석은 화교라고 하여 입교하였다.
본 기자가 수 년간 곤명에 거주 하면서 운남강무당학교를 주목한 것은,이 조선인들 중15기로 기병과 수석 졸업생으로 이범석(1900-1972,초대 국무총리)이 있고,광복군 지대장 노태준선생,제1지대장이며 국군 중장 까지 지낸 이웅(이준식)장군등이 있고,청산리 대첩의 영웅인 동시에 홍군1군단 참모장 양림(楊林,본명 김훈1898-1936)은 이 학교의 수석 졸업자이기도 하고,대장정중 중요한 황하 도하 작전을 수행하고 전사하였는데,이로 인해 중공 지도부의 대부분이 생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모택동은 탄식하여 말하기를"중국의 저 찬란한 오성홍기 위에는 조선혁명열사의 선혈이 물들어 있다"(中華人民共和國燦爛的五星紅旗上,染有朝鮮革命烈士的鮮血)’라고 까지 말한바 있다. 이 1군단 단장은 임표(林彪,1907-1971)이고 정치위원 섭영진(聂荣臻,1899-1992)인데2명이 전부10원수 이다.만일 양림이 중국인이 었다면 당연히 홍군 22군단 참모장 장세걸과 함께10원수에 들었을 지도 모른다.
1940년대 운남에서 장준하,김준엽 양림(부인 추악)의 희생으로 중공지도부 생존 최초 비행사 권기옥 당계요 동상밑의 장준하와 美OSS대원, 운남은 국민당 군에 끝까지 있던 곳이고. 이 당계요 동상을 찾아 본기자는 그의 고향 후이쩌(會澤)까지 500km를 가서 알아넨것은 일부 동상의 잔해, 당계요는 공산당 반대라 해서 동상파괴 그런데 알고보니 문화혁명때 고철 수집용 으로 처리. 사진 바이두
또한1920년대‘운남항공학교’가 개교하자1기로 한국 여류 비행사1호 이며,공군의 어머니라 불리는 권기옥(1901-1988)여사가 입교하여 같이 입교한 조선인3인과 함께 졸업하여 한국 공군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인 입교에 있어서는 임시정부 외무총장 신규식 선생의 역할이 매우 컷고 당시 신규식(1879-1922)은 광동정부의 손문 선생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 였고,실제 자신이 재산을 정리하여 가지고 온 예산의 절반을 손문의 혁명 세력에 투입하였다.당시 운남 성장 이며 최대 실력자 탕지요(唐繼堯1883 -1927)를 광조우(廣州)에서 만나서 조선청년의 강무당학교 입학을 성사 시켰으며,이 때 임정 재무총장 민필호(1898-1963)선생도 신규식 선생(민필호의 장인)을 보필 하여 광조우를 드나 들었다.여기서 사상계 발행인으로 유명 한 장준하(1918-1975)선생도1940년대 서주에서 일본군 학병을 탈출하여 중경 임정을 찾아갔고, 여기서 또 학병1호 탈출자 김준엽(1920-2011.전 고대총장,민필호의 사위)을 만나서 미군OSS첩보 교육을 받고 운남성 곤명에 잠시 있었던 적이 있다.
당시 대포, 중국 포술의 명인이 바로 조선인 방호산, 6.25때 가장 빨리 호남 점령자, 운남 강무당 학교 교가 설명하는 기자, '풍파가 몰아치는 모양/꿈에서 깬 듯한 노란 사자/동포 4억명아/서로 궐기하여 만리장성을 쌓아라.신이 내린 이 땅. 위대한 사내들이여! / 손을 맞잡고 종군하자 / 단결력으로....중화남아.. 사진 권오철
여기서 민족의 고난과 그 극복을 위한 선열의 행적을 정리하여,우리 민족의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계기로 삼자는 데 그 운남강무당학교가 상당한 역할을 하리라는 믿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2013
게다가 이 학교 졸업생 중에서 보구엔지압(武元甲1911-2013)장군은 비엣남(越南)에서 호치민(胡志明) 다음으로 존경 받는 상승 장군이며,월남전을 통하여 한국과는 미묘한 감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외에도 얼킨 이야기는 많다. 1970년대 최용건(1900-1976)북조선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국회의장)으로 곤명에 왔을 때 홍위병이 파괴하려는 당계요의 묘를 보호 해준 것이나,소련88여단장 주보중(1902-1964)이 부하 김일성(1912-1994)을 소련군으로부터 보호 해 준 주고 그 후 김일성이 수상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 했을 때, 병상의 주보중을 위로 하는 것과,주보중이 북한을 방문시 기념 사진에는 김정일(1942-2011)의 어린 모습도 보인다.
아울러 우리 인식 속에 개량주의자로 남아 있는 도산 안창호(1878-1938)선생도1920-30년 당시 항공대 건립을 위해 노력 하였고,신규식 선생과 논의 하여 조선인 학생의 군사훈련 문제를 논의 한 흔적이 중국 측 자료에도나타난다.
특히 윤봉길 의거에는 직접 관련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도산 선생의 비서였던100세 청년 항산 구익균선생(1906-2013) 도산혁명 사상 연구소 이사장)과의 만남에서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운남 대리국의 후예 백족 주보중, 대리국은 독립국이나 몽골에 망하고 明이 이어 받았다. 한국인과 스타일이 비슷하다. 운남 대리시에 있는 조보중고향의 기념관에 이 1954년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의 상관이자 동료인 주보중 부부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찍은 사진이 많았다. 왼쪽은 김일성,, 주보중 부인 왕일지, 김일성 부인 김성애, 주보중, 앞은 주보중 딸 주위와 김정일 사진 네이버, 사진 권오철
그리고1927년12월11일 공산당의‘광조우폭동(廣州起義)’에서도 김산,김성숙등 상당수 조선인이 참가 하였고, 최용건을 비롯 하여황포군관학교 재학생을 포함한 조선 전사150여명이 최후 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산화한 사실도 있고,실제 이외에도 홍군22군 참모장 장세걸 장군,인민해방군가 작곡자 정률성(1918-1933),위대한 혁명시인 신정(1888-1922)선생,중국 혁명의 풍운아 김산(1905-1938장지락)등을 놓고 볼 때도 소위 신중국 건설에 있어 조선인의 역할은 심히 크다고 하겠다.장세걸 장군의 22군단장은10원수의 한 사람인 천의(陳毅,1901-1972)였다.
현재 이 강무당 학교는 보호문물로 되어 있고 일부분 기념관으로 전시물이 좀 있기는 하지만 조잡한 수준이고,여기는 조선인에 대한 언급은 50명이 교육 받았다는 사실만 작게 표시 되어 있을 뿐이다.호남성 장사,광서장족자치구 유주 같은 곳은 기실 임정이 잠시 스쳐 갔을 뿐인데도 중국정부가 부담하여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한국인 관광객을 불러 들이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이 운남육군강무당학교는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부디 남과 북 그리고 재외동포들을 포함한 '우리민족'이 다 함께 공감하고 단합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마당이 되고.한(남,북)중월3국의 주요한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념실을 건물 내부에 설치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망국의 시기에 광복의 韓流는 대륙의 남쪽에서 그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글 권오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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