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당에서 제사를 준비하던 어른들이 볏짚에 재를 묻혀 몇 시간 동안 놋그릇에 광을 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세제로 쉽게 닦을
수 있으니 그 시절 그 일이 대단한 노동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팔목의 시큰거림도 참아가며 조상을 모실 생각에 정성을 들였던 그때 어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기억 저편에서 놋그릇들은 멍석 위에서 햇빛에 반짝이며 나를 손짓한다. 사람의 손길을 유난히 필요로 했던 놋그릇들은,
그 옛날 나에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녹슨 그릇을 닦아야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못마땅했지만 금속의 물질을 가득 안고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면 음식을 담고 싶은 욕구가 전혀 들지 않았다. 따뜻한 색깔과 달리 식욕을 억제하는 차가운 그릇, 그 자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추억 속의 그릇 이미지만 남아 있을 줄 알았던 그 놋그릇이 어느 날부터 나에게 매력적인 물건으로 다가왔다. 특별한 날 가족을 위해
임금님의 수라상처럼 상차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반찬 솜씨 없는 나의 단점을 그 금빛 그릇에 담아 상쇄시키고도 싶었다. 정보를
알아본다고 인터넷을 열심히 들락거렸다. 마침 중고거래 사이트에 놋그릇이 구입가보다 오십 퍼센트 저렴하게 나와 있었다. 난 주저함 없이 구입의사를
밝히고 집으로 배송될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포장된 놋그릇이 집에 도착되었지만 몇 겹으로 포장된 탓에 한참 만에 겨우 풀어서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속에 나와 있던 색깔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금빛을 품은 그릇들을 보자 빨리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담고 색색의 반찬들을 요리하고 싶었다. 나는 구입을 잘했다는 생각으로 그릇을 만지고 또 만졌다. 그런데 놋그릇 주인이 안성유기라고 했던 말과
달리 그릇밑면에는 상호가 아예 없었다. 석연치 않아 문의를 하려다 빛나는 색깔이 맘에 들어 더 이상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을 접었다.
몇 가지 유의사항을 숙지한 후 아이의 생일상을 준비하는 내내 요리가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나는 그것을 금그릇으로 격상시키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담았으며 씻을 때도 소중히 다뤘다. 음식의 맛이 미각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아 기뻤지만 가족을 대접한다는 기분이 더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사기 그릇 도자기 그릇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신선함이 가을바람을 타고 닫힌 감각을 두드렸다. 이미 나의 손을 수백 번 거쳤던 그릇들은
이제 그릇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금그릇들은 물에 오래 담가두지도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깨끗이 씻고 곧장 물기를 닦았다. 다른 그릇들은
하루 종일 설거지통에서 빠끔거리며 주인의 손길을 기다려도 등한시하곤 했는데 이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분명 달랐다. 옛날에 애지중지했던 그릇들은
한두 개 깨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했다. 그릇들은 감탄고토 당한 배신감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금그릇 사랑에 푹 빠져, 없던 에너지들이 막 샘솟았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음식들도 일부러 해서 그릇에 담기를 즐겼다. 한 번은
눈길에 발목이 잡힌 지인이 갑자기 집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빛나는 그릇으로 첫손님을 대접했다. 얼굴이 목련꽃처럼 화사해지며 맛없는 음식도
남김없이 비웠다. 정말 이 그릇의 위력은 컸다. 그때 그 사람은 눈 오는 날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우리 집에서 한 식사였다는 말을 하곤 한다.
금그릇을 숭배하며 상차림에 신바람이 나 있을 때 종갓집 몇 대 며느리라는 사람이 놋그릇으로 가족 상차림을 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방영되고 있었다. 우리 집에 있는 놋그릇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종류도 많고 그릇수도 많았다. 나에겐 고작 큰 접시 2개 찬기6개 밥그릇세트
4개 물컵 2개인데 지금껏 보지도 못했던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선로와 탕 그릇 넓적한 접시 수저 크고 작은 찬기들이
모두 정갈하게 보였다.
내가 산 이 그릇 가격도 만만찮았는데 저 정도를 다 갖춘다면 얼마를 더 소비해야 할까 갑자기 몇 개만 있는 우리 집 그릇들이
불구처럼 느껴졌다. 세트 상차림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남의 것과 비교를 한 후 생기는 이런 기분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에너지원을 슬며시 무너뜨린다. 사실 그동안 몇 개의 찬기에 음식을 담기에는 부족할 때가 있어, 온전히 놋그릇만으로는 상차림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잡그릇들이 몇 개씩 섞이곤 했다. 재질과 색상 면에서 톡톡 튀어 다른 그릇과는 도저히 조화롭지가 않았다. 다른 도자기
그릇들은 모양과 색깔이 달라도 서로 어우러져 상차림이 무난했지만 금그릇은 다른 것과 섞이니 서로가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이 있는 것에 만족하고 뿌듯했는데 온통 놋그릇으로 차려진 상을 본 다음에는 여지없이 처음의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놋그릇의 수명만큼 그릇에 대한 애착이 오래 가리라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식어버렸다. 금속 그릇만큼이나 나의 욕망이 불타올랐다
빠르게 식고 있다.
기사입력: 2016/10/05 [15:44] 최종편집: ⓒ 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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