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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봄내 이야기
춘천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춘천에 얼굴을 디민 그 이튿날로 부터 시작된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되던 해였으니 내가 열 살이었던가 보다. 진달래가 망울을 터트리기에도 아직은 너무 이른 봄이었다. 도시로 이사 나가는 내게 와 닿는 친구들의 부러운 눈길에 조금은 으쓱하여, 그러나 더 많이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외할머니 품 속 같은 시골마을을 떠났다. 산(팔봉산) 넘고 물(홍천강) 건너 또 한참을 걸어야만 도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그 산골 마을을 떠나 시골얼뜨기 꼬마가 그 산골마을보다 백배쯤 커보여 거대한 괴물과 같이 보였던 춘천과 첫 상면을 한 것이었다. 효자 1동 언덕배기 그 집에서 어떻게 첫 밤을 보냈는지에 대해선 이상하게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가 않다. 이튿날, 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작은오빠와 함께 봉의국민학교에 갔다. 주거지역이 외곽으로 옮겨져 지금이야 그 규모가 작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봉의 초등학교는 시내중심지에 있던 춘천, 중앙국민학교와 함께 춘천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학교였다. 전교생이 2백 명이 안 되던 작디작은 시골학교에서 하루아침에 한 학년의 학생 수가 시골학교 전교생의 서너 배나 되는 큰 학교에 던져졌으니 나는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죽게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있는 대로 주눅이 들어 첫날을 보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고 어깨가 축 쳐져 교문을 나섰을 게다. 육교(지금은 없어져 버렸다)를 건너 그때 있던 한일연탄공장 쪽으로 내려와 아침에 내가 나왔던 골목을 찾았다. 아뿔싸, 고만고만한 골목이 있는데 어느 것이 내가 나왔던 곳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워낙이 덜렁거리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날 아침이야 처음 가는 학교에 대한 생각으로 어린 내 머릿속이 꽉 차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잠시 막막했다. 골목골목을 탐험해 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파출소를 찾아볼 재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볼 심산도 아니었다. 사실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보다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얼뜨기 내 자신에게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혹여 그런 나를 누군가가 알아볼까 외려 그게 두려웠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작은오빠 생각이 났다. 6학년인 작은 오빠는 늦게 수업이 끝날 테니 교문을 살피다보면 오빠가 나올 테고 그때 슬그머니 오빠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났다. 혹시 놓치기라도 할까 교문에 못 박아 둔 눈에서 쥐가 날 지경이 되어서야 오빠가 보였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지금까지 그때 육학년이지만 키가 훤칠하니 크고 잘 생겼던 오빠가 횡단보도를 휙 건너던 모습이 사진 찍어 논 듯 선명하고 아름답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부끄러운 기억하나 남기고 난 춘천 사람이 되었다.
나의 첫 번째 춘천 탈출은 불발로 끝이 났다.
집안사정이 넉넉했던 것도, 학력고사 점수가 그리 고득점이었던 것도 아니었는데도 나는 서울로 학교를 가야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행동이었고 그때 떨어져 외려 잘되었다란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내게 닥친 불운에 대해 때(時 )탓을 해가며 패배자로서의 방황을 꽤 오래도록 했었다. 그때 첫 번째 춘천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가게 되었다면 나는,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려졌을까 종종 상상을 해보는데 생각은 늘 ‘별로’였을 거라는데 닿고 만다. 두 번째 춘천 탈출에 성공해 서울에 살았던 일년 남짓의 시간이 나를 많이 피폐하게 만들었고 결국 스스로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춘천으로 되돌아 왔던 걸 보면 말이다. 지금이야 그때가 내게는 꽃다운 나이, ‘청춘’이었고 어느 때 보다 눈부신 시절이었구나 생각되지만 정작 나는 그 눈부심을 그때는 볼 수가 없었다. 하긴 누군들 그때가 눈부신 시절임을 알고 그 시절을 보낼까 마는 말이다. 포기하듯 나는 춘천에 있는 후기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발을 딛고 서있는 것 같아 나는 그곳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결석을 밥 먹듯 했고 작은 방구석에 상처 난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몇날며칠을 두문불출하다가는 뛰쳐나가 공지천변을 헤메고 다니곤 했었다.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 돈 낭비까지는 안한 셈이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최류탄 가스 냄새에 눈물, 콧물 쏟고 다녀야 하는 일이 많았던 시대적 상황까지 맞물려 나는 뭔지 모르게 불만족스럽고 불안정한, 그리고 막막하고 음울한 상태로 나의 눈부신 시절, 20대 초반의 시간을 낭비하며 보냈다.
두 번째 춘천 탈출은 1988년 늦가을이었던가 보다. 대학 졸업 후 전공과는 무관한 직장생활을 대학에서 하고 있던 나는 가끔씩 도지는 전공에 대한 열망을 끝내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가 잡혀가던 대학에서의 직장생활을 접고 나는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앉게 되었다. 서울로 말이다. 나의 서울 생활은 그러나, 그리 녹록치가 않았다. 부모님들은 말만한 나를 홀로 둘 수 없어 친척 할머니 댁에 기거케 하셨다. 젊은 날 혼자되어 자식 셋을 길러 내보낸 할머니 댁에서의 생활이 우선은 힘이 들었다. 청상이 되어 홀로 살아 온 세월의 그 절절한 사연을 내게 다 풀어 놓으시기라도 할 듯 할머니는 퇴근한 나를 붙잡고 끝없이 이야기를 하셨다. 좋은 얘기도 서나날이면 신물이 날 텐데 할머니의 이야기를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들어 드리고 상대를 해야 하는 일은 스물여섯 내겐 너무 지루하고 벅찬 일이었다. 또한 신월동에서 대림동까지 춘천에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콩나물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것이 여간 고되고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퇴근 때가 되면 그 콩나물버스에 몸을 싣고 또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실이 정말 끔찍해졌다. 늦가을 이었고 스산해진 거리보다 마음은 백배쯤 더 스산해져 나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시의 무수한 불빛 속 어디도 돌아 갈 곳이 없는 미아처럼 느껴져 몸서리를 쳤다. 두 달을 그렇게 할머니 댁에 있다가 나는 대림동 병원근처 2층집에 작은 방 하나 얻어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장에 진을 다 뺐던 탓인지 나의 서울 생활은 여전히 신명이 나주질 않았다. 늘 춘천이 그리웠고 어머니 품 속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말이면 병원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나는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 냄새를 맡고 와야 다시 한 주를 살아낼 수 있을 거 같아 피곤하지만 기를 쓰고 춘천으로 갔다. 청량리역에서 경춘선열차를 타고 간이역들을 지나 대성리쯤 이르게 되면 북한강 물줄기가 눈에 들어왔고 그러면 어느새 마음속 긴장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누구도 기억은 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 가장 안전하고 평안했던 시간은 엄마의 자궁, 양수 속에서 떠다니던 때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물을 주제로 하는 음악이 마음의 상처치유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평안함을 준단다. 어디선가 귀동냥을 얻어 듣고는 정말 그럴듯해서 그 당시 정신과 병동 환자들에게 어줍잖게 물을 주제로 한 음악을 많이 들려 주었었다. 실상 그들에게 그것이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게는 늘 위안이 되었다. 음악은 내게 북한강 줄기를, 의암호를, 공지천을, 소양강변을, 춘천댐을.... 늘 물이 넘실되는 물의 도시 춘천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내 마음은 호수 속에 잠기듯 고요하고 평안해졌다. 서울 남자가 연애를 하자고 쫒아 다니기도 했지만 나는 무조건 춘천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곁눈도 주지 않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고 나는 춘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춘천 꽃 개나리가 도시를 온통 노란 물 들이던 1990년 봄이었다. 이전처럼 길바닥에 코 빠트리고 다니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깨 펴고 당당하게 힘차고 큰 걸음으로 봄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1989년 여름, 어느 일요일이던가 보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 춘천에 가지 못하고 자취방에서 끙끙거리며 앓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나처럼 춘천 탈출이 불발로 끝나자 춘천에서 나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춘천 남자였다. 꼼짝 못한다는 나를 그는 애걸 반, 설득 반으로 나오게 만들어 어떤 모임에 데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한국에서의 방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전에 가뭄에 콩 나듯 하던 그와의 편지질이 춘천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1991년 여름방학에 그는 다시 한국에 나왔고 나는 번개 불에 콩 볶아먹듯 그와 결혼이 란걸 치르고 이틀 뒤 춘천을 떠났다. 이번엔 오고 싶어도 쉬이 올 수도 없는 바다를 건넜다. 매디슨(Madison, Wisconsin)과 춘천은 닮은 데가 너무 많아 더 춘천이 그립던 시절이었다. 주변에 널려있는 호숫가를 걸으며 나는 춘천의 그 물을 생각했다. 안개 자욱한 도시 속에서 나는 자꾸자꾸 춘천을 점령한 그 두꺼운 안개를 떠올렸다. 그대로 미국사람이 되려는 가 했었는데 사는 건 언제나,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일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그 예기치 않은 일이란 게 우리에게 생겼고 나는 다시 춘천으로 돌아왔다. 둘이 떠나 넷이 되어. 2005년 9월, 14년만의 귀국이었다.
춘천에 돌아와 나는 참 행복했다.
변한 것들 속에서 제 예전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들을 춘천 구석구석에서 찾아 낼 때 마다 나는 오랜 동무를 다시 찾은 듯 감격스럽고 반가웠다. 도청 밑 플라타너스 거리와, 명동에서 공지천, 그리고 어린이회관에 이르는 길, 문을 닫은 육림극장을 지나 운교동 사거리와 팔호 광장에 이르는 거리, 한림대학에서 춘천여고를 지나 향교에 이르는 골목길들....무수한 길과 골목을 걸으며 툭툭 튀어 나오는 추억과 그 추억 속에서 반가운 낮 빛을 하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던지. 중앙시장을 지나 약사리 고개를 넘어 찾아 들어간 그 골목길에서 예전에 내개 살던 그 옛집과 맞닥뜨렸을 때는 또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하나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좁은 춘천의 거리에서 또 어느 날은 추억속의 얼굴을 우연히 만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나를 설레게 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지금이야 사정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주말이나 피서철 등이면 춘천 가는 길이 꽉꽉 막혀버렸다. 잘못 길을 나섰다간 원래 춘천 가는 서너 배쯤의 시간을 고스란히 길에서 버려야 했다. 수도권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앰티나 동아리 모임 등으로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실어보지 않았을까. 계획적이든 그렇지 않든 청량리역에서 춘천 가는 열차를 타고 춘천에 와서 춘천의 아름다운 배경에 빠져 연분홍빛 꽃 사연하나 만들고 간 연인들 또한 꽤 많으리라. 많은 사람들에게 춘천은 ‘물이 흐르는 낭만의 도시’ 로, 가 본 사람들에겐 또 한 번,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도시로 기억될 것이다.
춘천은 아름답다.
내게 춘천은 대한민국, 아니 세계 어느 아름다운 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다. 내 살아온 나날들 속에 점점이 남겨진 추억들은 언제나 춘천을 배경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 배경 속에서 나는 춘천의 봄처럼 정겹고 따스하고 어여쁜, 여름처럼 뜨겁거나 습한, 가을처럼 깊고 그윽하거나 안타까운, 겨울처럼 매섭거나 혹독하고 혹은 처연한 풍경으로 스며들어 있다. 배경으로서의 춘천이 빠진다면 내 추억들은 얼마나 건조할까. 한 점 풍경으로 깃들여진 나는 춘천으로부터 떼어 생각되어질 수 없는 완전한 일부가 되어있는 듯 느껴진다.
나는 곧, 다시 춘천을 떠난다.
새로 만나게 되는 도시에서의 내 삶이 어떨 건가에 상관없이 나는 또 춘천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 다시 춘천으로 돌아올 것이다. 춘천의 하늘과 산, 거리와 골목길,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춘천을 춘천답게 하는 물과 안개와 즐거운 해후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오후 내, 거실 깊숙이 들여 놓았던 제 빛을 거둬들이고 창백해져 가는 해가 거실 창 오른편으로 보이는 삼악산 자락에 만들어 논 붉디붉은 저녁노을을 고즈넉이 바라보고 있다. 돌아와 이 자리에서 저 노을을 다시 볼 때까지 아무래도 나는 내 마음 한 자락도 이곳에 두고 가야 할 성 싶다. 내가 일부가 되어 있는 영원한 내 마음의 고향 춘천에.
첫댓글 춘천을 떠날 준비를 다시 하면서, 무엇보다 일년간 정들었던 문창반과 헤어지는게 못내 아쉽기만 하네요. 카페를 통해 만나 뵐 수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습니다. 떠날 준비를 하며 그간 춘천에 살던 나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써보앗습니다. 각각 다른 스토리가 서너개 들어있어 축약하려고 했는데도 많이 길어져 읽으시면서 지루하시진 않을까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마음따뜻한 시간 누리시기를...
사월님의 [봄내사랑] 열기가 글속에 너무도 물씬물씬 풍겨서 한번 글속에 [춘천,봄내]라는 글자가 몇개나 될까 하고 세어 보니 어이쿠! 무려 50개나 되는군요[춘천댐, 춘천여고등등은 물론 뺐답니다] 그 마음속의 영원한 고향을 다시 떠나시는 님의 감회와 상념에 잠시 곁을 나란히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곳에 가셔서도 항상 건강하시고 가족들과 더불어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 진실하고 절절한 사연은 길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군요.
그 마음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래도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이 있으니 떠날만 한거 같습니다. 졸작을 읽어주셔서 도한 감사합니다^^ 낼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고향은 어머니 품속 같이 늘 그리운 곳 입니다. 아이들이 성장을 한 후 노후 생활은 또 춘천에서 해야지요. 마음을 열고 늘 기다리겠습니다.
늘 느끼는 건데... 제가 참 좋은 곳에 살고있다란 겁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일단은 이년 계획으로 나갑니다. 돌아와서도 뵙겠지만 카페에선 종종 뵙겠습니다. 늘 수고가 많으셔요. 감사합니다.^^
박문우님을 보니 나를 보는것 같아 서글퍼 지네요. 나 역시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먼 발치서 바라보는 신세입니다. 허나 고향은 역시 고향 이데요. 문득 문득 생각나고 가고싶어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춘주수필 회원으로, 등산모임도 열심이 참석하지요. 어디를 가시던 어디에 있던 고향을 잊지 마세요.
애고~~ 죄송합니다. 후에라도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실 수 있길 바래드릴께요^^ 고맙습니다.
지금 쯤은 엊그제 안마산 정상에서 보인 춘천을 보시겠네요 -. 벌써 새해가 모레입니다.
가내 두루 건강하시고요? HAPPY NEW YEAR!
네..온가족 건강히 잘있습니다. 이역만리 바다건너 나라에 와서... 선생님께서도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