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의 동편에 무등산이 솟아있는데 장성이나 담양 화순 그리고 곡성 등에서도 바라보인다. 즉 무등산은 100여리 떨어진 사방에서 바라보아도 보일 만큼 높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어머니 젖무덤처럼 어디서 바라보아도 둥그렇게 보인다. 무등산의 없을 무 자는 어머니 모 자와 통하여 쓰는 글자이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어머니 마음처럼 차별이 없는 평등의 사랑을 뜻하는 이름이 무등산이다.
무등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화순이 나오는데 1천여 개의 지석묘가 흩어져 있는 고인돌 유적지와 1천여 불상이 흩어져 있는 운주사의 사이에 화순군 도암면이 있다.
화순이라는 말은 주역에 나오는 데 사람들이 화합하고 천도(하늘의 도)와 천리(하늘의 이치)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화순에 가면 땅의 이름처럼 기후도 온화하고 산천도 유순하여 만물이 풍족하고 인심도 화목하고 풍습도 도리에 밝아 늘 하늘을 섬기고 따르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의 기운이 흐르는 것 같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유적지를 보아도 그렇고 운주사의 뜰에 널린 불상들과 알 수 없는 여러 유적들을 보아도 그렇고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산과 천태산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이곳 화순의 도암에서 맨발의 성자로 이름난 이현필이 태어난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이현필은 1913년 2월 3일(음력1912년 12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권동부락(용하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이승로와 어머니 김오산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다. 여섯 살 무렵 동네 서당에서 학어집 추구 명심보감 등 한문을 배웠다. 집안일을 돕다가 열 살 무렵에 천태의숙이라는 사립학교가 문을 열어 입학했다가 나중에 공립학교로 전환 되었으나 졸업은 하지 모하고 5학년 2학기에 그만 두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학교에 학비를 납부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공립학교로 전환되면서 교장은 일본인이었다. 그래도 이현필의 기억에 그 일본인 교장은 교육적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려 했던 좋은 인상으로 남았던 것이다. 이현필은 공부를 잘했기에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소학교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된다는 현실 속에서 깊은 실의에 빠졌지만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학업을 계속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소학교 5학년 2학기 도중에 집안의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주점을 차린 형님과 집안일을 돕다가 이내 어머니와 함께 나주로 이사를 하였다. 이현필이 아버지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현필의 부친이 논밭을 팔아서 그 돈으로 보성에 가서 투자를 했다가 모두 날려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이유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아버지와 친밀했던 개인적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일반적인 아버지들처럼 이현필의 부친도 유교적인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녀들에 대해 무심한 척 하거나 방임적 태도를 지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에 비하여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틋한 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녀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자식을 위해 말할 수 없이 고생하시는 노모를 모시고 돌보려면 결혼을 해야 되지 않을까 염려할 만큼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극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