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간 / 백현
우리 시아버지는 영암 장암리에서 태어나서 그 동네에서 일흔 살까지 사셨다. 농업진흥원에 다녔는데, 공무원으로서 야망은 전혀 없었다. 승진하면 영암을 떠나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가야 했는데, 그게 싫어서 진급을 안 했단다. 부지런하고 일 욕심 많은 어머니가 농사일을 맡아, 맨몸으로 분가한 살림을 일으켰다. 추수철 아니면 돈이 메마른 그 시절 농촌에서 공무원으로 받는 월급이 있어서 그나마 살 만했단다. 학교 보내는 아이들 때문에 돈이 급한 동네 사람에게도 잘 꾸어 줘서 인심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아버지는 고지식한 면이 있는 옛날 사람이다. 그런데도 며느리인 나를 아들의 아내, 손주의 엄마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도 봐주는 그런 분이다. 그리고 며느리라고 딸과 구별하신 적도 없었다. 내가 교육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교사로서 여러 가지 활동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단다. 말이 없는 분이라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알게 된 사실이다.
정정하고 단정한 아버지에게도 세월은 비껴가지 않아서 가슴 아픈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늘 기다리던 모임이 있었다. 예전에 영암 살았던 지인들이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 진월동에 있는 추어탕집에서 만나 밥 한 끼를 같이하며 안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몇 년 전에 그 모임에 가셨는데, 식당을 못 찾아서 그냥 돌아온 일이다. 15년이나 다닌 그 식당을 한 시간이 넘도록 헤매도 찾을 수 없었단다. 또 그즈음에 가끔 놀러 가는 안보 회관에 가려고 나갔다가 그냥 왔단다. 암만 생각해도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모르겠더란다.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순간이 생각난다. 이미 연세가 여든을 훌쩍 넘겼으니 치매가 아니라도 그럴 만하다고, 약속 장소나 버스 번호를 잊어도 집을 찾아오신 것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몇 번의 가벼운 소동 후에 가벼운 인지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고 깨서는 해가 질 무렵의 시간이 저녁인지 아침인지 헷갈리곤 하셨다. 91세가 되신 지금은 낮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주변이 어둑해지면 아침과 저녁을 헷갈리실 때가 있다. 늘 끼는 보청기도 왼쪽 오른쪽 구별을 못 하고 아무렇게나 귀에 넣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상에 서툴러지고 몸은 점점 약해진다. 붉게 내려앉은 저녁노을이 점점 까매지면서 캄캄한 밤이 되는 것처럼 아버지 삶도 그렇게 끝나겠지. 나는 그 과정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시리다.
아버지는 딸 둘을 낳고서야 기다리던 아들 둘을 낳았고 생각지도 않던 막내딸까지 얻었다. 다복한 듯했으나, 잘나고 자랑스러운 작은아들이 죽었다. 여름 방학에 갑자기 아팠는데 읍내 병원을 거쳐서 간 대학병원에서도 이유를 못 찾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죽어서 데려온 아이를 처남이 어딘가에 묻었다고 했다.
작은아들을 마음에도 묻지 못하던 어머니는 자주 다니던 점쟁이가 소개한 여자와 영혼결혼식을 치러 주었다. 신부가 된 그 여자는 스물 몇 살에 죽었지만, 작은아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결혼 못 하고 일찍 죽은 딸이 늘 마음에 걸려 점쟁이를 찾곤 했었단다. 이제 짝을 지어줘서 당신은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눈물 바람을 하며 어머니에게 고마워했다. 아버지는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어머니 행보를 묵인하셨지만, 당신의 입에는 한 번도 작은아들 얘기를 꺼내신 적이 없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꽤 오랫동안 평안한 일상이 스쳐 갔으나 또 한 번의 슬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큰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딸은 마음에 안 들어 했는데, 교육자 집안이라 좋다며 시집을 보냈단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나고 좀 그렇다는 어머니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단다. 점잖은 사람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큰딸은 시부모뿐 아니라 시누이, 시동생에게도 시집살이하며 쭉 속을 끓였고, 너무 힘들면 가끔 아버지 탓을 하기도 했다.
큰딸은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했다. 어느 겨울, 눈길에 미끄러져 손을 삐끗해서 병가를 내었다. 쉬는 김에 평소 아팠던 허리를 치료하려고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단다. 그런데 그 사진 아래쪽 대장에 있던 시커먼 암 덩어리가 찍혔다. 대장암 4기였다. 대장암이 심해져서 허리가 아픈 것이었다. 그런데 허리병에 먹는 독한 약 때문에 속이 쓰리다고만 생각했단다.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손써볼 틈도 없이 저세상으로 갔다. 그때 큰딸의 나이는 오십이었다. 벌써 17, 8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는 작은아들도 그랬듯이, 큰딸 얘기를 한 적도 없다. 큰딸이 있는 추모공원에도 간 적이 없다. 그 공원에 한 번 발을 디디게 되면 그는 마음을 다시는 다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의 입에서 그들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순간 그가 녹아 버릴 것 같기도 하다. 그는 평생 온몸으로 슬픔을 진 것은 아닐까?
오늘도 아버지와 점심을 먹었다. 젓가락질하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백발에 맑은 얼굴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당신의 시간이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을 아시고 계시겠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 내셨는지, 그 쓰디쓴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알고 싶지만, 물을 수 없다. 그저 남은 아버지의 시간이 평안하도록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