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6.사순 제1주간 금요일 강론>
<마태5,20ㄴ-26>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육신은 변하는데,
어렸을 때도 “나”요, 컸을 때도 “나”입니다.
인간은 영혼이 있기에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해야될 일이 많겠지만,
자라면서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도록 해야합니다.
그리하여 20살 때는 독립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지도해야 합니다.
“나”라는 정체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춘기를 지나야 합니다.
사춘기 이전에는 어른들의 가르침대로 사는 시기이지만,
사춘기 때는 어른들 처럼 욕구들이 다 살아난 시기입니다.
어른들의 가르침이 정말 맞는지 자신의 욕구들을 살아보고 확인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때는 방향성만 잡아주고 자신들의 힘으로 준비하고 행할 수 있는 역할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춘기 때는 독립할 수 있는 준비의 시기이므로 이 때 독립되지 않으면 부모님을 보호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됩니다.
20살이 되었을 때는 사춘기가 끝난 때이며, ‘나’라는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이 때부터는 독립을 위해 밖으로 내 보내서,
자신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할지 배우는 시기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 지성 기억 의지를 통해 쌓아둔 모든 기억들과 신념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은 있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몸에 기억과 신념들이 쌓여 있기에,
머릿속을 비워내지 않으면 신념에 따른 부정적인 생각으로 몸이 힘들게 됩니다.
예를 들면, ‘착해야 한다’라는 신념을 머릿속에 갖고 혼자 청소하는 행동을 해왔다면,
20살이 되면 “왜 나만 착해야하나?”라는 물음이 올라와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착한일을 해야하며, 착한 일을 하면서도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착해야 한다’는 신념을 비워낼 때에야 비로소 스트레스에서 해방됩니다.
그 이유는 ‘나는 착하다’는 신념에서 자유로워져서, 몸이 편하면 청소하고, 피곤하면 억지로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청소를 하든 안 하든 “청소를 같이 하자고 말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자기가 할 만큼만 합니다.
내가 ‘착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착한 일을 억지로 하게 되면 착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착해야 한다’는 신념을 비워낸 상태에서 몸에 밴 습관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사실상 정말 착한 것입니다.
결국 20살 되기 전에 신념으로 살아왔고,
20살 이후에는 의식 차원에서 지성 기억 의지를 비워내고,
무의식 안에 그 신념들을 비워냈을 때, 그 신념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젊은 시절은 이상으로 살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게 됩니다.
갱년기는 48세 정도에 옵니다.
사춘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갱년기라고 하지요.
사춘기 아이가 갱년기 엄마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갱년기는 몸이 변화무쌍합니다.
몸의 변화를 정신이 이겨내지 못해서 육체의 수련이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또한 육체와 영혼이 일치가 될 때 진정 자신이 됩니다.
육체와 영혼이 일치한다는 것은
자신의 악습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악습을 행하기 전에 무슨 행동을 하는 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 전행동과 악습 사이에 새로운 행동을 끼워넣으면 됩니다.
이 악습을 고치면서,
내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식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 에고가 있는 한 이 기도와 정화의 작업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내가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내 몸이 아니라 예수님 몸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안에 에고가 없으면 이러한 말을 들어도 내가 없으니 상관 없게 된다는 것이고,
또한 그러한 말을 할 상황에서도 에고가 없으니 달리 대응하게 됩니다.
결국 에고 작업을 하면서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됩니다.
방법은
떠오르는 기억들을 순간순간을 예수성심께 봉헌하며(정화),
기억이 없어지면 예수성심께 의식마저 내려놓고 머무는 것(기도)을 하면 됩니다.
이 상태에서 떠오르는 무의식들은 예수성심께 봉헌하며(정화),
생활 안에서도 예수성심께 봉헌(정화)과 머무름(기도)를 할 수 있도록 수련이 필요합니다.
<Matthew5,20b-26>
I tell you,
20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your ancestors, 'You shall not kill; and whoever kills will be liable to judgment.'
22 But I say to you,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23 Therefore,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24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25 Settle with your opponent quickly while on the way to court with him. Otherwise your opponent will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will hand you over to the guard, and you will be thrown into prison.
26 Amen, I say to you, you will not be released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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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열대 밀림 한복판에 있던 포로수용소에는 늘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지독한 무더위와 살인적인 배고픔에 포로들의 얼굴에는 이미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식량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던 수용소였기에 쥐를 잡아먹는 것이 큰 횡재로 여겨져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런 수용소 안에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미국인으로 가방 깊숙한 곳에 양초를 숨기고서, 가장 위급할 때 중요한 식량이 될 것이라면서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친구들에게도 꼭 나눠주리라는 약속을 했다.
어느 날 한 포로가 서글픈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었군.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집에서 보낼 수 있었으면....”(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98)/
그러나 배고픔에 지친 포로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양초를 가지고 있던 미국인 포로가 부시시 일어나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서 양초를 꺼내들었다. 다른 포로들은 그가 혼자서 양초를 꺼내 먹는 줄 알고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양초를 꺼내 들고 판자 위에 올려놓더니 숨겨 두었던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갑자기 수용소 안이 환해졌다. 포로들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 둘 촛불 주위로 몰려들었다. 촛불은 포로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어!”
촛불은 활활 타올라 포로들의 마음까지 비추었다.
“우리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집에서 보내자구.”
누군가 또 이렇게 말하자 포로들은 환하게 웃으며 두 손 모아 기도한뒤, 서로의 소원을 얘기했다. 그날 그렇게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던 포로들은 아무도 배가 고픈 줄 몰랐다.
숱한 어두움의 그림자가 우리를 우울하게 할 때가 있다. 재난, 불황, 실직, 생활고, 취업난, 불화, 이별 등등 저마다 어두움의 색조가 다를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꼭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이 있다. 빛이신 그분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1,5: 공동번역).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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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영혼이란 무엇인가요?
영혼은 각각의 개인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적 삶의 원리이자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물질 상태인 몸을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가 되게 합니다. 영혼을 통해 인간은 ‘나’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한 개인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존재가 됩니다.[362-365, 382]
“당신 몸에 유익한 일을 행함으로써 영혼이 그 안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십시오.”(예수의 데레사 성녀(1515~1582), 스페인의 신비가이자 교회 학자)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긴밀히 일치될 때 진정 그 자신이 됩니다......인간이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기만을 갈망하고 육체를 단지 인간의 돌물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려 한다면, 영혼과 육체 모두 그 존엄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영혼을 거부하고 물질, 곧 육체를 유일한 실재로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간의 위대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지닌 존재입니다. 인간이 지닌 정신은 신체의 기능 이상의 것이며, 인간이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성은 우리에게 육체와 연관되어 있지만 육체는 아닌, 정신적인 원리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영혼을 자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물질을 초월하는 인간의 이 정신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적이고 정신적 존재로서 이해될 수 없습니다.->153-154, 163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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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
->362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2,7)(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66)/
는 성서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전체적인 인간을 원하신 것이다.
->363 영혼이라는 말은 성서에서 종종 인간의 생명이나(마태16,25-26; 요한15,13 참조)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사도2,41 참조).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마태26,38; 요한12,27 참조), 가장 가치 있는 것을(마태10,28; 2마카6,30 참조) 가리킨다. 그리고 특히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킨다.
->364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 모습’의 존엄성에 참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육체인 것은 정확히 말해서 영혼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성전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전체이다(1코린6,19-20; 15,44-45 참조)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차원에서도 이미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그 안에 집약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에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서 자유로이 자신들의 창조주를 찬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셨고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그 육체를 선한 것으로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사목 헌장, 14항).
->365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은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하다(비엔 공의회(1312), 헌장 Fidei catholicae: DS 902 참조). 말하자면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 육체로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영혼 때문이다. 인(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67)/
간 안의 정신과 물질은 결합된 두 개의 본성이 아니라, 그 둘의 결합으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 형성되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68)/
->382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사목 헌장, 14항)를 이룬다. 신앙 교리는 영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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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신앙의 특성
신앙은 은총이다
->15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태16,17)라고 밝히신다(갈라1,15-16; 마태11,25 참조).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도와 주셔야 하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계시 헌장, 5항).
신앙은 인간 행위이다
->154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조차 우리가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혼인할 때 처럼)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 품위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0)/
여 드러내고”(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3: DS 3008),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일은 결코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1)/
신앙-영원한 생명의 시작
->163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1코린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3,2)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신앙의 축복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라보지만, 그것은 장차 누리도록 신앙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놀라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4)/
것들을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성 대 바실리오, ‘성령론’, 15, 36: SC 17bis, 370(PG 32, 132).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4, a. 1, c: Ed. Leon. 8, 44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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