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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시조 : 전연희 시인 ♣ -2020년 3월 11일 수요일-
달맞이꽃
서늘한 바람 멀리 창을 두드린다
콘트라베이스
있는 듯 없는 듯이 귀퉁이에 서고 싶다
비바체 알레그로 달리고도 싶었지만
영랑을 만나다
강진에 닿고서야 순한 말이 살아온다
늦은 시
잠 못 자고 쓰는 내 시 거짓임을 이제 알겠다
♠ 나누기 ♠
전연희 시인은 1988년 시조문학 추천완료로 등단했습니다. 시조집으로『얼음꽃』『이름을 부르면』『귀엣말 그대 둘레에』와 현대시조 100인선『푸른 고백』등이 있습니다. 네 편의 시조를 소개합니다.
「달맞이꽃」, 참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꽃이지요. 네 벌써 돌아왔니, 핼쑥한 모습 그대로라고 말을 건넵니다. 달맞이꽃을 두고 매창의 젖은 눈빛만큼 노랗게 여문 달빛이라고 노래하고 있군요. 본명은 이향금, 자는 천향, 매창은 호입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되는 시조를 남겼습니다. 지금 읽어도 심금을 울리지요. 화자가 매창을 직접 대면한 듯한 간결한 이미지의 중장은 이 시조의 핵입니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멀리 창을 두드린다, 라는 종장은 간절한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지요. 몹시 아련한 시편입니다. 전연희 시인의 「달맞이꽃」은 너는 둑에 핀다 늘 말없는 여인 이 밤 네 눈빛 속으로 차디찬 강물은 흘러 서늘한 내 이마 위로 문득 건너오고 있다, 라는 또 다른 「달맞이꽃」과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콘트라베이스」는 바이올린 계통의 현악기 가운데 가장 낮은 음역의 악기로 더블 베이스, 콘트라바스라고도 합니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를 듣고 쓴 시이군요. 있는 듯 없는 듯이 귀퉁이에 서고 싶다, 라면서 청명절 솟구치는 높은음자리 선율 아래 가끔은 퉁기어 보는 낮은 음색 그 빛깔로 울리고 싶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때로는 비바체 알레그로 달리고도 싶었지만 안단테 아다지오, 서두르지 않아 좋을 까슬한 융단을 깔고 평원으로 오는 바람이기를 희망합니다. 긴 날을 끌어오던 맑고 높은 하늘 소리와 더불어 헹궈낸 빈 항아리 온쉼표로 쉬는 사이에 겨울 산 듬직한 어깨가 짐을 마저 내리고 있는 것을 눈여겨 바라봅니다. 콘트라베이스가 연주하는 사계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면서 시의 울림이 콘트라베이스의 음악적 이미지와 결합되어 아름다운 미적 시공간을 펼치고 있군요.
「영랑을 만나다」는 영랑의 고장 강진에 닿고서야 순한 말이 살아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시가 풀려나옵니다. 그곳에서 엷어진 내 순수가 꽃으로 다시 피는 것을 감지하고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이 볼우물에 고요히 고이는 것을 느낍니다. 순수시의 최고봉의 시인 김영랑은 실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의 끝을 보여준 시인이기에 화자에게는 각별한 정서적 파장을 안기고 있지요. 도란도란 귀엣말로 모란은 이우는데 날이 선 낯선 말을 부끄러이 걸러내면 돌아선 걸음걸음에 저려오는 모국어는 모두 영랑의 시에서 비롯된 영향입니다. 정말 「영랑을 만나다」와 더불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군요.
「늦은 시」는 시를 두고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여실합니다. 백 편 천 편을 버리지 않으면 최후의 한 편, 최후의 한 줄을 얻을 수가 없지요. 화자는 잠 못 자고 쓰는 내 시가 거짓임을 알게 되어 참이라면 술술 흘러 물처럼 맑지 않으랴, 라고 자성하면서 다디단 언어를 꿰어 한밤 내내 암실이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가두고 뭉쳐 두었던 부끄러운 기억의 바닥 메타포에 갇힌 허위의 날개옷을 걷어냅니다. 내면의 갑옷마저 벗은 맨살 환한 한 줄 시를 얻기 위해서지요. 언어의 모래궁전 허무는 일 아득해도 살아온 길 무어 그리 가두어둘 일이던가, 라고 회상하면서 끝까지 깊은 숨 기진하도록 속엣말을 닦는 일에 몰두합니다. 말의 힘, 말의 마력을 일찍이 알아차린 이가 천착에 천착을 거듭하는 모습이 숙연하기까지 합니다.
해가 밝게 떴는데 바람은 차갑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두고 비발디의 봄을 들어보십시오. 음악과 시가 함께 하는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2020년 3월 11일 <세모시>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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