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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59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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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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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F3g6rq92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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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요?>
율법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면 가차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 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12장 2절)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오 복음 12장 5~8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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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휴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일도 잘하는 사람이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OjEq2UbS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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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은 동기들이 한 달에 하루 만나 식사를 함께 합니다. 소위 ‘동기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동기 모임은 전혀 생산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그냥 먹고 마십니다. 그래도 신부 대부분이 동기 모임에 빠지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동기 모임은 정말 비생산적 모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너무 의미가 없어 보여서 아예 동기 모임을 나오지 않는 사제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끼리 얼굴 보고 떠들고 웃고 하는 의미 없는 쉼은 창세기부터 시작한 ‘안식일’에 매우 가까운 쉼입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여 쉬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없을까요? 그동안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 보상을 절대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이상하게 휴가 가서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일하면서 휴가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사실 일의 능률과 직결됩니다.
15년 동안 오로지 골프에 둘러싸인 박세리가 골프여왕답지 않게 두 경기를 계속 컷오프당한 뒤 “골프에 지쳤다. 이제 골프에서 잠시 빠져나오고 싶다. 나는 골프 말고 다른 일상생활을 즐기는 게 필요하다.”라고 자가진단과 처방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정되었지만, 그때가 가장 최악의 슬럼프였습니다. 그녀는 스승이기도 한 아버지에게 “다른 건 다 가르쳐놓고 왜 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일하는 것은 가르치고 쉬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면 다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달리는 것은 가르치고 브레이크 잡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7일의 안식일이 우리가 힘겹게 일하고 사는 오늘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6일 동안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 고생의 대가로 누리시는 것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은 안식에 들게 됩니다. 물론 그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도 세상에서의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안식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행의 보상은 안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그 안식에 들 수 없을까요? 바로 선행에 대해 또 다른 ‘보상’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안식일을 자기만족의 또 다른 일하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그들에겐 남을 비판하면서 오는 맛이 그들 선행의 보상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보상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남을 비판하며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스미르나 교회의 주교였던 폴리카르푸스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카르푸스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인이라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카르푸스는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 자체가 그분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지쳐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하며 보상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함께 쉬는 것만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안식일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기에 다른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 지쳐 쓰러집니다.
부자들은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큰 부자가 되는 것? 이미 부자입니다. 그들은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합니다. 돈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놀지 못하게 될까 봐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성취한 자유, 그다음에 오는 것이 안식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안식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쉼이 목적이 아닌 일은 그 쳇바퀴에 영원히 갇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일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열심히 일한 것의 유일한 보상입니다. 쉼만으로 모든 것이 충만히 채워집니다. 쉼이 아닌 다른 보상을 바라는 사람이 쉬지도 못하고 안식에 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사업에 협력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안식에 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쉬는 것,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 노력에 부어주시는 유일한 행복입니다. 열심히 주님 뜻에 따라 살아갑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쉼을 즐깁시다. 이것을 잘할 수 있을 때 영원한 안식에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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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8 :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이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안식일도 그 깊은 의미를 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 즉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그래서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뿐 아니라, 점점 자기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라고 한다. 이 주장을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물리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 했는지 묻고는 사제들과 레위 지파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 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제물은 바로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8절)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신,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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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그만큼 유다교에서 중요한 율법이었고 지금도 유다인들에게 안식일 규정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던 율법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었다는 것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의 기본 원칙은 ‘쉬는 것’입니다.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안식일에는 ‘일하는 것’, ‘노동’을 모두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무엇이 일하는 것인지 세세하게 규정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의 행동은 분명 일이고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로 답하십니다. 먼저 다윗의 이야기는 아마도 1사무 21,1-7의 내용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에 대한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제는 안식일에도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예외적인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점과 안식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안식일, 곧 지금 우리에게 주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의미를 생각하고 하느님의 업적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화로운 창조에 걸맞은 용서나 자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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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1-2)
이 이야기를 바로 앞에 있는 ‘멍에와 짐에 관한 가르침’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우리는 제자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어떻든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아닐 텐데,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배가 고팠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멍에’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멍에가 아닙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6,8-10) 이 이야기에서,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도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메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강요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거나 타이르면서 그들이 메고 있는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벗겨 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 멍에를 벗기를 거부했습니다.)
<만일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 정도로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그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꾸짖을 수 있을까? 굶주림의 고통을 참고 억지로 주일을 지킨다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 주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주일을 ‘기쁨으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안 지키는 것과 못 지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주일을 못 지키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사람에게 가서 주일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는 그렇게 아파서 주일을 못 지킨 것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6)
바리사이들은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팠다는 특별한 상황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 다윗이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적용하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다윗이 배가 고파서 한 일을 비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한 일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려면, 다윗을 먼저 비난해야 합니다.) 또 사제들은 제사 준비 등으로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하느님과 같은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이고, 또 이 말은, “내 제자들이 율법을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내가 한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꾸짖어야 한다면 당신이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셨으면서도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예수님의 판단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7-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일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지만, 제자들을 ‘죄 없는 이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진짜 죄인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지 않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하기만 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죄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말하기 전에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순서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 준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섬기면서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율법을 지켰는지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어떤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만일에 종교가 사랑도 자비도 없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율법 준수만 강요한다면, 그 종교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폭군일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개인 사정을 내세워서 너무 무질서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 또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면 안 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들의 방종을 내버려 두시는 무질서가 아니라, 정말로 딱한 사정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시는 관심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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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에 분기점이 된 큰 흐름이 있습니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던 인류가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인류는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인류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많아지면서 소유와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소유와 계급은 사회와 질서를 필요로 하였고, 마을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생겨났습니다. 인류는 이런 흐름을 ‘농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제도와 문화, 철학과 종교는 농업혁명의 ‘틀’에서 발전되었고, 우리는 아직도 그 문화유산을 우리가 가야할 이정표로 여기고 있습니다.
석탄, 석유, 전기는 사람과 가축에 의지하던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차는 기차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레방아는 댐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의지하던 배는 기선이 되었습니다. 손으로 만들던 제품을 기계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초가집은 빌딩이 되었습니다. 마을에 살던 인류는 도시로 모였습니다. 총과, 대포, 군함, 비행기는 제국주의를 받쳐주는 힘이 되었고, 힘을 가진 국가는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전기는 밤에도 불을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인류는 이런 흐름을 ‘산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인류를 풍요롭게 하였지만 인류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인류를 빛의 속도로 소통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국가단위의 산업에서 국제적인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산, 유통, 소비, 공급은 국가단위에서 국제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종교가 융합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융합하게 되었습니다. 한 국가의 경제위기는 지구촌의 경제위기로 확대되었습니다. 산업과 경제가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런 흐름을 ‘정보혁명’이라고 합니다. 교통의 발전, 도시화, 국제화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과도 더불어 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보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새로운 ‘혁명’을 이야기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시대를 맞이할 거라고 합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릴 거라고 합니다. 요양원, 병원에는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일 할 거라고 합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로봇이 대신 할 거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류를 새로운 신세계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인류보다 힘과 능력을 더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인류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우성인 사람과 열성인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에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우리를 유토피아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안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혜와 윤리의식이 필요합니다. 철학과 종교의 균형이 함께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문명의 옷을 입는 사람의 마음이며, 사람의 삶입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옷은 갈아입을 수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 저는 당신만을 바라오니, 제 목숨 구해 주소서. 저를 고쳐 주소서.” 제도와 문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삶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도와 문명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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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는 만큼>
마태오 12,1-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랑하는 만큼>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모르더라도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더라도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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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 찬미예수님
어제부터 본격적인 저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즉,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의 성적 채점이 끝난 것입니다. 처음 학생들의 시험지를 받아들고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꼼꼼히 적어놓은 학생들의 시험지와 레포트를 보며 저는 적잖이 뿌듯했습니다. 성실히 공부한 학생들의 답안지가 저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꽤나 난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대평가를 해야 하는 관계로, 고만고만하게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의 시험지에 점수를 매겨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저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소위 말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몇몇 학생들의 시험지였습니다.
‘그래도 한 학기 동안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으며 미리 문제에 대한 힌트까지 주었는데 답을 이렇게 밖에 적지 못했다고? 이건 수업을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는 건데?’ 라는 생각에 섭섭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한 명의 학생은 아예 F학점을 줘야 할 정도로 엉망인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결국 어제 늦은 밤, 점수를 최종적으로 입력하기 직전에 해당 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밝힐 수 없지만 학생의 사정을 듣고 보니 충분히 공부를 하지 못할만한 이유가 있었고 저는 그에 따라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습니다. 그 학생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감사의 인사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학생들의 점수를 입력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교수로서 할 일은 학생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알려주고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학생에게 실망하는 저의 모습에 인간적인 부족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앞서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죄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나 주일학교 학생들 혹은 교사들을 담당하는 저는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실 같은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저의 역할인데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보면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하고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덜컥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바리사이들과 같은 모습이 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비난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법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구약의 계명은 단순히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39가지의 조목으로 세분하여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견주어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의 잘못을 꼽아보자면, 밀 이삭을 잘랐으므로 안식일에 추수하지 말라는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밀 이삭을 손으로 비볐을 테니 타작하지 말라는 죄를 범한 것이 되며, 알곡의 쭉정이를 가려냈을 테니 안식일에 키질하지 말라는 죄 또한 범한 것이 됩니다.
얼핏 보면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세세한 규정들까지 지키며 하느님께 성실하고자 했던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어느 것 하나 어기지 않고 성실했던 이들이었으므로 밀 이삭을 아무런 경계 없이 뜯어 먹는 제자들이 납득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참다운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리사이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란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은혜와 축복을 받는 날, 즉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휴식을 통해 느끼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에 굶주린 이들 혹은 소외된 이들이 있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 베푸는 것이 그 뜻에 더 알맞습니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에 얽매여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는 유대인들의 오류를 지적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 역시 이러한 유혹에 쉽게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처음에는 선의의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이들로 인해 미움이 싹트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심에 감사함을 느끼지만 정작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 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매번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지만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의 얼굴을 보면 화부터 나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유, 미사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평화를 안겨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화에 못 이겨 그 평화를 깨트린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사라지고 죄만 남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지나치게 냉정하게 남을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만든 잣대와 교만에 빠져서 남을 미워하거나 험담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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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주홍 디모테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듯합니다. 떠돌이 생활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얼마나 허기가 졌으면 밀을 생으로 먹기까지 했겠습니까?
배고픔에 제자들은 율법을 생각도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식사를 잘 안하시니 눈치가 보여 예수님과 함께 배고픔을 참아보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몸뚱아리는 음식 좀 달라고 아우성치고 그래서 결국에는 밀밭을 지나갈 때 허기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쭉 지켜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냐며 예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지는 것을 보고 그들의 잘못에 말없이 물러난 제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자신들의 잘못에 죄 없는 예수님이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못마땅해 바리사이들 앞으로 나서려고 했던 제자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그들을 위해 변호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허기를 이해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눈을 부라리며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바리사이들에게 제자들을 위해 직접 변호해주십니다.
제자들을 위해 변호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성부 오른편에 서서 당신의 사람들을 변호해 주시는 성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 ‘저 사람들은 저를 따르던 사람입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며 아버지께 우리를 대신해 청하시는 그분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많은 경우 해서는 안되는 것인 줄 알면서도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치지만 어느새 또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꾸짖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 변호해 주시고 우리를 감싸 안아 주심으로써 우리를 아버지 품에 머물게 해 주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에 앞서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 죄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용서 역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용서 역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용서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죄를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럼으로써 그분의 용서 안에 깃든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잘못을 대신 변호해주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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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구 김경식 보니파시오 몬시뇰]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예부터 밀 이삭을 낫으로 베어 가는 것은 안 되지만, 그 자리에서 손으로 잘라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신명 23,25)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곡식을 따서 비비는 것은 금지된 사항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인 질서를 내세워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십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식일 법이 오히려 사람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간의 생명이 법률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다윗이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은 행동을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즉 어떤 법이든지 인간생명에 이바지하는 법이라야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예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9,3)한 호세아서의 말씀을 빌려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 사랑, 신뢰, 정의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정신을 가지고 제사를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같은 정신으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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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구속주회, 정원순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아파트 당첨될 가능성이 영순위이기 때문에 유리해.”
지하철 안에서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어느 중년 아주머니들의 대화 내용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인생살이에서 남보다 순위가 앞선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남보다 무엇인가를 선점했다는 것은 승부가 속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세상에서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인생살이 가운데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기 마련이다. 우선순위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가치관이다.
우리는 가치관에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로 한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말하자면 가치관은 인생살이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바꾸기가 힘든 모양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제자들이 하고 있다고 예수님께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12,1-2)
이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마태 12,3-4)
하시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앞이고 뒤인지를 바리사이들에게 한 수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신앙생활이 인생살이이고, 인생살이가 신앙생활일진대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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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의사 윤리 등에 대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주인공, 히포크라테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가 상당히 윤리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금 이야기한다면 아마 사회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의 윤리성에 큰 문제가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가 했던 여성 비하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들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지내다 보니 몸에 분비물이 많이 생기고, 이 지저분한 분비물 찌꺼기를 몸에 담아 두었다가 생리를 통해 여러 구멍 중 하나로 배출시킨다. 그래서 월경 시기의 여성은 병을 옮기기 쉬운 지저분한 존재이다.’
어떻습니까? 지금 이 말을 했다면 커다란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지도 않았고, 미혼의 여자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창녀가 하는 행동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재에는 거짓이 된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하느님밖에 없음을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밀 이삭을 뜯는 것은 ‘추수’이고, 뜯은 밀 이삭을 비벼서 겨를 날려버리는 것을 ‘타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 이유 없이는 율법을 어긴 일이 없으시며 언제나 합리적인 설명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행위도 결코 죄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 법 자체보다 안식일의 본뜻인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뜻인 사랑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참 진리입니다. 결코, 세세한 안식일 규정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억압과 규제를 위해서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 안식일을 우리를 위해서 제정하셨다는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비로운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식일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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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힘든 말>
평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이 그렇게 와닿지를 않습니다.사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지를 말하는 책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 있는 제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 내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평소에 이 책을 읽었다면 큰 감동과 함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계속해서 메모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슬픔과 제가 간직하는 슬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슬픔을 안고 저를 찾아온 분에게 해드렸던 말들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싶었습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그 다양한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냥 안아만 줄 뿐입니다. 남에 관한 이야기는 참 쉽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가 되면 힘든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픔은 안아줄 뿐이고, 기쁨은 함께 나누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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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판단의 잣대는 예수님>
-예닮기도-
“이른 아침부터 당신의 은총을 어서 입게 하옵소서.
어디로 가야할 길 내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은총을 어서 입게 하옵소서.”
아침성무일도시 독서후 계응송이 잔잔한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기도하듯, 고백하듯, 일기를 쓰듯 날마다 일어나자 마자 하루가 시작되면서 쓰는 매일 강론입니다. 어제는 만 8개월만에 게시판에 붙어있던 말마디 고백안에 ‘구원’을 넣어, ‘날마다의 강론은 내 운명이요 사랑이요 구원이다’로 정정했습니다. 기도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니 그대로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과 직결됩니다.
바오로 수사님은 떠나셨어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이요, 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구원이자 위로요 영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 역시 기도의 은총입니다. 새벽 산책 기도시 깜짝 놀랐습니다. 수도원 농장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온갖 횡포를 부리던 백해무익하게 생각되던 큰 멧돼지가 감옥같은 덫에 포획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농장 두 수도형제는 다시 일상에 돌아와 배농장에 농약을 살포하고 있었으며 꽃말이 '일편단심', '영원'이라는 무궁화꽃도 피기 시작했고 달맞이꽃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사님은 떠나셨어도 하느님은 묵묵히 한결같이 일하시고 수도형제들은 본분의 제자리에 항구하고 충실하니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기도의 힘, 기도의 은총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입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인명人命 역시 재천在天입니다. 사람의 수명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향한 기도는 간절하고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중병으로 주님께 죽음을 선고 받은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가 참 절박합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기도하며 슬피 통곡하는 히즈키야 임금에게 주님은 즉시 이사야를 통해 응답을 주십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 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히즈키야의 항구하고 충실한 삶과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활짝 열려 있는 귀이자 눈같은 분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듣고 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음으로 시작됩니다. 안식일의 잣대를 들이대며 예수님 제자들의 죄를 추궁하는 무지의 바리사이들에 맞서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는 예수님의 답변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일치된 이런 확신에 찬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항구하고 충실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새삼 하느님 자비의 마음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6-8).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마음이 바로 예수 성심의 자비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궁극의 판단의 잣대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 안식일의 주인인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죄의 유무도 법의 잣대가 아닌 예수님 자비심의 잣대로 하면 당장 드러납니다. 결코 바리사이들처럼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판단의 잣대는 예수님 자비심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올바른 판단이자 분별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더욱 기도하게 되고 이런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이요 저절로 올바른 분별의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나누고 싶은 제 자작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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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로를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이고 우리가 서로에게 자비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서로에게 철두철미해 지고 사나워지지만 신앙인은 서로를 자비롭게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시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관대 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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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주님은 오늘 미사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떠올려 주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결론부터 보자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고 바리사이들이 따지는 상황에서 하신 응답입니다.
"배가 고파서"(마태 12,1)
복음사가는 제자들 행동의 이유를 밝힙니다. 배가 고파서입니다.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제자가 된 이들이니, 딱히 밥벌이 수단이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 장정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아마도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에 의지해 의식주를 해결했을 겁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며,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난까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 사활을 건 이들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나 정황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켰느냐 어겼느냐의 심판이 중요할 따름이지요. 하느님 말씀인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건만 이런 이들은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율법을 운용할 수 있었지요.
제1독서는 하느님 자비의 훈훈한 예를 들려 줍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이사 38,3)
예언자를 통해 죽음을 통보받은 히즈키야 임금이 주님께 기도합니다. 진정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겨온 이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실제로 히즈키야는 유다 역사에서 "주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계명을 지킨 임금"(2열왕 18,1-8 참조)으로 기려지는 선왕입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이사 38,5)
히즈키야의 진실된 기도와 눈물이 주님의 마음에 가닿습니다. 어쩌면 히즈키야의 기도는 자기 죽음을 재고해 달라는 의도였다기보다, 주님 뜻 안에서 당신께 드린 사랑과 충심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였을 것 같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원보다 깊고 진한 사랑 고백입니다.
이에 주님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그의 수명을 열다섯 해나 늘려 주시고 거기에 보태어 아시리아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건 히즈키야가 감히 상상도 못한 자비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발동된 주님 마음에는 못해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계획을 수정하시면서까지 히즈키야가 바라던 기도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시지요.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이사 38,22)
히즈키야의 이 질문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보통 새 삶을 부여받은 이들은 상징적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나 가장 즐겨하던 일 등을 궁금해 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히즈키야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주님의 집에 오르는 것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운 뵙는 것"(화답송)이니까요. 그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정성을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찬미와 흠숭과 사랑을 올리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에게 있어 "삶, 생명"의 정의입니다.
주님께 감히 "표징"을 요구하는 그의 담대함을 의심이나 무례함 같은 단어로 얕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한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여쭈었고, 주님도 기꺼이 시간을 되돌리시면서 응답해 주시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비는 이렇습니다. 그분은 "네가 감히 내게!?!" 하며 괘씸해 하거나 꾸짖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에게 한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지요. 율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가 율법 조항에 매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율법을 만드셨지요. 자비는 율법의 모태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자비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여야 하지요.
앞으로도 율법주의자들과 종교 지배층들의 소모적인 왜곡과 곡해,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 엉성하고 어설퍼서 예수님께 누가 될 빌미나 제공하는 제자들을 이끌고 보호하시면서 꿋꿋이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가실 것입니다.
벗님! 요즈음같이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의 원리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굳게 믿을 때, 범람하는 온갖 말들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를 향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판단이 어려운 미혹과 무명 앞에서 대충 급히 판단하고 심판하기에 앞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고요히 머무르는 지혜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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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의 근거는 예수 부활
루카는 예수 부활의 신비를 시편 16장을 빌려 설명한다. “내 육신은 희망 속에 살리로다. 당신은 내 영혼을 저승(지하 세계, 역자)에 버려두지 않고 당신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시로다.”(사도 2,26-27 참조)
루카에 따르면 – 예수 자신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품고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시편 16장은 그분에게, 하느님께서 그의 육신을 썩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 「희망」에서
♣예수 부활이 없었던들 그리스도교 교회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도들은 예수 부활이 없었으면, 생업에로 돌아갔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의 희망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아 희망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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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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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이 일을 트집 잡은 것은 남의 밭의 이삭을 뜯어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렇다면, 대체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탈출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는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 참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야훼께서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나와 너희 대대에 걸쳐 세워진 표이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는 안식일을 새운 이유와 안식일의 정신이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이처럼, 우주 만물의 주권이 그분께 있음을 알기에,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쉬는 것인가? 곧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 말합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병행 본문인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런 까닭에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성전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정작 형제에게는 꼬투리를 잡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 자신이 사랑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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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 당신께 속한 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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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zVphPLFb2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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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사람과
안식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몸과 마음을
쉬어가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새로운 일상이
펼쳐집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는 날입니다.
사람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의 자비입니다.
안식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가족과
형제, 이웃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휴식과 축복
사람과 안식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을 따뜻이
바라보고
마음을 나누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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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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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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