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출현과다지역 외 1편
이순현
뱀 한 마리 있다
천국에서 떨어뜨린
선물일까 분실물일까
햇볕 따스한 길 가운데 가만히 펼쳐져 있다
뱀, 사람이 처음 발명한
동물, 신과 함께 발명한
선과 악, 사람급으로 부과했던
뱀의 배가 불룩하다
한때 나는 뱀을 끼고 살았다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가락을 회오리치며 휘감은 반지 뱀
중세의 한 황녀가 그림에서 끼고 있던 반지
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뱀에 갇힌 손가락을 보다가
서늘한 뱀의 춤을 보다가
불안하게 따라붙던 친구의 눈길
과다한 뱀의 출현,
그 자리는 지옥이 된다
죽음마저 버려야 들어갈 수 있는
지옥, 더 내려갈 데가 없어서 오히려
편안한 바닥,
독화살처럼 한 줄로 요약된
뱀, 멈출 줄 모르고 날아가는
한 마리가 있다
뱀출현과다지역, 팻말을 지나 몇 걸음째
소스라치며 소리치며 사람들이 달아난다
꿈틀꿈틀 군더더기 없는 천국의 길,
어느 누구도 맞이하지 않는다
원탁
행사에 초대된 열두 사람
원탁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있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앞에
물컵 열두 개는 수위가 다 다르다
원탁을 보고
연못이라 생각한대도 잘못될 건 없지
연못 속에는 으레 달이 가라앉아 있으니까
달을 건지려는 손이 달빛을 타고 내려온다
한 손은 늘어진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은 연못의 달을 향해 뻗고 있는
원숭이들
산란한 눈빛들
물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
달을 꺼내기 어렵지
내 앞에 펼쳐진 달을
한 모금씩 뜯어먹을 때마다
뱁새처럼 좌우로 곁눈질한다
시계 제로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박수소리
가지가 부러진다
허우적거리는 원숭이들
달 속으로 녹아들고
인화성 강한 물질처럼
나는 달아오른다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온도에 따라 물이 되는
버터나 초콜릿처럼
열두 명의 사람은 하나였다가
수십 수만이었다가
연못 속의
원숭이를 다 셀 수는 없다
이순현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 있다는 토끼 흰 토끼.
카페 게시글
Poem&Poetry
뱀출현과다지역 외 1편 / 이순현
문학과사람
추천 0
조회 15
24.03.21 10:3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