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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 잔치 자리, 초청장, 예복 (마22:1-14)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다시’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앞에서도 이미 뭔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장을 보면 21장 33절로 46절에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 비유들을 왜 말씀하신 것일까를 살펴보니 앞서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에 대해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왔으나 사람들이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무시하는 자들의 결국이 어떨 것인지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어느 날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종을 보내어 사람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합니다. 임금이 재차 종을 보내어 다시금 정중하게 초청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기 일에만 매달렸고 심지어는 남은 자들은 임금의 종들을 잡아 모욕을 주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고 합니다.
이후 혼인 잔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기에 임금은 종들을 시켜 네거리로 나가 아무나 데리고 와서 잔치 자리를 채우게 합니다.
이상. 비유 자체만 보면 별 특별한 내용은 없다 싶어 보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이라면 비유에서의 임금이 하나님이시고 그의 아들은 예수님이시라는 것 정도는 금방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여러분은 평소에 이 비유를 보실 때면 어떤 생각을 하셨었나요?
우선 본문의 비유는 기독교가 ‘기쁨의 종교’임을 말해줍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오라고 한 자리가 장례식 자리라면 슬펐겠지만, 결혼식 잔치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렇듯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지 슬픔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늘 기쁘고 즐거움에 찬 생활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기쁘고 즐겁기 싫어서 슬프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기분이나 생각으로만 기뻐하자. 즐거워하자고 한대서 또는 말로만 기뻐해라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은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찌해야 인생이 늘 기쁘고 즐거울 수가 있을까를 알아야만 기쁘고 즐겁게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본문에서 보면 ‘기쁨의 이유’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임금에게서 비롯됐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임금이 베푼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본문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이 인생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각자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자리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우린 세상 그 어떤 일들일지라도 일단은 잠시 물려 두고 예수님이 부르시는 자리 곧 예배에 참여해야 하고 믿음과 기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이 본문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도 다름 아닌 ‘만남’을 강조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을 살며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거절하지 말라! 그런 만남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것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기쁨이며, 이 기쁨을 시작으로 한 주간의 생활 중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인해 기쁘고 즐거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누구라도 당장에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3:23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라고 부르셨다면서 우린 죄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아닐는지요?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만남의 방법은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주셨기 때문에 ‘만남’이 가능해졌습니다.
마태복음 3장과 4장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무어라 선포하셨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당장엔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기에 예수님이 그 천국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늘 천국에 가기 전이라도 이 땅에서의 천국의 삶을 살 기회가 내게도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방법이란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기에 스스로는 은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은혜가 ‘나한테까지 차례가 올까?’라는 생각을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을 보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는데, 율법은 은혜받고 못 받고를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율법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받을 기회가 있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은혜는 누가 받을까요?
임금의 초청에 응한 사람만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듯이 은혜도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는 자만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은혜의 자리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에 있어 예수님이 우리의 초청장 되십니다.
초청장이라고 하니 즉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으시겠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잔치 자리로 오라 하시는 것은 목자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양들을 자기에게로 부르듯이 예수님도 우리를 쉼과 만족이 있는 자리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뜻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믿으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신학적으로 보자면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지만, 신앙적으로는 어떨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 여러분은 시편 23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믿지 못하면 누구에게서든 믿음은 시작도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고백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고, 이 고백을 믿어야만 이후의 다른 내용들이 다 내게도 적용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가 지금은 푸른 초장에 있고 쉴만한 물가에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 되심을 믿지 못한다면 그건 지속되지 않는 요행이거나 일시적인 행운일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 되심을 믿는다면 이젠 어찌 살아야 하나 싶은 형편에서일지라도 내게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펼쳐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이 있어 온 자리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젠 믿으세요. 여러분의 자리가 어떤 자리였든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시기에 이젠 어디서건 그곳이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가 되리라는 걸.
그런데 요한복음 10:11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고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은 나의 목자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절에서 우리를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했던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인도되었듯이, ‘예수님은 나의 목자’시라고 믿는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의 현장에서도 쉬게 하시는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쉼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시는 초청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초청장이라는 건 가지고 있어서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초청장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선은 초청한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다음엔 입구에서 초청장을 내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잔치 자리 입구에서 누군가 막아서며 “당신 뭐요?”라고 할 때 초청장을 내보이며 “내겐 이것이 있는데요!”라고 하면 그다음에 듣게 될 말은 “들어가시오.”인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의 자리로 나아가고자 할 때면 사탄은 어김없이 막아섭니다. 그게 고난이고 환난이며, 걱정이며 실패요, 질병이자 아픔 등등입니다.
그때 믿음을 가진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막아설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여 우리에게도 능치 못할 일이 없게 하시며 형통함의 은혜가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니까요.
또한 본문의 비유는 우리에게 ‘은혜의 실체’를 잘 말해줍니다.
9절로 10절을 보면 청한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자 임금은 종들을 길거리로 내보내 ‘아무나’ 불러오라고 합니다.
이때 ‘아무나’ 잔치에 초청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초대되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자기들의 특권 의식으로 참석하고 안 하고를 골라가며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아무나’는 오늘날엔 ‘누구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세상의 소유나 자격이나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 하실 때 믿고,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하실 때 기도하기만 하면 ‘누구나’ 믿은 대로 되고 기도한 대로 응답받는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무나 참석시킨 탓에 잔치 자리도 채워졌고 그렇게 잔치가 잘 마쳐지나 했는데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본문 11절로 13절을 보세요.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세요. 지금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리 초대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네거리를 오가다가 갑자기 종들의 청함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는 따로 예복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이, 그렇다면 똑같이 네거리를 지나다가 잔치에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예복을 준비한 걸까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 근동 지역의 결혼 예법을 보면 부유층이나 왕실에서 잔치가 있을 때면 초대 손님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주로 겉옷을 주는 편이었는데, 이때 옷을 선물 받은 손님들은 그 옷을 즉석에서 걸쳐 입는 것이 잔치 자리를 빛내주는 하나의 예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선물을 거절하거나, 즉석에서 입지 않는 경우에는 주인을 크게 모욕하는 것이 되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본문은 지금 이런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비유다 보니 예복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로마서 13:14절에 답이 나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앞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는 ‘초청장’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그 은혜를 누릴 자격을 보증해 주는 ‘예복’이 되시는 겁니다.
본문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즉석에서 쫓겨났듯이 예수님이 없으면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리가 되고 말 뿐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젠 분명히 아시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건 내게서 보시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이라는 것을.
또한 하나님이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서든 내게 은혜 주시는 기준도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이렇듯 우리 인생에는 예수님이 계심이 필수이기에 요한복음 3;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셨으니 믿으라고요.
이 ‘예수님만 믿는 믿음!’ 이것이 귀중하건만 새찬송가 311장 후렴구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하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본문 처음을 다시 보세요. 애초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다 무엇 하고 있으며,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5절을 보면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라고 했습니다.
양식과 돈벌이를 위해 밭일하는 거, 의식주와 편한 삶을 위해 사업하는 거,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잠언 16: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늘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항상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서 일을 외면하고 돈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친구를 멀리하고 가족을 등한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의 모든 ‘세상살이’가 다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예배여야 하며,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3절에서는 말하기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시는 예수님은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함 받은 자’는 ‘하나님이 은혜 주시려는 사람’들입니다.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즉 청함 받은 자는 저나 여러분을 포함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지만, 택함 받은 자에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현실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그때나 이제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는 데 왜 예수님을 믿어 은혜받을 사람들이 적단 말인가?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하려 하시려는데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적단 말인가?
하나님은 복 주려 하시는데 왜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적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젠 최소한 저와 여러분만이라도 이런 예수님의 심정에 기쁨을 드리려 해야 합니다. 그러자니 이 자리에 오기 전의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어떤 자리였든 이제부턴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니’라는 믿음으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고 다시 도전하고 다시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청함 받은 자들이기에 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과 복을 누리는 택함 받은 자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